21화. 죽어 마땅한 자 (1)
시엔과 라일라는 공작 저택의 광장을 거닐고 있었다. 죽음의 청기사, 창백한 말의 기수를 상징하는 장엄한 기마상을 뒤로하고.
“이 나라의 정부 내각에서 내 공식적인 직책을 알고 있니?”
“공화국 정부 재무부 소속 제1재무경(First Lord of the Treasury)이자 재무장관을 역임하고 계시죠.”
“그래, 아주 잘 알고 있구나.”
시엔이 대답의 대답에 라일라가 흡족하게 웃었다.
“그럼 재무부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뭐라고 생각하니?”
“세금을 징수하는 일이요.”
“그렇지.”
라일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 세계에서 세금을 받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사부터 시작해서 사병을 거느린 영주들, 성속 제후, 심지어 도시 전체가 무장하고 세금을 못 내겠다고 버티며 농성에 들어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그들에게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서는 결국 힘이 필요하다.
가령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처럼, 모두가 공포에 떨며 감히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의 압도적 힘이.
“궁극적으로 우리 가문이 수행하는 일은, 살아가며 절대로 피할 수 없는 두 가지를 받아내는 것이지.”
“죽음과 세금이죠.”
“바로 그거란다.”
라일라가 그녀답지 않게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얼마 전, 이 나라의 어리석은 자가 그중 하나를 피하려 했더구나.”
“세금을 떼먹었나 보네요.”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카니 상회의 회장이자 가주, 프란체스코 자카니.”
공화국의 3대 상인 가문이라 불리는 바르디, 페루치, 아차이올리 가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가문도 아니다.
“늘 어중간한 것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법이지.”
오히려 3대 상인 가문의 수장들은 너무 잘 알아서 탈이다. 라일라의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고 낯빛이 새하얘지니까.
문제는 애매하게 힘과 권력을 손에 넣은 자들이다.
좀처럼 나이트워커 가문의 위세를 두 눈으로 목격할 일이 없는, 그런 주제에 티끌만 한 힘이나 권력을 손에 쥐면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눈이 멀고 멍청해지는 부류들.
“미리 말해두겠는데, 네가 사냥한 뱀파이어보다 몇 배는 어려운 싸움이 될 거란다.”
“실력 있는 호위기사를 고용했나 보네요.”
“보통 실력자가 아니지.”
라일라가 말했다.
“게다가 엄밀히 말해, 사실 기사조차 아니란다.”
“기사가 아니다?”
“스카디 제도 출신의 오크 전사거든.”
“오크 전사…….”
뜻밖의 말에 시엔이 숨을 삼켰다.
“뭐, 명목상 자카니 가문을 섬기는 기사 작위를 받기는 했다더구나.”
라일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잇는다.
“너도 알다시피, 스카디 제도의 오크 전사가 구사하는 이종족의 검식은 많은 것들이 베일에 가려져 있지.”
“…….”
기사 이상으로 명예롭고 호전적 성향을 과시하는 오크의 검식은 특히나 위협적이다. 하물며 인간처럼 소드 익스퍼트니 마스터니 하는 명확한 기준이 그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다. 왜 그녀가 시엔에게 이 임무를 맡길까 망설였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운명의 창’을 쓰는 네 적수는 될 수 없겠지.”
“창이 아니라 검으로 이길 거예요.”
시엔이 대답했다. 그 대답에 라일라가 의외란 듯이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신기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지 않니?”
“운명의 창에 깃든 힘이라면 이미 충분히 느꼈어요.”
시엔이 말했다.
“그리고 아무리 휘둘러봤자, 저와는 관계없는 힘이란 사실도요.”
“너의 것이 된 이상, 그것은 너의 힘이란다.”
본래 그녀가 해야 했을 말을 시엔의 입에서 듣고, 라일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 * *
그 시각, 신성 제국 그란델 대공령의 저택.
“부르셨습니까, 대공 각하.”
대공의 집무실을 노크하고 나서, 갑주 차림의 기사가 정중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게, 마이어 경.”
검마 그란델 앞에서 예를 표하는 그 기사는, 그란델 대공 가문을 섬기는 기사 중 하나였다. 그것도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고위 실력자.
“경에게 내릴 아주 특별하고 막중한 임무가 있다. 맡아줄 수 있겠나?”
“저는 주군의 의지에 따라 휘둘러지는 검. 오히려 중책을 맡을 수 있어 영광입니다.”
마이어 경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임무에 성공해도 살아서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
그란델 대공의 말에 마이어 경의 눈썹이 씰룩였다. 그러나 동요는 거의 찰나였다. 그것이 기사라는 족속이니까.
“이 목숨, 살아서나 죽어서나 오직 주군을 위하여 휘둘러질 뿐입니다. 무엇이든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나이트워커 공작 가문의 장남을 암살해라.”
그란델 대공의 말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침 그가 영지를 벗어나 틈을 노리기에 ‘적절한 기회’를 준비해 두었다.”
“알겠습니다.”
“말했듯이, 공화국의 땅을 밟은 시점에서는 임무에 성공해도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멀쩡하게 목이 붙어서 살아 돌아올 리가 없다. 설령 살아 돌아와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이트워커 가문이니까.
“각오하고 있습니다.”
“자네의 영지에 남겨진 가족과 형제자매들은 걱정하지 말게. 나의 친가족처럼 각별하게 챙겨줄 터이니.”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대공 각하.”
망설임도 동요도 없다. 마이어 경이라 불린 기사가 묵묵히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대륙 제일의 암살자 가문, 바로 그 가문을 상대로 기사를 암살자로 보내다니. 그란델 대공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다.
애초에 5년 전 나이트워커 가문에게 씻을 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입은 그가, 이런 식으로 암살자를 보내는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살아 돌아온 자는 없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겠지.
그러나 설령 99%의 확률로 실패할 일이라고 해도 1%의 가능성 정도는 있다. 그런 불가능한 도박을 위해 마스터 경지의 기사 하나를 버림패로 쓰는 것쯤, 그란델 대공 가문에게는 손해라 부를 수도 없는 것이었다.
‘장기 말은 지금도 지나칠 정도로 많으니.’
그 순간, 등 뒤의 유리창에서 시린 밤바람이 불었다.
검마 오스왈드가 걸친 금빛 코트가 밤바람에 가볍게 나부꼈다. 옷자락 위에는, 대륙에서 가장 고결하고 명예로운 가문을 상징하는 그리폰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 * *
얼마 후, 제국에 출장 중이던 자카니 상회의 회장이자 자카니 가문의 가주가 공화국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그의 곁을 지키는 기사는, 라일라가 말해준 스카디 제도의 오크 전사뿐만이 아니었다.
출장을 핑계 삼아 신성 제국 및 그란델 대공 가문과 비밀스러운 밀회와 거래를 마치고, 정체를 감춘 흑의(黑衣)의 기사 한 명이 그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 * *
공화국의 심장, 수상 도시 베네토.
이 도시에 사는 이들은 모두가 날 때부터 장사꾼이다. 총독과 유력 가문의 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예술가와 여성, 성직자, 심지어 허드렛일을 하는 시종조차 손에 쥔 푼돈을 앞다퉈 이 나라의 사업에 투자하려 들었고, 실제로 참여할 수 있었다.
국가가 경영하는 대규모 무역과 금융 사업에 금화 몇 닢이라도 보태고, 그 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때는 두 배의 이득이 손에 들어왔다. 혹시라도 실패했을 때는 그들이 정교하게 설계한 보험과 리스크 회피 기술을 통해 각자 돌아가는 피해를 최소화했다.
이 나라는 절대 투자자들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나라가 쌓아 올린 신뢰의 기둥 아래에는, 헤아릴 수 없는 밤을 걷는 자들의 피와 뼈가 묻혀 있다.
그런데 그들이 쌓아 올린 신뢰의 기둥을 위협하는 자가 있었다.
공화국 3대 합자회사(Commenda) 중 하나에 비할 바는 아니나, 그에 버금가는 중견급 상회의 수장.
프란체스코 자카니 회장.
새벽어둠 속에서 시엔이 움직였다. 석호 위에 쌓아 올린 물의 도시, 베네토에서 이동을 위해 땅 위를 걷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수도를 S자로 가로지르는 대운하를 따라 나룻배를 몰며, 새벽녘 어둠 속에서도 레몬빛 등불을 밝히고 있는 거리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나룻배가 뭍에 닿았다. 밧줄을 묶어 배를 정박하고 시엔이 걸음을 옮겼다.
밤바다와 부두가 내려다보이는, 이 도시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저택들이 늘어서 있는 주택가였다.
공화국 중견 상회의 수장, 자카니 가문의 가주이자 회장 역시 그곳에 살고 있었다.
비밀스럽게 담을 넘지도 뒷마당이나 창문을 통해서 들어가지 않는다.
그저 자카니 회장의 저택 앞을 지키는 호위 기사들 앞에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자카니 회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시엔이 말했다.
“밤이 깊었습니다. 무슨 용무로 회장님을 찾아뵈려 하는지, 용무와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정문을 지키는 기사가 정중하게 물었다. 그 물음에 시엔이 침묵했다.
침묵 끝에 바닷바람이 불었다. 시엔의 로브가 가볍게 흩날렸다. 기사들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린다.
“!”
로브 밑에, 별과 단검의 문장이 새겨진 코트 자락이 가볍게 나부꼈다.
“소, 송구합니다! 당장 회장님께 보고를……!”
“그럴 필요는 없다. 자리를 지켜라.”
“아, 알겠습니다!”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젓고 나서는 묵묵히 정문을 지나 저택 내부로 향했다.
어쨌거나 새벽 밤이 깊었다. 도시는 잠들지 않아도 저택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시종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네.’
그런데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이야 그렇다 쳐도, 저택 내부에 경호를 위해 대기해야 할 사람들이 없다. 자카니 회장 정도 되는 거물을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경호를 서야 할 경비병과 기사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벌써 눈치를 채고 도망쳤나.’
애초에 자카니 회장 정도 되는 거물이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나이트워커 가문의 눈과 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그걸 알고도 탈세를 저지르고, 하필 신성 제국에 출장을 다녀오다니─.’
수상해도 너무 수상했다. 그리고 지금의 시엔조차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을, 천하의 라일라가 모를 리 없다.
저택의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실례하겠소.”
발음이나 억양이 무척이나 어설프다. 적어도 이국의 사람이란 것을 확실히 알 정도로.
“뱀 눈깔(Ormr í auga) 시구르드의 후손, 비요른 ‘백곰잡이’ 흐링거라 하오.”
굳이 어둠으로 가득 찬 저택에서 기습을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나 정정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며 이름을 밝힐 따름이다.
그 정체를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일찍이 라일라가 말한 오크 전사다. 무려 2미터가 넘는 거구를 물 샐 틈 없는 전신 갑주로 무장한.
“나머지 호위들은 어디에 있지?”
“이곳에는 없소.”
오크 전사, 비요른이 말했다.
“지금쯤 고용주를 지키며 그의 망명을 돕는 중이라오.”
“역시 그랬나.”
순순히 대답해주는 그 말을 듣고 시엔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 너는 어째서 여기 남아 있는 거지?”
“진정한 전사가 이곳에 올 거라 들었으니까.”
비요른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 ‘진정한 전사’의 입을 막아야 고용주가 무사히 이 땅을 벗어날 거라고 들었소. 그걸 막는 것이 나의 임무라오.”
“나는 전사가 아니다.”
시엔이 차갑게 대답했다. 소맷자락 아래에 숨겨져 있는 ‘왕 시해자’를 꺼내서 고쳐 잡으며.
“나는 죽어도 내 피를 흘릴 생각이 없는 겁쟁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