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죽어 마땅한 자 (2)
“나는 죽어도 내 피를 흘릴 생각이 없는 겁쟁이거든.”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타앗!
어둠 속에서 땅을 박차고 시엔이 쇄도했다. 직후, 족히 2m가 넘는 갑주 차림의 거구를 향해 손에 들린 ‘왕 시해자’를 휘둘렀다. 강철조차 종잇장처럼 찢어발길 수 있는 오러와 저주가 깃든 칠흑의 칼날을.
카앙!
그리고 그 일격을 받아쳤다.
지금의 시엔이 전력을 다해 자신의 기척을 감추고 생명의 기운을 억제한 망령의 자세를 아무렇지도 않게 파훼했다.
오크의 두 손에 들린 양손 대검, 클레이모어가 시엔의 왕 시해자를 정확히 받아친 것이다.
‘강하다!’
무시무시할 정도의 힘이다. 손에 쥐고 있는 칼날이 너무나 강하게 튕겨나 버려서, 재빨리 다음 공격을 이어갈 수도 없다.
오크의 육체는 강하다. 그러나 방금 그가 보여주는 힘은 결코 순수한 육체의 힘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어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넘어서려는 의지, 자신의 피와 살과 뼈를 극복하려는 인간찬가의 의지─ 오러다.
오러를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 뱀파이어나 리치 같은 불사자는 물론,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가는 엘프들조차 오러의 힘을 쓸 수 없다. 인간이 아니니까.
그러나 오크는 아니었다. 그들 역시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니까.
그저 피부색이 다르고 체구와 골격이 유독 강대하며 힘이 세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는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을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오크’라는 멸칭을 붙이는 것도 같은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눈앞에 있는 오크 전사…… 비요른 흐링거라 불리는 인간은 오러의 힘을 쓸 수 있다.
쓸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기사를 기준으로 쳤을 때 아무리 못해도 익스퍼트 상급, 아슬아슬하게 마스터에 미치지는 못하나.’
애초에 익스퍼트 상급이니 마스터니 하는 지표는 생각처럼 절대적이지 않다.
실전에서는 마스터의 강자가 익스퍼트급 기사에게 목숨을 잃고, 오러를 과신하는 익스퍼트급 기사가 오러조차 쓰지 못하는 기사의 스틸레토에 경동맥이 찔려 죽는 일조차 드물지 않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기사는 제아무리 익스퍼트 상급이니 어쩌니 해도, 전장을 구르며 실전 경험을 쌓아온 이들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눈앞의 상대는 강했다.
카앙!
비요른의 클레이모어가 휘둘러졌다. 대검의 무게와 육체의 힘에 오러의 폭발력을 더하며 적을 압박하는 육중한 검식.
스카디 제도의 오크 부족들이 자랑하는 「설산의 자세」.
카앙!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무지 틈을 노릴 수가 없다.’
심지어 전력으로 망령의 자세를 펼치는 시엔조차, 자신의 존재를 오롯이 감출 수 없었다.
그러다 이내 깨닫는다.
‘아니, 망령의 자세를 읽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시엔이 펼친 망령의 자세는 너무나도 효과적으로 자신을 지우고 있었다. 상대는 시엔의 움직임을 보고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설산의 눈사태가 일대를 휩쓸고 있었다.
폭풍설처럼 몰아치는 대검의 세례.
‘그런가. 일부러 대인용 검식이 아니라 대군(對軍)용 검식을……!’
특정 상대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적을 가정하고 휘둘러지는 일대 다수용 검술.
눈앞의 오크 전사는 처음부터 시엔의 존재를 읽으려 들지 않았다. 그저 폭풍처럼 일대 지형을 집어삼키고 파쇄할 뿐이다.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을 집어삼키는 눈보라 속에서 시엔이 각오를 다졌다.
카앙!
직후 태산처럼 육중하고 시린 냉기가 깃든 대검이 시엔의 자세를 무너뜨린다. 그제야 비로소 ‘공간’을 압박하기 바빴던 비요른이 시엔의 존재를 깨닫고 쇄도했다.
‘지금이다.’
콰직!
동시에 시엔의 옆구리를 찢고, 갈비뼈를 대체하는 칼날의 뼈가 솟아났다.
가시나무의 자세.
심지어 그냥 뼈가 아니다. 칼날의 뼈, 그 이름처럼 금속 합금으로 이루어진 이 뼈에는 ‘오러’의 힘을 싣고 강철 갑주조차 꿰뚫을 수 있다.
실제로도 그랬다. 시엔의 복부를 찢고 솟은 칼날의 뼈가 오크의 흉갑을 꼬챙이처럼 꿰뚫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승부에 쐐기를 박지는 못했다.
“……!”
“자기 피를 흘리는 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구려.”
그 상태로 비요른이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콰직!
‘아슬아슬하게 급소를 피했나.’
가시나무의 자세는 결국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기술이다. 이 검식을 쓰는 것 자체가 자기 내부에서 살을 찢고 칼날을 밖으로 사출하는 자살 행위니까.
비요른 역시 이 일격을 예상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피했다. 흉갑 밑의 심장과 고작 몇 센티미터의 차이를 두고.
전사로서의 직감이 위험하다고 속삭여준 것이다.
‘강하다.’
어째서 어머니가 이런 고심을 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눈앞의 상대는 소드 익스퍼트 상급이니 마스터니 하는 ‘라벨’ 따위로 규정할 수 없는 역전의 용사였다.
망령의 자세나 가시나무의 자세도 소용없다. 하물며 저런 강자를 상대로 제9식을 쓰는 것도 사실상 자살 행위다.
‘운명의 창…….’
일순 시엔이 가진 또 하나의 힘에 생각이 미쳤다. 생각하고 나서 이내 고개를 젓는다.
‘상대도 타격이 없지 않다. 장기전으로 질질 끌고 갈 생각은 없겠지.’
여기서는 승부를 걸어야 했다.
콰직!
거추장스럽게 복부를 찢고 튀어나온 칼날의 뼈를 부러뜨린다. 입에서 피가 울컥 솟았다. 그 상태로 시엔이 체내에서 뽑은 칼날의 뼈를 고쳐 잡았다.
왕 시해자와 골검(骨劍), 각각 두 자루 검을 손에 쥐고 시엔이 자세를 다잡는다.
‘이도류?’
그 모습에 비요른이 눈썹을 씰룩였다.
“「톱니바퀴의 자세」.”
시엔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저런 검식이 있었나?’
동시에 검식의 이름을 듣고 나서, 정체 모를 위화감이 엄습했다.
‘그래. 방금 체내의 뼈를 사출했던 공격이 제5식이고, 이도류라면 정체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제2식인가. 톱니바퀴의 자세라, 들은 적이 있는 것도 같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검이 베일에 가려진 것은 알려지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유명해서」였다.
너무 유명해서 대륙의 호사가들이 제멋대로 입을 모아 떠들고 과장하며 제멋대로 살을 덧붙이니까. 그렇게 수십, 수백 겹의 화려한 베일 속에 진짜 핵심이 교묘하게 감춰져 있으니까.
넘쳐흐르는 정보 속에서는 역설적으로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상상일지 알 수 없다.
방금 시엔이 보여준 가시나무의 자세 역시 그렇다.
들은 적이 있었다. 전신의 뼈가 칼날처럼 솟아나 일격을 가하는 검술이라니! 듣고 너무 황당무계해서, 으레 있는 호사가들의 허풍일 거라 지레짐작했다.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친 일말의 미혹이 그를 살렸다.
지금 시엔이 펼치고 있는 제2식 역시 마찬가지다.
‘그 허풍이 아주 틀린 정보는 아니었나.’
톱니바퀴의 자세가 두 자루 검을 쓰는 쌍검술이란 것까지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 그 묘리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정확하며, 동시에 일말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기계처럼 차가운 검식.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는 점에서 이도류란 사실도 아주 이해가 불가능하지 않다.’
생각하고 나서 비요른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타앗!
그 상태로 섬광처럼 거리가 좁혀졌다.
그런데 기계장치처럼 냉혹하되 정직하게 휘둘러져야 할 시엔의 두 자루 검이…… 거짓말을 했다.
기계처럼 냉혹하지 않다. 너무나 격정적이다. 그렇다고 정교하지도 않다. 술에 취한 주정뱅이가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불규칙하다. 그런 주제에 사기꾼처럼 정확하게 허를 찌르고 실을 꾀하는 교묘함의 묘리가 깃들어 있다.
‘실수했다!’
자신의 예상과 정확히 180도 다르다.
처음부터 태세를 잘못 갖췄다. 상대의 자세를 성급하게 예상하고 오판을 내렸다.
그리고 실력 있는 검객들 사이의 싸움에서, 잘못된 판단이 뜻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촤아악!
검이 휘둘러졌고 피가 튀었다.
흘러내리는 피바다 속에서 깨닫는다. 실수가 아니다. 검식의 이름을 읊조린 그 시점부터 함정이었다.
톱니바퀴의 자세에 대해 들었을 때, 그 검식을 부르던 또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거짓말쟁이의 자세」…….”
힘없이 무릎을 꿇고 비요른이 중얼거렸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그런 비요른을 보며 시엔이 대답했다.
“──.”
거짓말쟁이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생각한 시엔이 어느덧 검을 고쳐 잡는다. 승부는 끝났고 검이 휘둘러질 일도 없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고 일말의 오차도 없는 자세.
그 모습을 보자마자 비요른이 허탈하게 웃었다.
“둘 다 진짜였나……?”
“그래.”
거짓말쟁이의 검이라 생각하고 대응할 때는, 아마도 진짜 톱니바퀴처럼 일말의 오차도 없이 맞물린 검식으로 허를 찔렀을 테지.
처음부터 상대의 잘못된 대책을 예상하고 허(虛)를 찌르는 검식.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싸울 수도 있고, 거짓말쟁이처럼 허허실실의 전략을 꾀할 수도 있다. 아마도 상대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미리 진실과 거짓 중 하나를 맞춰 꺼내는 것이다.
“진실과 거짓을 둘 다 말하니, 그럼 거짓말쟁이는 아니겠지…….”
무릎 꿇고 비요른이 중얼거렸다. 갑주째 어깻죽지가 잘린 자기 몸을 내려다보며.
“그렇다고 진실을 말하는 것도 아닌가……. 마지막으로 나를 쓰러뜨린 검의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소?”
“「양치기 소년의 자세」.”
시엔이 대답했다. 그 말에 비요른이 유쾌한 농담을 들은 것처럼 크게 웃었다.
쿠웅!
그 웃음을 끝으로 비요른의 몸이 쓰러진다. 쓰러진 그를 내려다보며 시엔이 묵묵히 침묵했다.
양치기 소년의 자세.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 * *
“양치기 소년의 자세.”
시엔의 말을 듣자마자, 처음부터 두 사람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던 흑의의 암살자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걸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장남은 자신의 밑천을 모조리 드러냈다. 방금 전투로 쓰러진 오크 전사가 시엔에게 가한 타격 역시 무의미하지 않다.
기사로서 가장 비겁하고, 암살자로서 가장 적합한 때가 찾아왔다.
그란델 대공 가를 섬기는 충성스러운 기사, 마이어 경이 칼자루를 고쳐 잡는다.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어둠 속에 감추지 않고.
“…….”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시엔은 동요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럴 틈도 없었다.
전력을 다해 빠르고 신속하게 죽일 뿐.
‘일격에 숨통을 끊는다.’
암살자의 검이 아니다. 대륙 최강의 기사, 그란델 대공께서 친히 ‘소드마스터’란 칭호를 내린 대가의 검이다. 아무리 시엔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막아낼 리가 없다. 이것은 이미 재능이나 실력을 운운할 수 있는 영역의 격차가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나이트워커 가문의 장남이 살아남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늘, 시엔 나이트워커는 이 자리에서 그의 손에 죽을 운명이니까.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확신과 함께 그란델 가문의 기사이자 암살자, 마이어 경이 땅을 박차려는 찰나.
‘!’
저택 천장에 매달려 있던 초대형 유리 샹들리에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일격에 시엔의 숨통을 끊으려던 마이어 경이 급히 몸을 틀었다. 급제동과 함께 자세가 무너져 내렸고, 샹들리에가 부서지며 산산이 흩날린 유리 조각들이 저택의 어둠 속에서 시린 서슬을 흩뿌렸다.
휘몰아치는 유리 조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꾸로 시엔이 땅을 박찼다. 그의 손에 들린 칠흑의 칼날이 흑광(黑光)을 내뿜으며 휘둘러졌다.
카앙!
칼날이 맞부딪친다.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기가…… 달라졌다.’
일대의 기류가 기이할 정도로 차갑고 낯설게 느껴졌다. 무엇이 달라졌다. 그런데 정작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소드마스터, 제국의 이름으로 장검의 대가(Meister des langen Schwerts)란 칭호를 하사받은 일류 기사조차 정체를 깨달을 수 없는 위화감.
바로 그때였다.
후우웅!
깨진 유리 조각들이 가을바람 앞의 낙엽처럼 마력의 기류를 타고 소용돌이쳤다.
‘사이킥 마법!’
보이지 않는 손, 염력 마법을 써서 칼날처럼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쇄도했다. 경동맥이 지나고 있는 목덜미, 흉부의 대동맥 등 급소를 정확하게 노리고 사방에서 칼날 세례가 휘몰아쳤다.
평소에는 방어할 가치조차 없는, 말 그대로 거들떠보지도 않을 공격이다. 그를 지켜줄 믿음직스러운 강철 갑주가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를 지켜줄 갑주가 없었다.
흑의로 전신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기회를 엿보는 암살자가 있을 뿐.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칼날 세례를 피하며 마이어 경이 도망치듯 거리를 벌렸다. 천하의 소드마스터가 고작 이까짓 사이킥 마법 세례 하나 파훼하지 못하고 추태를 보이다니.
그런데 ‘운’이 너무 나빴다.
하필 저택 천장의 샹들리에가 정확하게 머리 위로 떨어질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될까. 그 샹들리에가 하필 초대형 유리 재질에,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흩뿌려져 360도 포위망을 형성하고 사이킥 마법사에게 최상의 전투 환경을 제공해주고 있다. 하필 갑옷도 입지 않은 상황에서.
‘하다못해 가죽 갑옷이라도 입고 있었어도!’
악재가 겹쳐도 이렇게까지 공교롭게 겹칠 수 있나.
“……아.”
생각하다 말고 깨달았다.
이것은 그저 운이 없고 재수가 없는 수준이 아님을.
마치 온 세상이 작정하고 시엔을 지켜주는 듯했고─ 동시에 온 세상이 자기의 죽음을 바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