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23화 (23/200)

23화. 죽어 마땅한 자 (3)

카앙!

사방에서 염동력으로 조종하는 유리 칼날이 빗발처럼 내리꽂혔다. 빗발치는 서슬 속에서 시엔 역시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방금 오크 전사와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지친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힘이 넘쳐서 탈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시엔과 오크 전사가 싸운 전투는 절대 알기 쉬운 봐주기가 아니었다. 시엔 역시 목숨을 걸고 전력을 다해 싸운 혈투다.

‘저렇게 멀쩡할 리가 없다.’

생각하다 말고 마이어 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저 전력을 다해서 쓰러뜨릴 뿐.

타앗!

재차 낙엽처럼 휘몰아치는 유리 칼날을 피해 거리를 벌린다. 벌리고 나서는, 다시금 거리를 좁히기 위해 몸을 낮추고 두 다리의 힘과 오러를 폭발시켰다.

“「섬광의 자세(Lightning Stance)」.”

발밑 일대가 쩍쩍 갈라지며 마이어 경의 실루엣이 섬광처럼 쇄도했다.

아니, 쇄도하려고 했다.

‘!’

때마침 저택을 떠받치는 대리석 기둥이 무너지며 기적처럼 시엔을 지켜주고, 마이어 경의 ‘섬광’을 가로막은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쿵!

미처 자세를 다잡을 틈도 없이 쏟아지는 돌무더기 세례를 피해 몸을 물렸다.

‘빌어먹을!’

석조 저택이 붕괴하며 흩날리는 분진(粉塵) 속에서, 유리 조각들이 시린 서슬을 빛내며 날아들었다. 숨 막힐 듯 휘몰아치는 돌가루 덕에 시야가 흐려진 틈을 노리고.

아니, 어느덧 날아들고 있는 것은 유리 칼이 다가 아니다.

‘사이킥 나이프……!’

직접 움직이는 일조차 없다. 붕괴하는 저택 속에서 기척을 감춘 시엔이, 염동력 마법을 통해 일방적 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유리 조각, 사이킥 나이프, 심지어 부서진 돌 조각까지. 끝없이 휘몰아치는 파상공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크라켄의 자세」─.

위협적이지만 거리를 좁히는 것으로 충분히 파훼할 수 있는 검식. 그런데 거리를 좁힐 수가 없었다.

‘하필 이런 상황에서!’

하필 이런 상황, 하필 갑옷도 입지 않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재수가 없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나? 생각하다 말고 깨달았다.

이것은 어쩌다 재수가 없고 운(運)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었음을.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의 기류가 그의 숨통을 옥죄고 있었다.

마치 이 세계가 그의 죽음을 바라는 것처럼.

오늘, 시엔 나이트워커는 이 자리에서 죽을 운명이 아니다. 이 자리에서 죽을 운명을 가진 것은 바로 마이어 경 자신이다.

마치 온 세상이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 아아…….’

형용할 수 없는 절망감이 그의 숨통을 움켜쥐었다.

세상에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인간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설령 그게 신기의 힘으로 조작된 운명이라 해도.

운명이란 극복할 수 없기에 운명이니까.

촤악!

그 순간, 흩날리는 분진 사이로 그림자가 쇄도했다.

망령의 그림자였다.

“커헉!”

칠흑의 칼날이 휘둘러지며 피가 흩뿌려졌다. 운명에 순응하고 체념한 자의 패배, 마지막까지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발버둥 친 쪽의 승리였다.

* * *

두 강자를 쓰러뜨린 시엔이 자카니 회장의 저택을 나오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이트워커 가문의 그림자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는다.

“돈 시엔.”

그리고 기사들 사이로 뜻밖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커멓게 옻칠한 쇠가죽 코트 차림에, 옷자락 위로는 별과 단검의 문장을 새겨넣은 사내였다.

“……비고 형?”

“오랜만이야, 시엔.”

비고 나이트워커. 시엔과 함께 세례를 받고 가족이 된 형제.

“도와주러 온 거야?”

“가주님의 요청이 있었거든.”

“……내가 그렇게 신뢰가 없었나?”

“그 정도로 너를 소중히 여기시는 거지.”

쓴웃음을 짓는 시엔 앞에서 비고가 고개를 저었다.

“가주님께서는 제국의 암살자가 올 줄 알고 계셨고, 네가 이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 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들어둔 보험 같은 거고.”

“이길 거라고 믿는데 굳이 보험을 들 필요가 있나.”

“실제로 나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잖아.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

열다섯 살의 시엔보다 다섯 살 위, 스무 살 성년이 된 그에게 과거의 앳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나이에 어울리는 늠름함이 있을 뿐.

“상처가 깊다, 시엔. 나머지 이야기는 부상을 처치하고 나서 하자.”

비고가 말했다. 다섯 살 위의 형에 걸맞은 여유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아직 임무가 끝나지 않았어.”

“자카니 회장을 말하는 거지?”

비고가 그럴 줄 알았다며 흘끗 고개를 돌렸다.

“저런 피라미 하나 잡아 오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직접 찾아갈 수고를 덜었네.”

“수고는 내가 아니라 그림자 기사들이 했어. 감사는 그들에게 해.”

저택 앞에는 사륜마차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마치 시엔을 기다리는 것처럼 정중하게.

이윽고 마차의 문을 열자, 남자 하나가 타고 있었다. 낯빛이 새하얘져서 사시나무 떨듯 손발을 덜덜 떨고 있는 남자였다.

“여기 계셨군요, 자카니 회장님.”

“히, 히익……!”

지금쯤 무사히 공화국 국경을 넘어 제국으로의 망명에 성공했어야 할 남자.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습니까?”

시엔이 담담하게 말했다. 남자가 새하얘진 낯빛으로 고개를 젓는다.

“우리 가문과 이 나라를 배신하고도, 정녕 무사히 이 땅을 벗어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 정말로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랬어요.”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저, 저는…… 살 수 없겠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카니 회장이 물었다. 시엔이 차갑게 되물었다.

“살고 싶습니까?”

“아, 아아, 제발, 제발……!”

“그럼 죽을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시엔의 손에 들린 칼날이 자카니 회장의 목덜미를 내리긋는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여기까지가 그의 임무였다.

이튿날 새벽.

베네토를 S자로 가로지르는 대운하, 카날 그란데(Canal Grande) 위에 설치된 어느 보행자용 석조 다리.

바로 그 다리 위로 보란 듯 남자의 시체가 매달려 있었다. 그가 저지른 죄목이 적혀 있는 고발문과 함께.

* * *

얼마 후, 비고와 시엔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수도 베네토의 나이트워커 별장 저택.

공식적으로 이 나라의 재무장관을 맡은 라일라가, 공무를 위해 별저(別邸)를 찾아온 것도 그즈음의 일이었다.

“다시 봐서 기쁘구나, 친애하는 비고.”

“우리의 가주, 경애하는 암살자들의 어머니를 뵙습니다!”

“몰라볼 정도로 강해졌는걸.”

“미하일 대부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라일라의 앞에서 비고가 무릎을 꿇고 정중히 예를 표했다.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렴.”

“……알겠습니다, 공작 각하.”

“모처럼 동생과 함께 휴식을 보내고 있잖니. 조금 더 마음을 느슨하게 풀고 있으려무나.”

“명심하겠습니다, 가주님.”

라일라가 멋쩍은 듯 손을 내젓는다.

명백히 어머니와 아들로 성립하고 있는 시엔에 비해, 그 이외의 가족들이 ‘암살자들의 어머니’를 향해 갖는 감정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경애하고 두려워해야 할 존재, 나이트워커 가문을 이끌어가는 엄격하되 상냥한 가주.

“나 역시 총독궁에서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말이지. 일이 정리될 때까지는 쉬면서 도시의 구경이라도 하고 있으렴.”

“알겠어요, 어머니.”

시엔이 대답했다. 그리고 시엔의 스스럼없는 호칭에 형 비고가 다소 놀란 듯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비고, 동생 시엔을 잘 부탁하마.”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가주님.”

“명령이랄 것도 없는 부탁이란다.”

“소, 송구합니다!”

“아니, 아니야. 그럴 것 없어.”

그 말을 끝으로 라일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귀찮은 어른은 이쯤에서 사라져야겠구나.”

이 이상 뭐라 말을 해도 의미가 없을 거란 사실을 깨달은 듯이.

“가지요, 하이드 경.”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공작 각하.”

라일라가 그녀의 곁을 보좌하는 그림자 기사들의 수장, 섀도우 마스터 하이드 경에게 슬며시 눈짓했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시엔이 쓴웃음을 짓는다.

얼마 후, 별장 저택에 남겨진 시엔이 비고를 향해 물었다.

“가주님이 두려워?”

“……차마 아니라고 말은 못 하겠다.”

“그렇구나.”

시엔이 놀랄 것도 없다는 듯 웃었다.

“저래 보여도 어머니는 좋은 사람이야.”

“너에게는 그런 것처럼 보이네.”

“우리 모두에게 그래.”

시엔이 말했다. 물론 시엔이 말하는 ‘모두’의 범위가 그렇게 포괄적이지는 않았지만.

“가주님의 힘과 공포는, 어디까지나 우리 가족들의 적을 위해 존재하고 있거든.”

“그래, 그렇겠지.”

비고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전부니까.”

스무 살의 어엿한 청년, 어린 시절의 애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비고가 말했다.

그 시절의 어린 천재를 향한 질투도, 좌절도 찾아볼 수 없이, 어느 의미에서는 시엔 이상의 성장을 마친 어엿한 밤을 걷는 자가.

* * *

그로부터 얼마 후.

“다소 갑작스럽겠지만, 둘이서 함께 맡아줄 새로운 임무가 생겼단다.”

수도 베네토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시엔과 비고, 두 형제 앞에 가주의 이름으로 새 임무가 하달되었다.

“얼마 전부터 수상쩍은 쥐새끼 한 마리가 얼쩡거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설마 그란델 가문의 암살자가 또다시 온 겁니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악질적이지.”

라일라가 유감스러운 듯 고개를 저었다.

“더 악질적이라니…….”

“제국의 공안(公安)이란다.”

그 이름에 시엔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동시에 그들을 지칭하는 또 하나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단심문관(인퀴지터)》…….”

그 이름처럼 제국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이단으로 규정 짓는 피도 눈물도 없는 집행자들. 그게 바로 신성 제국의 공안이자 이단심문관이다.

밤을 걷는 자들이 이 나라와 가문을 위해 그림자 속에서 암약할 때마다, 그들 역시 그곳에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너희들을 쉬게 해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상황이 허락해주질 않는구나.”

라일라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비고가 당치도 않다며 대답했다.

“저는 늘 준비되어 있습니다, 가주님.”

“저도 비고 형과 같은 뜻이에요.”

“그래, 두 사람 다 참으로 믿음직하구나.”

어느덧 가문의 아홉 가지 검식에 정통한 메이드맨(Mademan)이 된 20살의 비고 나이트워커.

공식적으로 ‘메이드맨’의 칭호를 얻지는 못했으나, 실질적으로 마스터 이상의 경지에 이른 15살의 시엔.

“그림자 기사들이 쥐새끼의 소굴을 알려줄 거란다.”

그들 두 형제가 맡아야 할 임무는 더 이상 아이들을 배려하는 알기 쉬운 임무 따위가 아니었다.

“가서 놈의 시체를 내 발밑으로 가지고 오렴.”

시린 달빛을 역광으로 등지며 라일라가 말했다.

평소의 시엔을 향해 보여주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얼굴이 아니라, 대륙 제일의 암살자 가문을 이끄는 수장에 걸맞은 기백과 냉기를 품고서.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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