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베네토 도둑 길드 (1)
두 형제가 무사히 임무를 끝마친 뒤, 형 비고는 다음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수도를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기쁜 소식이 있단다, 시엔.”
여전히 수도에 남아 있는 라일라가 시엔을 집무실로 호출했다.
“네가 손에 넣은 골드 록 광산의 올해 금 채굴량이, 때마침 유례없는 대호황을 기록했더구나.”
일찍이 시엔에게 차도살인을 계획한 최고위 뱀파이어, 체사레를 상대로 교섭해 손에 넣은 대륙 최대의 금광.
“그리고 네게 양도된 3할 지분에 해당하는 배당금이 조금 전 금화로 환전되어 공화국 국영은행에 입금되었단다.”
“타이밍이 좋았네요.”
“모처럼 손에 넣은 거금이란다. 개의치 말고 쓰렴.”
나이트워커 가문은 대륙 제일가는 부호 가문이다. 하지만 그들 가문이 부유하다고 해서, 돈을 물처럼 쓰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문의 재산은 가문의 것이지 개인의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시엔이 수중에 넣은 돈은 결코 가문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 돈을 어리석은 일에 쓰든, 현명한 일에 쓰든, 혹은 그냥 가지고 있든, 그것은 오롯이 네가 정할 몫이지.”
“명심할게요, 어머니.”
시엔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 * *
곧바로 공화국 국영은행에 들른 시엔이 자기 명의로 된 계좌를 조회했을 때는, 그야말로 경악해서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올해 골드 록 광산의 금 채굴량은 유례없는 수치, 500킬로그램을 기록했고, 그 지분의 3할을 가진 시엔에게 배당된 액수는 세금과 제반 비용 등등을 제하고 거의 금 100킬로그램에 육박했다.
공화국 금화로 환산했을 때 무려 30,000닢에 해당하는 거액.
대륙에서 가장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이 도시에서 넉넉히 1년을 생활하는 데 드는 돈이 고작 금화 20개 남짓임을 고려했을 때, 말 그대로 천문학적 숫자의 떼돈을 손에 넣은 것이다.
심지어 이 돈은 가문의 재산조차 아니다. 라일라의 말처럼 어디에 쓰든 무엇에 쓰든, 시엔 쓰기 나름의 재산이니까.
심지어 이것은 고작 1년 치 수익에 불과하다. 시엔의 기억에 골드 록 금광의 금맥이 메마르기까지는 앞으로도 적잖은 시간이 남아 있다.
‘진짜로 땡잡았네.’
시엔조차 이렇게까지 큰돈이 수중에 들어올 줄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마르지 않는 황금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이상, 마다할 이유도 없었고.
‘……모처럼이니 좀 질러볼까.’
무엇이든지 쓸 때는 써야 하는 법이다.
특히나 미래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시엔으로서는 더더욱.
* * *
대륙 제일의 부를 자랑하는 베네토 공화국의 심장인 이 도시에서 돈을 쓸 곳 따위는 넘쳐난다.
거액의 도박으로 재산을 하루아침에 탕진할 수도 있고, 입이 떡 벌어지는 보석이나 사치품 따위를 살 수도 있다. 혹은 현명하게 국가가 경영하는 대규모 무역이나 금융 사업에 투자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시엔이 향한 곳은 그런 알기 쉬운 장소가 아니었다.
나룻배를 타고 대운하를 거슬러 도시 상부, 업타운 주택가에 도착한 시엔이 뭍으로 내린다.
흔히 상류층이나 귀족이 거주하는 이 일대는 도시 하부, 다운타운(Downtown) 상업지의 소란과 멀리 떨어진 부유층들의 주거 지역이다. 얼핏 돈을 쓰기에 그리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
시엔은 바로 그곳에서 망령을 상징하는 새하얀 라르바 가면을 쓴 채, 그저 정처 없이 거리를 가로지를 뿐이었다.
“한 푼 줍쇼.”
그렇게 얼마를 거닐었을까, 문득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푼 줍쇼, 나으리.”
비루한 몰골의 거지가 시엔을 향해 돈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보자마자 시엔은 망설이지 않고 품에서 무엇을 꺼냈다.
금화였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오는 것이 더 쉽나니.”
“……가난한 자는 이미 지옥을 살고 있지요.”
금화를 내밀며 시엔이 읊조렸고, 거지가 히죽 웃었다.
“따라오십쇼, 나리.”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남자는 평범한 거지가 아니었다. 애초에 거지가 마음 놓고 돈을 구걸하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이 도시는 빈자(貧者)에게 관대하지 않으니까.
남자가 데려다준 곳은 어느 대저택 앞이었다. 그리고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의 기백이, 아무리 귀족의 저택을 지키는 이들이라 해도 심상치 않다.
“들어가십시오.”
기사들은 거지와 동행한 시엔을 보자마자 정중히 길을 열어주었다.
딱히 시엔의 로브 밑에 있는 ‘별과 단검’의 문장을 보고 그런 게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새하얀 라르바 가면을 쓴 시엔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리도 없다.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마치 가면무도회라도 열리는 것처럼, 시엔과 마찬가지로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가면을 두르고 사교 모임을 즐기고 있다.
온갖 부가 모여드는 이 도시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블랙마켓.
일명 《얼굴 없는 자들의 경매회》.
시엔 역시 함부로 자기 정체를 밝히지 않고 그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어머, 젊어 보이는 도련님이 오셨네.”
그런 시엔을 향해 마찬가지로 가면을 쓴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함부로 자기 정체를 밝히지 않고서, 동시에 교묘하게 상대의 정체를 캐묻고 유도해내며.
“여기에 올 만한 젊은 청년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그들의 말에 어울려 정체를 밝혀도 딱히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오히려 시엔은 그들의 안위를 걱정해 입을 다물 뿐이었다.
여기 있는 이들이 아무리 여우처럼 교활하고 능구렁이처럼 능청스러운 자들이라 해도, 나이트워커 가문의 이름 앞에서는 새 발의 피에 불과할 테니까.
“아, 참으로 과묵하기도 하시지.”
“때로는 침묵이 너무 많은 말이 될 때도 있는 법이랍니다, 젊고 귀여운 도련님.”
그리고 시엔의 침묵을 나약함의 증표로 이해했는지, 가면을 쓴 한 쌍의 남녀 귀족이 능청스레 키득거렸다.
“충고 감사드립니다, 마르코 공. 그리고 이자벨라 양.”
“……!”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는, 많은 말보다 침묵이 나은 법이지요.”
공작새를 닮은 화려한 의장으로 전신을 가린 그들의 이름이 밝혀지자, 일순 당혹스러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그러나 아무리 모습을 숨기려 해도 시엔과 나이트워커 가문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는 법이다.
‘이래서 이런 자리가 귀찮다니까.’
어차피 여기서 정체가 밝혀진다고 죽는 게 아니다. 지금의 ‘얼굴 없는 경매’는 허례밖에 없는 오랜 전통이자 유희일 뿐이니까. 그런데 그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례허식을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게 귀족이란 족속이다.
두 남녀 귀족이 당황하며 급히 자리를 떠났고, 더 이상 노골적으로 시엔을 귀찮게 구는 이들은 없었다.
그 대신, 시엔을 향한 이들의 이목이 전보다 훨씬 더 집중되는 것을 느껴졌다.
‘차라리 입을 다물 걸 그랬나.’
아마 시엔의 심상찮은 눈썰미를 보고 역으로 정체를 파악하는 자들도 있겠지. 도망친 귀족들의 말마따나 이런 데 올 젊은 도련님이 그리 많지는 않고, 그들 중에서 시엔 정도의 눈썰미를 가진 이들의 수는 더더욱 줄어들 테니까.
‘에라, 모르겠다.’
생각해봐야 달라질 것도 없었기에 시엔이 속으로 고개를 젓는다.
그로부터 얼마 후,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사숙녀 여러분, 환영합니다.”
정장 차림 위로 익살스러운 광대 가면을 쓴 남자가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남자는 이 경매를 주최한 호스트였다.
“오늘 밤, 이렇게 어려운 발걸음을 해준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어쩌고저쩌고…… 뭐, 쓸데없는 겉치레는 이 정도로 하죠. 매일 오는 분들이 매일 같은 말을 들어봐야 재밌을 리도 없으니까요. 설마 처음 오는 손님이 계시지는 않겠지요?”
말하다 말고 뭐가 그리 우스운지 홀로 키득거리더니, 다시금 말을 잇는다.
“자, 그럼 알아서 저택 구석구석 마음껏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얼굴 없는 경매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을 모아 무대 위에 상품을 전시하고, 가격을 경쟁하듯 앞다퉈 응찰의 목소리를 높이는 일 따위는 없다.
그 대신, 터무니없을 정도로 널따란 저택을 따라서 저마다 하나둘씩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엔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택의 헤아릴 수 없는 방마다, 마찬가지로 정장에 각각의 마스크로 정체를 감춘 시종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방 정중앙에 크리스털로 빛나는 유리 케이스, 그리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상품들과 함께.
적잖은 이들이 사교 모임처럼 무리를 이뤄 상품을 감상하고 있다.
‘회춘의 비약이네.’
평범하게 귀족들이 관심을 가질 법한 상품은 대체로 그런 것들이다.
‘용의 심장에 엘릭서, 백년설삼(百年雪蔘), 거기다 요정의 과실도 있고.’
젊어지거나, 예뻐지거나, 기력을 샘솟게 하는 그런 기이한 힘을 가진 영약들.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삶의 이치에 조금이라도 발버둥 칠 수 있게 해주는 비약.
그런 것은 어지간한 귀족조차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는 초고가의 매물이 대다수고, 여기 있는 이들조차 출혈을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생로병사의 순환을 늦추기 위해 그들은 얼마든지 출혈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정작 시엔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들이다.
시엔이 회랑을 가로질러 나선형 계단 2층을 오르자, 전까지와 달리 삭막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검이나 갑주 따위의 마력이 깃든 무구(武具), 아티팩트의 층.
척 보기에도 기사나 마법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귀족들 몇몇이 방들을 둘러보고 있으나, 그 숫자는 1층에 비해 월등히 적다.
그리고 시엔의 걸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나선형 계단을 올라 3층을 향했고, 그제야 시엔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가 있었다. 아까처럼 우스꽝스러운 마스크를 쓴 시종이 아니라, 전신을 갑주로 무장하고 검을 찬 기사들이었다.
“이 앞은 경매품을 취급하는 곳이 아닙니다.”
“나도 알아.”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굴 없는 자》에게 별과 단검의 주인이 왔다고 전해라.”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 말뜻을 헤아린 기사들이 황급히 예를 갖추며 길을 비켜준다.
그리고 그들이 터준 길을 따라 복도를 가로지르자, 하나의 방이 시엔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애하는 밤을 걷는 분을 뵙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방문이 열리고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까까지의 과장된 말투와 달리, 무척 정중한 목소리로 경매의 호스트 ‘얼굴 없는 자’가 예를 표했다.
여전히 입이 쭉 찢어진 어릿광대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혹시 저택의 상품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요.”
“따로 찾고 있는 상품이 있거든.”
“제가 비록 일개 장물아비기는 하나, 이래 보여도 없는 것 빼고는 다 팔고 있답니다. 말씀해 보시지요.”
“혹시 검술도 팔아줄 수 있나?”
“그거야 물론이죠. 말했듯이, 저희는 없는 것 빼고는 뭐든지 다 팔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얼굴 없는 자가 웃었다. 비록 마스크 너머로 가려진 그의 진짜 얼굴을 볼 수는 없었으나.
“「얼굴 없는 자세」.”
시엔이 대답했다. 순간, 남자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진다.
“나는 ‘얼굴 없는 자세’를 배울 수 있는 검결이나 검술서를 찾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파는 상품이 아닙니다.”
“아니, 아까는 없는 것 빼고 다 팔아준다며? 내가 없는 걸 팔아달라고 요구했나?”
“흠, 이것 참 당혹스럽네요…….”
남자가 당혹스러운 듯 쓴웃음을 흘렸다.
“저는 그저 일개 장물아비일 뿐이랍니다.”
대륙 제일의 암살자 가문 앞에서 감히 당치도 않다는 듯이.
“경애하는 밤을 걷는 분들 앞에서 우리의 ‘얼굴 없는 자세’ 따위는, 검술이라 부를 가치도 없는 하찮은 처세술에 불과하죠. 제 이름처럼 말입니다.”
“천하의 ‘시프 마스터(Thief Master)’가 겸손도 심하네.”
남자의 말에 시엔이 헛웃음을 지었다.
“베네토 도둑 길드의 마스터가, 언제부터 검술이라 부를 가치도 없는 처세술 하나로 올라갈 수 있는 자리가 됐지?”
장물아비이자 도둑이며,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도시를 활동 거점으로 삼는 도둑 길드의 마스터. 그것이 시엔 앞에 있는 남자의 정체이자 또 하나의 얼굴이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달리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별과 단검의 주인들께서 보기에 그렇다는 말이죠.”
“나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으로서 너를 찾아온 게 아니다.”
“흠, 분명 조금 전에 ‘별과 단검의 주인’께서 친히 저를 찾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혹시 제 귀가 잘못 들었나요?”
“그 이름이라도 팔지 않고서는 감히 베네토 도둑 길드의 마스터를 찾아뵐 방법이 없었거든.”
얼굴 없는 자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엔이 대답했다.
“그리고 도둑 길드 마스터 앞에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 내가 딱히 뭘 도둑질하거나 억지로 떼먹으려고 여기 온 거 아냐.”
“도둑 길드 마스터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 지금도 세금과 수수료는 충분히 도둑놈처럼 떼먹고 계시는데요.”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가주님께서 떼먹는 중이시지.”
시프 마스터가 이내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어릿광대 마스크를 벗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직전까지 마스크 속에서 들린 남자의 목소리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차갑고 기품 서린 여성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베네토 도둑 길드의 13대 시프 마스터, 모니카 써틴(XIII).”
어느덧 허리 밑으로 흘러내리는 흑청색 머리카락에, 투명하게 울려 퍼지는 여성의 목소리를 하고서.
“경애하는 별과 단검의 주인이자 밤을 걷는 분을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