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베네토 도둑 길드 (2)
“다시 묻겠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립니까?”
“그럼 내가 가짜로 말을 하러 여기까지 올 정도로 할 짓 없는 사람처럼 보이나?”
“말했듯이, 저는 그저 일개 좀도둑이자 미천한 장물아비일 뿐입니다.”
─얼굴 없는 자, 동시에 베네토 도둑 길드의 13대 시프 마스터 ‘모니카 써틴’이 대답했다.
“그런데 대륙 제일의 암살자 가문, 천하의 밤을 걷는 분께서 도대체 뭐가 아쉬워 일개 좀도둑의 잔재주 따위를 배우겠다는 겁니까?”
“못 배울 이유라도 있나?”
“이유야 차고 넘치지요.”
“그래? 어디 들어나 보자.”
“별과 단검의 주인 앞에서 「얼굴 없는 자세」는, 감히 검술이라 부를 가치도 없는 하찮은 처세술에 불과하니까요.”
모니카가 말했다.
“그리고 당장 가문의 검식을 배우기 바쁠 시엔 도련님께서 일개 좀도둑의 검이나 배우고 있다는 사실이 ‘그분’ 귀에 들어갔다가는, 그날이 제 제삿날이 될 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누구도 그녀의 눈과 귀를 피해갈 수 없다.
“가주님은 걱정할 것 없어. 별과 단검의 이름 아래 맹세하지.”
시엔이 말했다.
“아까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으로 온 게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이름이라도 팔아야 내 말을 좀 신뢰해줄 테니, 별수 있나.”
“정말 상황 따라 입장이 손바닥처럼 뒤집히네요.”
“성별을 손바닥처럼 뒤집는 댁이 할 말이신가?”
“……뭐, 그렇다고 치죠.”
흑청색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모니카가 질린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령 그렇다 쳐도 「얼굴 없는 자세」는 우리 도둑 길드의 밥줄이기도 합니다. 설령 밤을 걷는 분이라 할지라도 영업 기밀을 함부로 누설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걱정 마라. 나도 남의 영업 기밀을 공짜로 가져갈 정도로 도둑놈은 아니니까.”
시엔이 말했다.
“금괴 100킬로그램.”
그렇게 말하며 시엔이 품속에서 무엇을 내밀었다. 양피지 서류였다.
“네가 「얼굴 없는 자세」를 가르쳐주는 수업료다.”
그것은 공화국 국영은행과 나이트워커 공작 가문의 이름으로 발행된 공식 환어음(Bill of exchange) 증서였다.
“……진심입니까?”
“우리가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있나?”
금괴 100킬로그램, 공화국 금화로 30,000닢.
시엔이 제시한 액수는 그야말로 파격적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도시를 거점 삼아 활동하는 도둑 길드의 수장에게는, 절대 상상도 못할 액수까지는 아니었다.
“어때,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지?”
“뭐, 확실히…… 좀 많기는 하네요.”
물론 그런 그녀조차 이성을 잃을 정도로 경악스러운 액수기는 했으나, 딱 그 거기까지다.
“그러나 아무리 터무니없는 거액을 제시하신들…….”
“하나 더 있어.”
“뭡니까?”
“내가 그 자세를 완성해주지.”
“……뭐라고요?”
“네가 얼굴 없는 자세를 가르쳐주면, 나는 그 자세를 지금 이상의 완벽한 형태로 다듬어 개량할 거다.”
시엔이 대답했다.
“어쩌면 자세를 완성시키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나이트워커 가문의 검식’이 조금쯤 섞여 들어갈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리고 그걸 네게 가르쳐줄게.”
“……!”
“밤을 걷는 자의 손에서 완벽하게 다시 태어날 「얼굴 없는 자세」가 탐나지 않나?”
시엔의 말에 모니카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린다.
“서로 손해 볼 것 없는 거래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감히 나이트워커 가문의 검을 탐내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누가 검결이나 검술서라도 넘겨준대? 그냥 어쩌다 보니 조금씩 주고받는 거지.”
“빨아먹을 대로 빨아먹고 입막음하려는 게 아니고요?”
“믿고 믿지 않고는 네 자유지.”
“이해할 수 없네요.”
모니카 써틴, 시프 마스터가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손에 들린 마스크를 얼굴에 덧씌운다.
그러자 허리 밑까지 흘러내린 흑청색의 머리카락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광대 마스크 너머로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륙 최강의 암살검(暗殺劍)─ 나이트워커 가문의 9검식을 계승하는 분께서,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그 묘리의 일부까지 흘려가며 일개 도둑놈의 검을 배우려는 겁니까?”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
“마치 그 자세를 보기라도 하신 것처럼 말하네요.”
“왜 못 봤다고 생각해?”
시엔이 되물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아직 지금의 시엔으로서는 그녀, 모니카 써틴이 구사하는 얼굴 없는 자세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훗날의 시엔은 아니었다.
「얼굴 없는 자세(Faceless Stance)」.
베네토 도둑 길드의 도둑들이 배우는, 검술이라 부르는 것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조잡하기 짝이 없는 삼류 밑바닥 검술.
“뭐, 까놓고 말해서 얼굴 없는 자세가 우리 가문의 검보다 열등하다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어. 적어도 사람을 죽이는 데는 말이지.”
대륙 제일의 암살자 가문, 나이트워커 가문의 9검식 앞에서는 감히 발끝도 따라올 수 없는 하찮은 처세술. 시엔 역시 그 사실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럼 대체 뭐 하러 그런 열등한 검술을 배우려는 겁니까?”
얼굴 없는 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시엔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 하찮은 처세술이란 점이 마음에 들거든.”
* * *
검이란 결국 목적을 이루는 도구에 불과하다.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암살자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검을 배운다.
호위 기사는 주군을 수호하기 위해 검을 배우고, 정복 군주의 기사는 주군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검을 배우며, 천릿길을 떠나는 여행자는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호신용으로 검을 배운다.
죽이기 위해, 자신 또는 소중한 무엇을 지키기 위해, 빼앗기 위해.
저마다의 목적과 이유로 검을 쥐고, 그것은 「자세(Stance)」라 불리는 검의 이념이 된다.
그럼 도둑들은 무엇 때문에 검을 배우는가?
─무사히 도망치기 위해서다.
훔친 장물을 갖고 무사히 도망치기 위해, 추적자를 따돌리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살아서 도망치기 위해 검을 배운다.
콰당!
바닥에 엎어진 시엔이 몸을 데굴데굴 굴렀다. 전신에 흙과 모래 알갱이가 덕지덕지 달라붙는다.
“틀렸습니다.”
도시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시린 달빛이 쏟아지는 밤바다의 모래사장.
바로 그 모래 위로 몸을 날리듯 시엔이 데굴데굴 나뒹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어릿광대 마스크를 쓴 얼굴 없는 자가 고개를 젓는다.
“저는 게으른 당나귀처럼 땅바닥을 구르라고 했습니다. 품위나 체통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요.”
“아니, 구르란 대로 굴렀는데…….”
“그래요, 굴렀죠.”
얼굴 없는 자, 그리고 시프 마스터가 말했다.
“게으른 당나귀가 아니라 ‘기품 넘치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로서 말입니다.”
“아니, 이것보다 어떻게 더 당나귀처럼 굴러? 어디 시범 좀 보고 싶네.”
“싫습니다.”
“왜?”
“솔직히 좀 많이 추하거든요.”
“……너, 가르쳐줄 생각은 있냐?”
“보시는 대로 가르쳐주고 있지 않습니까.”
얼굴 없는 자의 대답에 시엔이 황당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 말대로였으니까.
얼굴 없는 자세는, 기본적으로 누구를 죽이는 검도 아니고 거창하게 무엇을 수호하기 위한 검도 아니다.
훔친 장물을 들고 ‘무사히 도망치기 위한’ 검술이니까.
당나귀처럼 추하게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피하는 신법(身法) 따위.
“게으른 당나귀란 비유가 잘 와닿지 않으십니까?”
“그래.”
“그럼 지랄병 걸린 당나귀처럼 바닥을 굴러 보시죠.”
“……진심이냐?”
시프 마스터의 말에 시엔이 황당해서 되물었다.
딱히 체통을 지키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막상 땅바닥에 드러누워서 생쇼를 하려니 묘하게 부끄럽다.
도둑이 지켜야 할 체면이나 명예 따위는 없다. 무사히 살아서 도망치기 위해 추하고 우스꽝스럽게 발버둥 치며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는 자세. 고결함이나 프라이드 따위는 티끌도 찾아볼 수 없는 그것이 바로 「얼굴 없는 자세」니까.
“얼굴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자세.
얼굴 없는 자의 말마따나 검술이라 부를 가치도 없는 하찮은 처세술.
“좋아, 다시 해보지.”
그게 바로 시엔이 굳이 이 자세를 배우려는 이유였다.
콰당!
다시금 몸을 날리며 낙법 자세를 취하고, 그 상태로 모래사장 위에서 몸을 데굴데굴 굴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래투성이가 되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리 추하고 우스꽝스러워도 개의치 않고.
“어때, 이제 좀 미친 당나귀 같지?”
“아주 생쇼를 하시네요.”
“……너 진짜 칼 맞고 싶냐?”
“흠, 칭찬이니 부디 오해 마시길.”
그런 시엔을 보며 얼굴 없는 자가 마스크를 벗었다. 마스크 밑으로 흑청색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투명하고 서늘한 여성의 목소리가 말을 잇는다.
“자, 그럼 이제는 제 공격을 당나귀처럼 굴러서 피할 차례입니다.”
시프 마스터, 모니카가 차가운 기품이 서린 포커페이스로 말했다.
스릉.
어디서 꺼냈는지도 모를 투척용 나이프 몇 자루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후웅!
“몸에 칼구멍 뚫려도 전 모르는 일입니다.”
“!”
말과 동시에 나이프 하나가 시엔을 향해 쇄도했다. 시엔이 다급하게 몸을 날리며 바닥을 나뒹굴었고, 그 상태로 끝없이 나이프가 날아들었다.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고 뒹굴며 피하고 또 피했다. 이리 구르다 저리 구르고, 추하다 못해 우스꽝스럽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동작으로.
전신이 모래투성이가 된 시엔이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배에 칼구멍 뚫리게 생겼는데 체통 차리고 있을 여유는 없네.”
“살아가는 게 썩 폼나는 일은 아니니까요.”
오히려 추하다 못해 우스꽝스럽다. 그게 삶이란 이름의 진흙탕이니까.
“특히 저희 같은 밑바닥 인간들에게는 말입니다.”
“우리라고 다를 것 같나?”
“경애하는 밤을 걷는 분들께서는, 폼에 살고 폼에 죽는 분들 아니십니까.”
모니카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시엔이 헛웃음을 터뜨린다.
“뭐, 아주 틀린 말도 아니네.”
“자, 그럼 맛보기 수업은 이 정도로 하죠.”
모니카가 말을 잇는다.
“참고로 이 뒤에는 더 추하고 우스꽝스러운 동작들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이거보다 더 추한 게 있다고?”
“예를 들어 살려달라고 개처럼 짖는 거라든지.”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고 모니카가 말했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기품 있는 모습에서, 당나귀처럼 구르거나 개처럼 짖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걸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나?”
“살기 위해서 무슨 짓인들 못 하겠습니까. 생각보다 생존율이 높은 기술 중 하나랍니다.”
“진짜로?”
“시프 마스터의 이름을 걸고 보증하죠. 그런데 개처럼 짖는 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서요.”
아마 고결하신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이런 추하고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계속 배울 리가 없겠지.
“어떠신가요, 이제 좀 마음이 바뀌셨나요?”
검술이라고 부를 가치도 없는 하찮은 처세술 따위를,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가 이 이상 배울 까닭이 없다.
“마음에 드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을 듣고 모니카가 눈을 끔벅거렸다.
“흠, 설마하니 개처럼 짖는 걸 마음에 들어 할 줄이야. 의외로 취미가 유별나시네요.”
“……너 지금 나 먹이는 거지?”
“아니, 방금 자기 입으로 마음에 드신다길래.”
“그거 말고 이 자세 말이야.”
시엔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을 잇는다.
“이렇게까지 추할 정도로 살려는 의지가 느껴지는 자세는 처음이거든.”
“…….”
하나하나가 우스꽝스러운 희극을 방불케 하는 동작. 도무지 나이트워커 가문의 고결함과 기품에 어울리지 않는 슬랩스틱 코미디에 가까운 초식.
자세란 곧 검의 정신이다. 그리고 얼굴 없는 자세에 담겨 있는 것은 삶을 향한 집요할 정도의 의지였다.
죽고 싶지 않다. 아무리 진흙탕을 굴러도 이승에서 구르고야 말겠다는 집념, 아무리 추하고 비참해도 살아남고 말겠다는 의지.
이렇게나 생(生)의 의지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자세는 일찍이 본 적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의외로 자기 목숨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지 않거든.”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고방식이네요.”
“목숨보다 소중한 게 생각보다 많으니까.”
─오히려 이 세계의 인간들은 생각보다 자기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추하게 목숨을 부지하느니 명예롭게 죽는다. 지켜야 할 것을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한다.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상대를 쓰러뜨린다. 신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 순교(殉敎)를 자청한다.
“다들 못 죽어서 안달이 나 있지.”
귀족이든 기사든 마법사든 성직자든 예외가 아니다.
그것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강자들의 사고방식이고, 심지어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시엔 역시도 그랬다.
가문을 위해, 가족을 위해, 기쁘게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추하고 비참해도 살아남아야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배워야 했다.
“내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줘.”
시엔의 말에, 기품 서린 얼굴로 포커페이스를 지키던 모니카의 표정이 굳었다.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그 정신을.”
“…….”
모두가 경외하며 두려움에 떠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가,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일을 업으로 삼는 자에게 정중하게 가르침을 청했다.
완전하다 믿어 의심치 않은 가문의 검식을, 그 이상의 경지로 나아가게 해줄 「퍼즐 조각」을 손에 넣기 위해.
‘배울 것은 배운다.’
그게 설령 자세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일개 도둑의 처세술이라 해도.
“개처럼 짖든 당나귀처럼 뒹굴든, 뭐라도 다 좋다. 나에게 이 자세를 가르쳐줘.”
“좋습니다.”
각오를 다진 시엔을 향해 모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 역시 진심으로 가르쳐 드리지요.”
파직, 파지직!
“얼굴을 버린 당신에게, 진짜 얼굴 없는 자세를.”
발밑 일대에서 스파크처럼 휘몰아치는 뇌전(雷電)의 폭풍을 거느린 채, 흑청색의 머리카락이 전류를 머금고 어지럽게 흩날렸다.
그리고 섬광이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