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마스터 시험 (1)
시엔이 시프 마스터에게 얼굴 없는 자세를 배우고 나서 얼마 후.
가문의 밤매 두 마리가, 공교롭게도 각각의 전서를 물고 시엔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마리가 동시에……?’
머지않아 두 아이의 세례식이 거행될 것이다.
별이 떨어졌다.
각각의 서신에 쓰여 있는 짤막하기 이를 데 없는 문장.
하나는 가주 라일라의 이름으로, 또 하나는 가문의 콘실리에리(가장 지혜로운 자) 루나의 이름으로 보내진 것이다.
“…….”
급격히 어두워진 표정으로 시엔이 종이를 찢어 삼키자, 비로소 어깨 위에 올라타 있던 두 마리 밤매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힘찬 날갯짓과 함께 떨어진 깃털 몇 가닥이 밤하늘의 밑바닥을 향해 가라앉는다.
“아, 오해하지 마시길.”
바로 그때, 능청스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고 어두운 수평 너머로 출렁이는 파도 소리와 함께.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밤하늘의 매도, 새 발에 묶여 있는 두루마리도 말이지요.”
“그래, 아무것도 못 봤어야 할 거다.”
“그럼 하던 거나 마저 할까요?”
어릿광대 마스크를 쓴 남자가 시치미를 뚝 떼며 손가락을 튕겼다.
파지직!
동시에 그의 손끝에서 청색의 스파크가 일렁였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공격 마법, 라이트닝 볼트.
그러나 볼트가 내달렸을 즈음에는 시엔 역시 어느덧 몸을 날려서 땅을 박찬 뒤였다.
두 다리의 오러를 폭발시켜 섬광처럼 거리를 좁히는 쾌속의 움직임.
아슬아슬하게 라이트닝 볼트를 비끼며 거리가 좁혀졌다. 그러자 섬광처럼 빠르던 시엔의 움직임이 황소처럼 육중해지고, 독수리처럼 날렵해지더니, 어느새 독사처럼 예리해졌다.
마치 무수한 숫자의 가면을 끝없이 덧씌우는 듯한 풍경.
섬광, 황소(Ochs), 쌍두독수리, 독사(Serpenti velenosi)……. 시엔이 펼치는 동작에는 일찍이 저마다의 이름과 얼굴들이 존재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이 자세에는 오직 하나의 이름과 얼굴이 존재할 뿐이니까.
“이야, 참으로 기가 막히네요.”
「얼굴 없는 자세」였다.
“솔직히 너무 훌륭해서 더 가르칠 것도 없어 보입니다.”
깨닫고 보니 시엔의 손에 들린 왕 시해자가, 어느덧 얼굴 없는 자의 얼굴을 향해 겨누어진 채였다.
“설마 이걸로 끝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흠, 이걸 어쩌죠. 이미 밑천은 밑천대로 다 까발려 드렸는데.”
바로 코앞에서 흩뿌려지는 서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 없는 자가 능청스레 대답했다.
“그나저나 얼굴 없는 자세라더니, 이렇게 다시 보니까 오히려 ‘얼굴이 많은 자세’ 같은데.”
“그럴지도 모르죠.”
시엔의 의문에 얼굴 없는 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없는 게 꼭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아서요.”
얼핏 물 흐르듯 지나가는 말, 그러나 그 말의 의미를 모를 시엔이 아니었다.
“재미있는 검결이네.”
“글쎄, 무슨 말씀이신지.”
검결(劍訣), 검의 시. 하나의 검술을 통달하고 극에 이른 자가 손에 넣은 깨달음의 형태.
“유감스럽게도 일개 도둑놈의 검에 ‘결’이나 ‘깨달음’ 같은 거창한 것은 없답니다.”
─그리고 없는 게 꼭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렇겠지.”
일찍이 사람의 다리는 2개, 문어는 8개, 오징어는 10개, 크라켄의 다리는 몇 개냐고 물었던 가문 제9식의 검결과 마찬가지다. 얼핏 듣기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종잡을 수조차 없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제9식의 검결에 대해서는 특별히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런데 얼굴 없는 자세의 ‘깨달음’은 그렇지 않았다. 당장 차고 넘칠 정도의 갈피를 잡고 실마리를 손에 넣었으니까.
“지나칠 정도로 충분하다.”
“일개 장물아비의 잔재주가 감히 별과 단검의 주인께 도움이 될 줄이야,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네요.”
광대 마스크 뒤로 가려진 시프 마스터의 진짜 얼굴이 키득거린다.
“이후로도 부디, 제 보잘것없는 잔재주가 유용하길 기도하지요.”
“아니, 누가 이걸로 끝이래?”
그 말에 시엔이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 또 만나야지.”
“흠, 이래서 계약서에 함부로 도장 찍는 거 아니라니까.”
“그런데 이미 찍어버린 걸 어쩌나. 수업료 값은 제대로 뽑아야지.”
“이야. 칼만 안 들었지, 이거 완전히 날강도가 따로 없…….”
말하다 말고, 시프 마스터가 흘끗 시엔의 손에 들린 칼날을 보며 덧붙였다.
“아니, 다시 보니까 칼까지 들고 계시네요.”
직전까지 들리던 능청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아니다. 차갑고 기품 어린 여성의 목소리다. 어느덧 얼굴을 가리고 있던 어릿광대 마스크 역시 사라진 채였다.
“그럼 기꺼이, 다시 또 뵐 날을 기대하죠.”
그렇게 말하며 베네토 도둑 길드의 마스터, 모니카가 고개를 숙였다. 방금까지의 농담 어린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로.
“─참고로 별과 단검의 주인 앞에 맹세코, 저는 오늘 밤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듣지도 못했답니다.”
애써 못 본 체했어도, 밤을 걷는 자들 앞에서 마땅히 갖춰야 할 예의를 모를 리 없는 그녀였기에.
“나도 아니까 너무 걱정 마라.”
그걸 아는 시엔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 * *
몇 주에 걸친 수업에 하나의 방점을 찍은 뒤, 시엔이 베네토를 떠나 향할 곳은 오직 하나였다.
밤을 걷는 자들의 대지, 나이트워커 가문의 공작령.
그런데 구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말을 구해 달리는 시엔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과거의 시엔이 13살 나이에 세례를 마쳤을 당시, 당대 기수의 아이 중 살아남은 것은 시엔뿐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시엔이 열다섯 살이 된 올해 이맘쯤 거행될 세례식은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밤을 걷는 자가 태어나고, 시엔에게 있어서는 처음으로 동생이 생기는 날.
그게 시엔이 기억하는 그해 일들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날, 시프 마스터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던 시엔에게 두 마리의 밤매가 도착했다.
하나는 예정대로 시엔이 기억하고 있던 세례식이 거행될 거란 내용이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전서는 그렇지 않았다.
‘올해에 별이 떨어졌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도 없다.’
아니, 들은 적이 없는 게 아니라 애초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리 미숙했던 당시 시엔이 어머니 라일라 밑에서 살아남는 것조차 급급했다고 해도, 별이 떨어질 정도의 중대사를 모르고 흘려넘길 리가 없을 테니까.
이것은 분명 시엔이 기억하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운명이 달라졌다.’
일찍이 죽었어야 할 그의 형, 비고가 무사히 살아남아 가족이 된 것처럼.
그리고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별이 떨어졌다는 것은 오직 하나를 의미했다.
밤을 걷는 자의 죽음이었다.
* * *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시엔이 공작령의 저택으로 돌아오자, 몇 발자국 앞서 도착해 있던 라일라가 담담하게 맞아주었다.
“별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지.”
라일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목소리는 짐짓 담담했으나, 일찍이 세례를 통과하지 못한 밤의 아이들이 죽어갈 때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던 모습과는 다르다. 그때처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누가 죽었죠? 설마.”
가장 처음 뇌리를 스친 것은 과거에 살아남지 못했던 그의 형, 비고의 존재였다.
“아벨이란다.”
그런데 라일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아벨 형이……?”
모르는 얼굴이나 이름이 아니다.
하이마스터나 마스터는 아니다. 그는 시엔과 비고보다 몇 기수 앞서 세례를 받고 메이드맨이 되어 활약하고 있던 가문의 암살자였다.
‘분명 마스터가 되기 위한 시험 도중 목숨을 잃을 운명이었지.’
늦을 대로 늦은 나이에 세례를 받고, 늦은 나이에 메이드맨이 되어, 늦은 나이에 가문의 마스터가 되기 위한 시험을 치르다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던 가문의 둔재(鈍才).
그것이 시엔이 기억하는 아벨이란 이름의 밤을 걷는 자였다.
‘아무리 빨라도 3년 뒤에나 일어날 일이었는데.’
하지만 그의 죽음은 당초 시엔이 기억했던 것과 달리 3년이나 앞당겨졌다.
충격적인 것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신성 제국에서 임무 수행 도중 목숨을 잃었더구나.”
“……제국 놈들의 손에 죽은 겁니까?”
“그래, 살해당했지.”
심지어 사인(死因)조차 다르다.
‘운명이 바뀌었다……?’
마스터가 되기 위해 시험을 치르던 도중 죽은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살해당했다.
“제국에 심어둔 나의 눈과 귀가 속삭이길, 그란델 대공 가문의 검에 쓰러졌다는 모양이구나.”
여기까지도 충분히 경악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뒤에 이어진 라일라의 말 앞에서는 그것조차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대공 가문의 삼남, 오스카 그란델이 펼친 「루시퍼의 자세」에 말이지.”
“!”
루시퍼의 자세.
신성 제국에서 감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금기의 검식이자, 치천사 미카엘의 대척점에 서 있는 악마의 이름.
그것은 검마 오스왈드와 달리, 훗날 4대 천사의 자세─ 그중에서도 미카엘의 자세에 통달할 검성(Sword Saint)에게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검이었다.
* * *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도 피를 흘린다.
시엔이 놀란 것은 가문의 암살자들이 피를 흘린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가족들의 피를 그 누구보다 끔찍할 정도로 보아온 시엔이니까.
하물며 그 상대가 신성 제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기사 가문, 그란델 대공 가문의 인간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5년 전의 그날, 그란델 대공 가의 인간들이 밤을 걷는 자들의 대지를 찾았던 그때.
시엔과 라일라는 후환(後患)을 없애고자 대륙 제일의 검술 천재라 칭송받던 오스카의 검을 철저히 부수고 망가뜨렸다.
그것은 아무리 대륙 제일의 검술 재능을 가졌다고 해도 당시 고작 12살짜리 꼬맹이가 감당할 수준의 시련이 아니었다.
그런데 망가지고 부러졌어야 할 검이 부러지지 않았다.
아니, 부러지기는커녕 당초 시엔이 기억하고 있던 성장세를 까마득히 벗어나 밤하늘의 별을 떨어뜨린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문득 운명의 창에 깃든 힘을 끌어내려 할 때의 일이 떠올랐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끔찍한 무력감. 훗날의 시엔에게 다가올,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뀌지 않고 고개를 돌릴 수 없는 미래의 풍경.
‘고작 그 정도로 네놈 앞에 닥쳐올 운명이 달라질 거라고 믿나?’
운명이란 극복할 수 없기에 운명이다. 바뀌지 않기에 운명이다.
그 말이, 저주처럼 시엔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말대로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아니, 달라지기야 했다. 시엔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형태로.
생각하고 나서 이내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이까짓 게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이라고?’
웃기는 소리였다.
‘부디 살아남아 목숨을 보전하세요, 가주님.’
정말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최악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세례성사가 거행될 때, 적지 않은 가족들이 모이겠죠.”
“그렇겠지.”
각오를 다진 시엔이 입을 열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이 결집하는 것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일이다. 가령 새로운 가족이 태어나는 세례성사 정도의 중차대한 일이 아니고서야.
“「뼈를 만드는 시험(Make one's Bone)」을 치를 생각이니?”
딱히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라일라가 물었다.
“지금의 네게는 필시 여유롭게 통과할 수 있는 일이겠지.”
뼈를 만드는 시험, 나이트워커 가문의 9가지 검식에 어느 정도 정통한 메이드맨이 되기 위한 의식.
“아뇨.”
그러나 시엔은 고개를 저었다.
세례식이 치러질 때, 가문에 모이게 될 밤을 걷는 자들의 얼굴들을 떠올린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강자들이 결집하는 그날. 이토록 흔치 않은 기회를, 고작 아홉 가지 검식의 기초밖에 펼치지 못하는 메이드맨 따위가 되기 위해 낭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견진성사(Confirmatio)를 준비해 주세요.”
“─.”
시엔의 말에, 좀처럼 평정을 잃는 일이 없던 라일라가 말없이 숨을 삼켰다.
아홉 가지 검식에 어느 정도 정통하고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가문의 일원을 일컬어 「메이드맨」.
나아가 아홉 가지 검식 모두에 정통하며, 그중 하나의 검식에 완벽히 통달한 자를 「마스터」.
─견진성사는 바로 그 마스터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시험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