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마스터 시험 (3)
진정한 제1식의 마스터가 되기 위한 비밀.
“그게 뭐죠?”
“이미 답을 알고 있잖니.”
“저는 그저 일개 도둑들의 처세술을 배웠을 뿐이에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태평하게 시치미를 떼는 시엔을 보며 라일라가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네가 견진성사를 치르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겠구나.”
“감사합니다, 어머니.”
“각오해두렴. 견진성사에서 네가 치르게 될 시련은 이런 소꿉놀이 따위가 아니니까.”
소꿉놀이. 방금 시엔이 검결을 되새기며 라일라의 ‘망령의 자세’를 파훼했음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녀에게 이것은 시엔이 견진성사를 치를 최소한의 자격을 알아보는 시험에 불과했으니까.
“확실히 경이롭기는 해도, 이 정도로는 아직 나의 동의를 얻어낼 수 없거든.”
“그렇겠죠.”
“그래도 네가 손에 넣은 깨달음의 실마리를 시험할 가치는 있겠지.”
나이트워커 가문의 제1식, 망령의 자세를 완벽하게 통달했다고 일컬어지는 암살자들의 어머니. 설령 시엔이 나름대로 허를 찌르기는 했어도 이것은 그녀의 말처럼 소꿉놀이에 불과하다.
“가족들이 모일 때까지 남아 있는 시간으로 충분해요.”
그러나 소꿉놀이에 어울려준 것은 시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를 가까이하렴, 시엔.”
어느덧 시엔의 곁으로 온 라일라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망령의 자세의 끝을 추구하는 그대에게 말하나니─”
바로 그때였다.
“다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라!”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그림자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 귀를 막는다.
설령 실수로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절 하나라도 엿들었다가는, 입술의 모양이라도 설핏 봐버렸다가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기에.
시엔과 라일라를 제외한 그림자 기사, 티아를 비롯한 밤의 아이들 역시 황급히 귀를 막고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는 듯이.
“이 세상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벼락으로 이루어져 있단다.”
“…….”
라일라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벼락.
그것은 일찍이 밤의 아버지, 시조 카산 나이트워커가 남겼던 제1식의 극의에 이르는 검결이었다.
심지어 그 검결은 가문의 지하 서고에도 존재하지 않고, 콘실리에리 루나조차 알지 못한다.
오직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주가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주는 일자전승(一者傳承)의 깨달음.
나이트워커 가문이 가진 가장 값어치 있는 깨달음.
시엔이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그날로 시엔 나이트워커는 새로운 가주이자 암살자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갑주 차림의 드레스를 입고 있지도 않았고, 시체들의 산을 쌓아 올린 전쟁터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지도 않았다.
“…….”
동요를 억누르며 시엔이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벼락.
일찍이 시조 카산이 태어났던 동방 대륙의 문자로 일컫기를 《몽환포영로전(夢幻泡影露電)》.
이 검결을 들은 시점에서 더 이상 숨길 것은 없었다. 오히려 시엔이 가감 없이 자신의 진짜 경지를 드러낼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명분이자 밑밥이 될 테니까.
‘이걸로 준비는 끝이 났다.’
공작령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던 시엔이야 밤매를 받자마자 신속하게 올 수 있었지만, 대륙 전역에 퍼진 가문의 인간들이 전부 모이기까지는 제법 시일이 걸린 것이다.
시간은 지나칠 정도로 충분하다. 아니, 사실 애초에 시간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림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길었던 기다림 역시 이제는 끝이 났다.
모두의 앞에서 가장 완벽한 ‘망령의 자세’를 보여줄 때였다.
* * *
그 시각, 신성 제국 내 그란델 대공 가문의 영지.
바로 그곳에서 또 하나의 성사(Sacrament)가 일어나고 있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고해하려고 합니다, 성모님.”
그란델 대공령에 있는 주교좌 대성당의 고해성사실. 그곳의 고해소에서 앳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검술의 재능을 통해 하늘로 오르리라. 하느님의 별들 위로 나의 왕좌를 세우고 북녘 끝 신들의 모임이 있는 산 위에 좌정하리라.’ 하고 말입니다.”
고해의 당사자는 일찍이 대륙 제일의 검술 천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란델 대공 가문의 삼남, 오스카 그란델이었다.
“오만은 인간이 저지르는 죄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죄악이랍니다, 오스카 그란델 형제님.”
고해실 너머에서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형제님께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오만의 죄를 범하셨죠.”
“제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란 것은 없답니다, 오스카 형제님.”
나긋나긋한 여성의 목소리가 말했다.
“오직 죄를 씻느냐, 씻지 못하느냐의 문제일 따름이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제 죄를 씻고 속죄할 수 있습니까?”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을 죽이세요.”
방금까지의 자비와 자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설령 그 과정에서 적잖은 악을 범하더라도, 신께서는 기꺼이 그 악을 사해주실 거랍니다.”
“제가 저지르는 작은 악이, 밤을 걷는 놈들이 저지를 훗날의 더 커다란 악을 막게 될 테니까요.”
“그래요, 바로 그거랍니다.”
오스카의 말에, 고해실 너머의 《성모(Holy Mother)》가 즐거운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시엔 나이트워커를 죽이세요.”
웃고 나서 여성이 말을 잇는다.
“그것이 바로 교만의 대죄를 범하고, 교만의 악마 「루시퍼의 자세」를 구사하는 공자님의 죄를 씻을 수 있는…… 유일의 구제니까요.”
─마치 암살자에게 죽여야 할 살생부를 속삭이듯이.
* * *
그로부터 얼마 후, 시엔의 성사가 시작되었다.
심지어 시험이 치러지는 장소는 공작 저택의 지하 예배당조차 아니었다.
나이트워커 공작령 북부, 공화국과 신성 제국 사이를 가로막는 국경 지대─ 밤하늘 산맥.
대륙 전체를 통틀어 가장 험준하다고 일컬어지는 산맥의 꼭대기, 일명 《달의 사원(Moon Temple)》이라 불리는 곳에서 치러지는 까닭에.
보통 달의 사원으로 향할 때는 산 정상까지 직통으로 향하는 마도학자들의 공중 트램, 일명 궤도운송장치를 이용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견진성사를 치르는 가문의 인간은 궤도차량이 아니라 두 발로 직접, 이 밤하늘 산맥의 정상까지 오를 필요가 있다. 그 시점에서 이미 마스터가 되기 위한 시험이 시작된 것이다.
과거 아벨 나이트워커는 견진성사를 치르기 위해 이 산을 오르다 죽었다.
이곳 밤하늘 산맥은 결코 보통의 산맥이 아니었던 까닭에.
그저 지형이 험준하다거나 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애초에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겨우 그까짓 이유로 산을 오르다 비명횡사할 리 없으니까.
나이트워커 공작령의 북부, 더 나아가 베네토 공화국과 신성 로마누스 제국 사이를 가로막는 국경 산맥.
그렇기에 이곳은 대대로 제국의 침략을 저지해온 천혜의 장벽에서 그치지 않고, 아주 강력한 저주마저 깃들어 있었다.
‘왔다.’
사방이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는 설산(雪山) 중턱. 스러지는 저물녘의 어스름과 함께 저주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사의 저주였다.
뼈밖에 남지 않은 채 검과 전신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망자. 녹슨 갑주에는 일찍이 신성 제국을 상징하는 쌍두독수리의 문장(紋章)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카앙!
불사의 수비병이 시엔을 향해 땅을 박찼고, 그대로 전신의 오러를 내뿜으며 녹슨 철검을 휘둘렀다.
썩어 문드러진 시체가 되어서도, 자신의 살과 피와 뼈를 극복하려는 ‘인간찬가의 의지’를 부르짖으며.
동시에 시엔의 소맷자락 밑에서 왕 시해자의 검고 어두운 서슬이 흩뿌려졌다.
칼날이 맞부딪친다. 직후, 시엔의 등 뒤에서 시린 냉기가 내달린다.
─ 키에에에엑!
거기에는 썩어 문드러질 육체조차 남지 않은, 문자 그대로의 망령이 쇄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망자와 검을 맞부딪치는 와중에도, 시엔은 능숙하게 흑색의 가죽 장갑을 덧씌운 손가락을 튕겼다.
파지직!
일찍이 시프 마스터에게 거액을 주고 산 아티팩트 《뇌전의 장갑》.
벼락이 내달린다.
아티팩트의 힘으로 위력이 강화된 라이트닝 볼트가 망령에게 내리꽂혔다. 동시에 눈앞에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망자의 칼날을 중심 밖으로 흘리며 시엔의 칼끝이 재차 미끄러졌다.
왕 시해자가 서슬 퍼런 궤적을 그리며 녹슨 갑주와 사지를 휘감는다.
촤악!
─ 키이이익!
등 뒤의 망령이 불타올랐고, 눈앞의 망자가 덧없이 무너져 내렸다.
“후우.”
과거 몇 차례고 밤하늘 산맥을 넘어 공화국을 침략하려 했던 신성 제국의 야욕. 그때마다 이 산을 넘지 못하고 쓰러진 헤아릴 수 없는 제국의 병사들.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밤하늘 산맥에 주둔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해치는 불사의 수비대.
이곳은 그 자체로 하나의 뒤틀린 던전이었다.
설령 밤을 걷는 자들조차 자칫 방심했다가 목숨을 잃을 정도의 위협이 도사리는 미궁.
두 발로 이곳 밤하늘 산맥의 꼭대기, 달의 사원이 있는 곳까지 도착하는 것부터 마스터가 되기 위한 시험의 시작이다.
‘여전히 달라진 게 없네.’
물론 과거에도 몇 차례 자력으로, 그것도 지긋지긋할 정도로 산을 타봤던 시엔이다. 이제 와서 이곳의 풍경이 딱히 새삼스러운 것은 없다.
동시에 얼마나 많은 제국의 강자들이 이곳을 넘지 못하고 쓰러졌는지, 그 사실 역시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는 시엔이다.
지금의 시엔조차 결코 방심할 수 없다.
그저 하얗게 쌓여 있는 눈 위로 발자국을 새기며 나아갈 뿐.
* * *
시엔이 홀로 밤하늘 산맥의 정상을 오르기 시작할 무렵.
암살자들의 어머니, 대모(Godmother) 라일라 나이트워커의 앞으로 가문의 형제자매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돈나 나이트워커. 우리의 가주, 경애하는 암살자들의 어머니.”
“어서 와요, 돈 루치아노.”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남성이 라일라의 손등 위로 정중하게 입맞춤했다.
“아벨의 일은 무척 유감이에요.”
“아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을 겁니다.”
그 남자, 돈 루치아노는 일찍이 신성 제국에서 죽은 ‘아벨’의 대부(代父)였다.
“우리 모두의 희생이 그렇듯 말이지요.”
“달리 수확이 있었나요?”
“《죽음의 성모》가 그란델 대공 가문의 삼남과 접촉했습니다.”
“…….”
죽음의 성모.
그 이름에 라일라의 표정에 가벼운 동요가 어린다.
“의외네요. 설마 그란델 대공 가문이 ‘그녀’를 맞을 줄이야.”
“그 여자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 정도로, 삼남의 검이 철저하게 망가져 있었다는 증거겠지요.”
“그래도 결국에는 내밀었지요.”
“그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을 테니까요.”
돈 루치아노가 담담히 말을 잇는다.
“특히 검의 프라이드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대공 가로서는 더더욱.”
그 말에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가 쓴웃음을 짓는다.
지금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밤하늘의 끝자락을 향해 오르고 있을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