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31화 (31/200)

31화. 마스터 시험 (4)

“하아, 하아…….”

숨을 내쉴 때마다 새하얀 입김이 흐드러졌다.

밤하늘 산맥의 고지대, 일명 백야(白夜)의 협곡이라 불리는 순백의 지평 속에서.

콰직!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바닥에 내리꽂은 검을 뽑았다. 다크 미스릴 소재의 왕 시해자가 아니다. 가시나무의 자세를 통해 체내에서 사출한 골검(骨劍)이었다.

세로로 내리꽂은 칼날 끝에는 녹슨 갑주 차림의 스켈레톤 나이트가 뱀처럼 꿰여 있었다.

촤악!

최후의 일격을 먹이고 나서, 왕 시해자와 뼈의 칼날을 이도류의 방식으로 고쳐 잡고 고개를 들었다.

방금 최후의 일격을 내리꽂은 망자를 비롯해 시엔의 발밑에는 헤아릴 수 없는 제국 기사들의 유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의 어느 것도 지금 시엔의 눈앞에 있는 저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죽음의 기사, 데스나이트.

달의 사원으로 향하기 위해 거쳐야 할 수문장.

바로 그 앞을 가로막는 죽음의 기사가, 세월의 풍파 속에서 조금도 녹슬지 않은 은빛의 갑주와 검을 빛내고 있었다.

‘미스릴 소재…….’

대륙에서 가장 값비싼 금속이라 일컬어지는 미스릴. 시엔의 손에 들린 다크 미스릴과 성질 자체는 같다.

은빛의 칼날과 갑주를 따라 찬란한 섬광이 내달린다. 일찍이 시엔이 상대했던 어중이떠중이들과 격이 달랐다.

심지어 그 색은 손에 들린 미스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찬란하고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설령 전신이 썩어 문드러지고 시체 썩는 고약한 악취가 풍겨도 다를 것은 없었다.

저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오러였다.

오직 인간밖에 쓸 수 없는, 자신의 살과 피와 뼈를 초월하려는 인간찬가(人間讚歌)의 의지.

그것도 마스터 이상의 경지에 도달한 강자의 극도로 정제된 오러.

그것을 검에 덧씌우는 것도 모자라 썩어 문드러진 육체와 찬란히 빛나는 전신 갑주에 휘감고 있다.

미스릴 갑주로 전신을 무장할 정도의 기사는 그렇게 많지 않다. 생전에 그가 얼마나 고결하고 명망 있는 기사로 칭송받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자기가 무엇을 위해 검을 들고 싸우는지도 잊어버린 망집의 결정체.

“후우.”

그렇기에 호흡과 함께 시엔이 자세를 가다듬었다.

부상이 없지는 않다. 당장 가시나무의 자세를 써서 체내의 뼈를 사출할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밤하늘 산맥을 며칠 밤낮으로 오르며 끝없이 이어진 사투로 시엔의 육체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힘들다.’

힘들었다.

‘진짜 힘들어 죽겠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주저앉아서 쉬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이대로 다 집어치우고 주저앉아 쉬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멈출 수 없었다.

설령 그게 눈앞의 망자와 무엇 하나 다를 바 없는 망집(妄執)이라 하더라도.

파지직!

시엔이 흑색의 가죽 장갑을 덧씌운 손가락을 튕겼다.

1위계 마법, 라이트닝 볼트의 영창.

보통 라이트닝 볼트가 아니었다.

첫발이 쏘아진 시점에서 이미 시엔의 손끝을 따라 두 발째, 세 발째의 벼락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일말의 지연(遲延)조차 없이.

결투자의 자세라 불리는 마법사들의 속사 영창.

그러나 시엔에게 있어서는 그저 ‘얼굴 없는 자세’였다.

심지어 속사의 대가로 희생돼야 할 위력을 뇌전의 장갑이 보조해주며 파괴력을 증대시켜준다.

시엔의 라이트닝 볼트는 명사수처럼 정확히 데스나이트의 갑주 틈새, 그야말로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이음새 사이로 뱀처럼 파고들었다.

─그러나 죽음의 기사는 개의치 않고 어느덧 시엔의 코앞까지 쇄도했다.

이미 죽은 자에게 갑주 틈새로 찌릿찌릿하게 느껴지는 감전의 고통 따위는 무의미하니까.

애초에 시엔 역시 별 기대를 하고 마법을 쓴 게 아니었다. 그저 상대의 움직임을 유도하고 떠보려는 속셈이었을 뿐.

카앙!

순백의 오러를 덧씌운 미스릴 검이 휘둘러졌다.

‘쌍두독수리의 자세가 아니다.’

그러나 검을 휘두르는 방식이 사뭇 달랐다. 망자가 되어 이질적으로 바뀌었다기보다 처음부터 전혀 별개의 검식을 구사하고 있던 것처럼.

놀랄 것은 없다. 쌍두독수리의 자세는 물론 강력하고 검증된 자세이며, 제국의 엘리트 기사밖에 배울 수 없는 강력한 자세다.

그럼에도 결국 불특정 다수를 가르치는 「보급형 검식」이란 태생의 제약마저 넘을 수는 없다.

그런데 눈앞의 데스나이트가 펼치는 검식은 달랐다.

나이트워커 가문이나 그란델 대공 가문처럼, 내지는 가문이 아니라 검술 길드 등에서 처음부터 특정 소수를 위해 가르치는 「고유 검식」.

‘자세를 파악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적다.’

검의 자세는 강한 자세일수록 강하다고 하는 일방적 먹이사슬의 형태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리는 상성에 가깝다.

부드러움이 묵직함을 잡아먹고, 그 부드러움을 빠름이 잡아먹는다.

끝으로 빠름을 잡아먹는 것은 정작 부드러움에 잡아먹히는 처음의 ‘묵직함’이다.

게다가 이 세상에 검의 속성이 부드러움, 묵직함, 빠름, 세 개밖에 없을 리가 없다.

쾌(快), 환(幻), 강(强), 폭(爆), 중(重), 흡(吸), 와(渦), 충(衝) 등, 검과 자세의 밑바탕이 되는 속성의 개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렇기에 상대의 자세가 갖는 속성을 재빨리 파악하고 그에 맞춰 대응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 시엔이 오크 전사 비요른에 맞서 펼친 가문의 제2식 「양치기 소년의 자세」처럼.

‘얼굴 없는 자세 하나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그렇다고 견진성사를 치르는 도중 운명의 창 같은 신기의 힘을 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체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얼굴 없는 자세를 펼쳤으나,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적어도 눈앞의 강적 앞에서는.

재차 거리를 벌린 시엔이 자세를 다잡았다.

“망령의 자세.”

시엔이 극의에 이르고자 하는, 이미 이르렀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검식을 읊조린다.

인간의 굴레마저 초월한 이능(異能)의 영역, 나이트워커 가문의 아홉 가지 검식.

이 세상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벼락으로 이루어져 있단다.

그 아홉 검식의 정점에 서는 제1식의 검결을 되새기며─ 깊이 숨을 내뱉었다.

새하얀 입김 같은 것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호흡도, 숨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몽환포영로전(夢幻泡影露電)》.

움찔.

직전까지 시엔에 맞서 검을 휘두르던 데스나이트의 검에 비로소 동요가 깃들었다.

그러나 동요는 길지 않았다. 애초에 시엔의 상대는 살아 있는 인간조차 아니었으니까.

재차 순백의 미스릴로 전신을 휘감고 있는 죽음의 기사가 쇄도했다.

그리고 그보다 빠르게 벼락이 내리꽂혔다.

라이트닝 볼트가 아니라, 마치 벼락처럼 빠른 속도로 땅을 박찬 시엔이 왕 시해자를 휘두른 것이다.

촤아악!

시엔의 공격이 휘둘러졌을 때, 죽음의 기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뒤늦게 시엔의 일격을 깨닫고 데스나이트가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직전까지 거기 있던 시엔의 그림자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우뚝.

데스나이트의 검이 멈춘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움직임이 정지했다.

자세를 다잡기 위해서도 아니고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치명상을 입은 것도 아니다.

그저 멈추었을 뿐이다.

거기에 더 이상 상처 입혀야 할 생명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저 검고 어두운 그림자가 있을 뿐이었다.

오직 인간밖에 쓸 수 없는, 자신의 살과 피와 뼈를 초월하려는 인간찬가의 의지.

이것이 바로 그 의지의 종착점이었다.

살과 피와 뼈마저 뛰어넘어─ 역설적으로 인간의 굴레마저 뛰어넘게 되는 인간의 의지.

시엔에게 더 이상 인간의 형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칠흑의 오러로 전신을 덧씌운 ‘망령’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시엔을 바로 앞에 두고도 죽음의 기사는 미동조차 없다. 더 이상 그가 생전에 무슨 자세를 구사했는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설령 코앞에서 검이 겨누어져도 다를 것은 없었다.

촤악!

그 상태로 망령의 검이 휘둘러졌다.

마지막까지 아무런 저항도 일어나지 않았다.

* * *

그 시각, 밤하늘 산맥의 꼭대기에 있는 달의 사원.

칠흑의 로브 위로 각양각색의 마스크를 쓴 일련의 무리가 그곳에 있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형제자매들이다.

그것도 하나하나가 최소 마스터 내지 하이마스터 이상으로 이루어져, 능히 견진성사의 의식을 집전할 자격을 갖춘 강자들.

성사는 이미 시작되었다.

시엔이 백야의 협곡에 이르러 정상을 향해 다가올 즈음부터, 산맥 일대를 감시할 수 있는 원경(遠鏡)이 시엔의 일거수일투족을 비추고 있었으니까.

일찍이 시조 카산의 재림이라 불릴 정도로 유례 없는 재능을 가진 밤의 아이.

바로 그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가 대모가 되어 가문의 후계자로 점찍은 대자(代子).

그 아이가 보여주는 재능은, 이미 재능이라 부를 수 있는 형태의 그것조차 아니었다.

“놀랍네요. 벌써 《망령의 형상》에 통달하다니─”

“설마 데스나이트 앞에서까지 자기 존재를 감출 줄이야.”

“역시 가주님의 대자답군요.”

“그리고 우리 모두의 형제이기도 하지요.”

화려한 공작새 마스크를 쓴 가문의 자매가 놀란 듯 입을 열었고, 형제자매들이 잇달아 말을 잇는다.

“앗! 저것 봐!”

바로 그때, 익살스러운 광대 마스크 차림의 소녀가 재잘재잘 소리를 높였다.

“아직도 내가 준 왕 시해자를 쓰고 있어!”

“바보 멍청이 그레텔, 네가 준 게 아니라 내가 준 거지! 처음부터 내 거였다고!”

“그래 놓고 평생 자기가 쓸 거라고 고집부린 주제에! 이 욕심쟁이야!”

“두, 둘 다 싸우지 마…….”

어린 남매의 말다툼에 새 부리 마스크를 쓴 가문의 자매가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곧 시, 시엔이 올 거야……. 바, 바로 앞이니까…….”

“그 말대로란다, 앨리스.”

“으, 응…… 가주님.”

이윽고 가문의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친애하는 나의 형제자매들이여.”

각양각색의 의장용 마스크를 쓴 그들 속에서, 홀로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말을 잇는다.

“때가 되었으니, 집전(執典)의 준비를 시작하지요.”

달의 사원.

밤하늘 산맥의 꼭대기에 세워진,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전통이 깃든 장소.

나이트워커 가문의 육체를 갖고도 두 발로 목숨을 걸고 며칠에 걸쳐 올라야 할 바로 그곳에, 비로소 기다렸던 마지막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끼이익.

세월의 풍파와 냉기 속에서 얼어붙은 대리석 문을 열자, 산 정상에 지어졌다고 믿을 수 없는 사원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이 고요하다.

회랑처럼 사방을 감싸고 있는 대리석 기둥과 벽에는, 대대로 이어진 나이트워커 가문의 역사가 부조(浮彫)되어 있었다.

새로운 밤을 걷는 자가 태어날 때마다, 죽을 때마다, 마스터가 되는 견진성사를 치를 때마다, 하이마스터가 되는 성품성사를 치를 때마다, 새로운 가주가 계승될 때마다, 가문의 대소사(大小事)들이 순백의 대리석 위로 끝없이 그 역사를 새겨가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묵묵히 끌과 조각칼을 들고 대리석 위에 부조를 새기는 그림자가 있었다.

“왔느냐, 시엔.”

“루나 님.”

가장 지혜로운 자, 콘실리에리 루나 나이트워커.

“딱 작업을 끝마칠 즈음 도착했구나.”

가족이 태어날 때 천장에 별을 새기고, 가족이 죽을 때는 새겨놓은 별을 메꾸고 떨어뜨린다.

천장에는 고작 수십 개 남짓의 별이 떠올라 있었다.

고개를 내린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별이 떨어져, 시엔의 발밑에 깔려 있었다.

그곳은 별들의 무덤이었다.

별이 떨어질 때마다 천장에 새겨져 있던 별을 화산재와 석고로 채워서 메꾸고, 밑바닥에 새로운 별의 형태를 새겨넣는 것이다.

가문의 역사 속에서 스러지고 추락한 별들의 유해.

얼마 전까지 천장에 새겨져 있었을 ‘아벨의 별’도 예외가 아니었다.

“죽음을 조각하는 게 썩 좋은 일은 아니지.”

루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잇는다.

“다음에 조각을 새겨넣을 때는, 좀 더 경사스러운 소식을 새겨넣고 싶구나.”

“그렇게 될 거예요.”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다. 그렇기에 가족에게 일어나는 중대사는 무엇 하나라도 빼놓지 않고 이곳에 기록된다.

밤하늘이 별의 일을 기록하듯, 밤하늘 산맥 역시 나이트워커 가문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다.

가장 어린 나이에 세례를 마친 시엔이, 가장 어린 나이에 마스터가 되는 일 역시 기록될 것이다.

설령 시엔이 성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죽어도 마찬가지다. 그때는 떨어진 별로 기록되겠지.

“저는 그저 가문의 동의나 얻자고 이 자리까지 온 게 아니니까요.”

“호오, 그럼 무엇을 위해 왔지?”

즐거운 듯 루나가 되물었다. 시엔이 대답했다.

“제가 진정한 1식의 마스터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요.”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마스터를 자청하는 것일까.

견진성사는 엄밀히 말해 검식의 마스터나 통달의 경지를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저 가문의 동의를 얻어내는 협상 테이블에 불과하다.

정말 검식의 궁극에 이르렀는지, 수학적으로 계량하고 계측할 방법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 깨우침을 가르쳐준 당사자가 시엔의 눈앞에 있었다. 시엔 역시 그 깨달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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