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마스터 시험 (5)
견진성사를 통과하고 검식의 마스터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엄격한 절차가 필요하다.
첫째, 가문의 마스터들 앞에서 힘으로 검식의 통달을 증명하는 자리.
철컥.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태엽처럼 정교히 얽혀 있는 세 개의 모래시계 중에서 가장 커다란 모래시계가 뒤집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작됐다.’
시엔의 입에서는 그 어떤 호흡이나 숨소리도, 입김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침묵하고 있던 그림자가 움직였다.
타앗!
바우타(La Bauta) 가면에 검은 망토를 둘러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엉망으로 헝클어진 저 핏빛 머리카락을 보고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이야, 못 본 사이에 아주 쑥쑥 자랐구나.”
예나 지금이나 밉상스러운 목소리. 그 남자는 비고의 대부, 미하일 나이트워커였다.
“설마 벌써 제1식의 마스터를 자처할 줄이야.”
“…….”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 역시 느긋하게 대화나 하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었다.
촤아악!
사방에서 시엔을 옥죄며 죽음의 거미줄이 휘몰아쳤다. 마치 거미가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집을 짓는 것처럼.
시엔이 제1식의 마스터를 증명하기 위해 오직 망령의 자세로 시험을 치르듯, 시엔을 상대하는 마스터들 역시 각자 통달해 있는 하나의 검식밖에 쓸 수 없다.
그중에서 미하일이 펼치는 자세는 제7식─.
덧붙여 7식은 가주 라일라가 그랜드마스터로서 구사하는 세 가지의 검식 중 하나이기도 했다.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Black Widow Stance)」.’
겉보기에 일찍이 형 비고가 펼쳤던 그물거미의 자세와 비슷하다. 애초에 그물거미의 자세 자체부터가 7식에서 파생된 검식이니까.
과부거미, 그 이름처럼 제7식의 구사자는 검을 쓰지 않는다. 대신에 특수한 재질의 섬유로 엮은 옷을 무기로 삼아 오러를 싣고 죽음의 실을 짠다.
게다가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는 그물거미의 자세처럼 후방 보조에 특화된 자세 따위가 아니다.
두 손으로 직접 먹잇감을 거미줄에 걸어 집어삼키기 위한 살상용 검식.
암살자의 검이었다.
그러나 시엔 역시 과거의 미숙했던 시엔이 아니다. 미하일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검식을 마스터하고 견진성사를 자처하는 어엿한 가문의 인간이니까.
아니, 그 이상이었다.
‘실의 교차점을 노린다.’
사방에서 죽음의 거미줄이 휘감기는 와중에도 시엔은 미동조차 없이 평정을 지켰다.
‘축이 되는 거미줄의 교차점 하나를 베는 것으로도 거미집은 무너진다.’
그저 제7식을 파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머릿속으로 헤아릴 따름이다.
말이야 쉽다. 그러나 수십, 수백, 수천 가닥의 실오라기들이 엉키고 뒤엉켜 거미집을 짜고 목을 옥죄어 오는 와중에도, 그 거미집의 구조를 파악하고 취약점을 찾아내서 돌파하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다. 하물며 그 상대가 해당 검식의 마스터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럼에도 시엔의 검이 휘둘러졌다.
그러자 촘촘하게 짜여 있어야 할 거미줄의 직조(織造)가 무너져 내렸다. 아주 정확하게.
시엔의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거미집을 무너뜨린 걸로 부족하다. 제7식의 구사자, 거미 본체를 노리지 않는 이상 거미집은 끝없이 되살아날 테니까.
카앙!
거리가 좁혀졌다.
그리고 일찍이 라일라가 그랬던 것처럼, 미하일의 망토가 시엔의 ‘왕 시해자’를 받아친다.
망토 자락이 춤을 출 때마다 쇳소리가 울려 퍼진다. 깨닫고 보니 어느새 무너졌던 거미집이 다시금 세워져 천라지망(天羅地網)처럼 시엔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있었다.
‘역시 쉽지 않네.’
상대 역시 아무 이유 없이 제7식의 마스터를 자처하는 게 아니다.
게다가 견진성사를 치르는 이상, 시엔은 끝날 때까지 제1식 이외의 기술이나 마법은 물론이고, 아티팩트 같은 장비의 힘조차 빌릴 수 없다.
“다음.”
바로 그때, 가주 라일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시엔을 압박하던 미하일의 움직임이 멎는다. 마찬가지로 거미줄의 교차점을 찾아내 다시금 베려던 시엔의 검도 멎었다.
물론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7식의 마스터, 미하일이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정적이 내려앉는다.
어둠과 정적 속에서 또 하나의 그림자가 쇄도했다.
얼핏 보기에 아무 특징도 없는 보통의 검술. 그것이 뜻하는 바를 모를 시엔이 아니다.
‘가시나무의 자세─.’
상대는 가문의 제5식, 가시나무의 자세를 구사하는 마스터였다.
그 이름처럼 사람의 몸에 있는 206개의 뼈, 그중 일부를 ‘칼날의 뼈’로 교체하고 사출하는 기술.
아무리 자세가 무너지고 무방비하게 틈을 드러내도 대응할 수 있는 최적의 방어 검식.
동시에 몸의 어디서 ‘뼈의 칼날’이 찢고 튀어나올 줄 모르는 공포야말로 이 자세가 갖는 최대의 강점이었다.
촤악!
그 증거로 평범하게 검을 받아치기 무섭게, 상대가 시엔을 향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저 손가락 하나를 까딱였을 뿐이다.
그런데 까닥거린 손끝을 찢고 칼날의 뼈가 쏘아졌다.
말 그대로 손가락뼈가 석궁처럼 쏘아졌고, 시엔이 황급히 자세를 틀기 무섭게 재차 ‘보통의 검술’로 압박이 이어졌다.
검을 맞부딪치며 거리를 좁히는 시점에서, 신체의 어디서 또 하나의 칼날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심지어 방금처럼 거리를 벌려도 탄환의 형태로 사출하는 것조차 가능하다.
가시나무 자세의 초식 중 하나, 「지탄(指彈)」.
‘어디서 칼날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그 압박감 속에서 펼치는 보통의 검술은 더 이상 보통의 검술이 아니었다.
“다음.”
그렇게 몇 합을 주고받고 나서, 재차 라일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엔과 제5식의 마스터가 움직임을 멈춘다. 5식의 마스터가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모래시계는 이제 막 끄트머리의 일부가 떨어졌을 뿐이다.
가문의 마스터 앞에서 힘으로 검식의 통달을 증명하는 자리.
정적 속에서 또 하나의 그림자가 쇄도했다.
카앙!
아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력이 실린 검.
거기에는 기교도 없고 함정도 없다.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공방을 주고받는 개념조차 아니다. 이쪽이 힘에 압도되어 일방적으로, 그저 밑바닥을 알 수 없는 나락을 향해 빠져드는 듯한 감각.
제6식, 나락의 자세(Naraka Stance).
그 이름처럼 공격을 받아칠 때마다 딛고 있는 발밑이 무너지는 듯한 압박감이 엄습했다.
‘《나락베기》.’
덧붙여 이 자세는 훗날의 시엔이 ‘그랜드마스터’로 통달했던 세 개의 검식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이 자세의 파훼법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바로 첫 일격을 받아치지 않는 것이다.
상대해주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상대를 힘으로 찍어 눌러 수렁에 빠트리는, 나락의 자세를 파훼하는 가장 확실한 대처법이다.
그런데 이미 검이 부딪쳤다.
이론상 검이 부딪친 시점에서 나락의 자세를 펼치는 마스터에게 벗어날 길은 없다. 사실상 시엔의 패배다.
그럼에도 시엔은 동요하지 않았다.
눈앞의 상대는 결코 ‘진정한 의미의 마스터’가 아니었던 까닭에.
그저 가문의 견진성사를 통과하고 협상 테이블에서 동의를 얻어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딱 정도였다.
“……!”
그렇기에 끝없이 공격을 몰아치며 상대를 나락으로 빠트려야 할 마스터의 검이, 일순 흔들렸다.
거기에 있던 시엔의 모습이 허깨비처럼 덧없이 느껴진 까닭에.
‘《수월(水月)》.’
물에 비친 달, 그 이름처럼 눈앞의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를 속이는 기술.
망령의 자세가 자랑하는 기만의 초식.
보여도 보이지 않고 들려도 들리지 않는, 그 어떤 강자에게도 쉽사리 공격을 허락하지 않는 최강의 방패.
물론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 중에서 망령의 자세를 모르는 자는 없다. 방금 시엔이 펼친 초식도 예외가 아니다.
눈속임은 찰나일 뿐, 오래가지 않는다. 설령 1식의 마스터가 되려는 시엔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걸로 족했다.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던 움직임이 해방됐다.
몸이 가볍다. 두 발이 자유롭다.
그리고 재차 덤벼들어 자신을 떨어뜨리려는 나락의 자세를, 굳이 앞에서 상대해줄 필요가 없었다.
“다음.”
재차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세를 다잡고 재차 공세를 가하려던 제6식의 마스터가 움직임을 멈추고 물러났다.
“하아, 하아…….”
그 틈에 시엔 역시 호흡을 다잡고 몸을 추슬렀다.
《다면기(多面棋)》.
하나의 대국자가 여러 명의 상대들과 동시에 대국을 두는 형식.
심지어 시엔의 상대는 결코 시엔보다 실력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아니, 당장 경지를 놓고 봤을 때는 오히려 시엔보다 위다.
그 마스터들과 끝없이 상대를 거듭하며 힘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
6식의 마스터가 물러나고, 어느새 새로운 마스터가 시엔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휴식 끝에 시엔 역시 자세를 다잡았다.
이제 시작이었다.
* * *
서녘 하늘 끄트머리로 스러진 어스름이, 어느덧 동녘 하늘의 여명이 되어 솟아오를 즈음.
카앙!
여전히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흐트러진 호흡, 피투성이가 된 육체, 처음에 비교해 몰라볼 정도로 처참해진 시엔이 그곳에 있었다.
시엔의 상대는 처음 맞섰던 제7식의 마스터, 미하일이었다.
그런데 시엔을 압박하는 미하일의 모습에는 시종 여유가 넘친다. 처음처럼 쉽게 거미집의 약점을 드러내지도 않고 공격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럴 수밖에.’
시엔을 상대하는 마스터들은 차례대로 체력을 온존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심지어 쉬는 와중에도 차분히 자신의 전투를 복기하거나, 시엔을 관찰하며 특유의 움직임과 버릇을 기억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시험의 당사자, 시엔은 그렇지 않다.
휴식도 허락되지 않고 끝없이 자신의 전투를 노출하며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정보를 준다.
견진성사는 그저 가문의 동의를 얻는 협상 테이블에 불과하다. 정말 해당 검식의 궁극에 이르렀는지, 수학적으로 계량하고 계측할 방법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것이 바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동의’를 얻는 방법이었다.
‘실의 교차점을 노린다.’
두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래도 무너질 수 없었다. 달라질 것도 없었다.
촤악!
설령 상대가 아무리 유리하고 자신이 아무리 불리해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증명하지 않는 이상 가문의 동의를 구할 수 없으니까.
물 샐 틈 없이 시엔을 포위하고 있던 미하일의 거미집이 무너져 내렸다.
“!”
상상 이상으로 너무나도 허무하게.
‘……일부러 봐줬나.’
그 의미를 헤아린 시엔이 쓴웃음을 짓는다.
“거기까지.”
라일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미하일, 성사의 규칙을 망각했구나.”
“설마 그럴 리가요.”
“너의 거미집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리 없잖니.”
라일라의 말에 미하일이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흠, 저는 싸운다고 해서 열심히 싸웠는데 말이죠.”
“정말이니?”
“싸우고 오니 우리 집이 무너져 있더라고요.”
“…….”
미하일이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밉상스러운 어조로.
째깍.
태산 같았던 모래시계의 마지막 알갱이가 떨어진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처음 방에 장치된 것은 세 개의 모래시계.
그런데 시엔이 비운 것은 이제 고작 하나의 모래시계였다.
“하이마스터의 집전(執典)을 준비하세요.”
상처투성이가 된 시엔을 뒤로하고 라일라가 말했다.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로.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손끝을 애써 감추며.
* * *
하이마스터들의 시험은 조금 다르다.
앞서 시엔을 상대했던 마스터들이 각자가 통달해 있는 검식밖에 쓸 수 없던 것과 달리, 하이마스터는 정작 ‘가문의 검식’은 물론 거기서 파생된 검식조차 쓸 수 없다.
그들이 펼치는 것은 가문의 검술이 아니었다.
제국 기사들이 쓰는 쌍두독수리의 자세, 샤를마뉴 왕국 기사들이 애용하는 백합 문장(Fleur-de-lis)의 자세, 칠왕국 군도의 붉은 장미의 자세 등등…….
적들의 검이었다.
이 세상에 넘쳐나는 가문의 적들에 맞서, 얼마나 잘 대처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전신이 고통스럽다. 시야가 피로 물들어서 눈앞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육체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심지어 상대는 가문의 최고 전력, 하이마스터.
아무리 가문의 검식도 쓰지 않고 적당히 힘을 조절해도, 절제된 움직임부터 마스터의 그것과는 격이 달랐다.
쉬울 리가 없다.
동시에 그들의 검술을 맞받아칠 때마다, 시엔의 가슴에서 흔들림 없는 확신이 피어올랐다.
‘역시 우리 가문의 검술이 제일 강하다.’
이 세상의 그 어느 자세도 결코 나이트워커 가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확신.
‘이 정도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아니, 무너질 수 없었다.
적들의 검과 그 누구보다 많이 맞서 싸웠다고 자부하는 시엔이다. 심지어 눈앞의 하이마스터 전부를 합친 것보다도 더.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손에 들린 검을 놓지 않는다.
왕 시해자, 그 이름처럼 훗날 왕의 심장을 향해 내리꽂힐 칠흑의 서슬을.
째깍.
어느덧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알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세 개의 모래시계 중, 어느덧 두 개째의 모래시계가 뒤집혔다.
끝으로 남아 있는 것은 마지막 모래시계.
처음의 모래시계에 비해 10분의 1 크기조차 아니다.
100분의 1.
시야를 가로막는 피를 닦아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칠 대로 지쳐 피투성이가 된 몸을 채찍질하며 다시금 자세를 다잡았다. 최후의 모래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라일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영야(永夜)》─.”
끝나지 않는 밤, 망령의 자세를 마스터하고 극의를 깨우친 이들밖에 쓸 수 없다는 오의 중 하나.
영원의 밤이 시엔의 세계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