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마스터 시험 (6)
“《영야》.”
끝나지 않는 영원의 밤.
─세상에서 빛과 소리가 사라졌다. 바로 앞에 있다고 생각했던 라일라의 모습도 기척도 사라졌다.
심지어 시엔을 지켜보고 있어야 할 형제자매들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끝없는 밤의 어둠이 시엔의 세계를 집어삼킬 뿐.
깨닫고 보니 시엔의 가슴팍이 찢어져 있었다. 어느 틈에?
상처를 입었다는 감각도, 심지어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깨닫고 보니 또 하나의 핏줄이 시엔의 몸을 따라 내달리고 있었다.
없는 게 꼭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일찍이 시프 마스터의 가르침을 떠올려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것은 더 이상 알기 쉬운 소꿉놀이가 아니니까.
시엔이 각오를 다지며 제1식의 기술을 펼쳤다.
‘《수월(水月)》.’
촤악!
물에 비친 달, 그 말이 무색하게 휘둘러진 라일라의 칼날이 어느덧 시엔의 달을 베고 있었다.
‘《경화(鏡花)》.’
그렇기에 시엔이 재차 거리를 벌리며 제1식의 다음 초식을 펼쳤다.
거울에 비친 꽃.
달라질 것은 없었다. 또다시 거울이 깨지고 꽃이 피를 흘렸다.
아무리 호수와 거울 속으로 숨어도, 그때마다 암살자들의 어머니는 기어코 거기 숨어 있는 달과 꽃을 찾아서 베고 떨어뜨린다.
상처가 깊다.
이내 깨달았다.
최초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아직도 바닥을 향해 천천히 낙하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집혀서 떨어지기 시작한 모래시계의 첫 모래알 역시, 아직 바닥에 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억겁처럼 멈춰 있는 찰나. 정지해버린 세상.
이 속에서 모래시계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 세상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벼락으로 이루어져 있단다.
꿈이 깨고 환상이 깨지고 물거품이 없어지고 그림자가 사라지듯, 세상에 절대적이고 고정된 것은 없다.
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는 시간이 빨리 흐르고, 누구에게는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시간의 절대성이란 결국 허상에 불과하니까.
‘망령된 세계’.
일찍이 시조 카산이 태어났던 동방 대륙의 문자로 일컫기를 《몽환포영로전》.
영야는 바로 그 깨달음을 실체화하는 망령의 자세 최강의 오의였다.
기술이나 형식의 굴레조차 초월하는, 그야말로 이능에 가까운 경이.
끝나지 않는 밤.
‘……너무 일렀나?’
문득 생각했다.
아무리 시엔이라 해도 열다섯 살, 고작 16살을 앞둔 나이의 육체로 천하의 라일라에 맞서 제1식의 마스터를 증명하는 것은 너무 일렀나.
이미 시엔의 머릿속에는 확실하게 제1식의 전부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처럼 끌어낼 수는 없다. 미숙한 육체가 그것을 따라주지 않으니까.
좀 더 천천히, 좀 더 뒤로 미뤄도 되지 않았을까?
좀 더 충분히 준비가 될 때까지.
내일, 모레, 좀 더 나중에. 어쨌든 지금 말고.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는 것으로 성사를 멈출 수 있다. 라일라는 필시 이해해줄 테니까.
그러다 무심코, 라일라가 오러와 마력에 대해 가르쳐줄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알고 있는데 그저 이 육체가 따라주지 못해서 할 수 없다고 넘겨짚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머리로는 완벽하게 알고 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멋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정의했던 그 시절.
아니었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따라주지 못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다. 육체는 처음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멈춰 있는 세상 속에서 라일라의 검이 휘둘러졌다.
시엔의 몸에서 흘러내린 핏방울도, 모래시계에서 떨어지는 모래알도, 일체의 것들이 끝없는 밤의 어둠 속에 멈춘 그 세계에서.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결정 짓는다.’
그렇기에 시엔이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나직이 읊조렸다.
망령의 자세가 자랑하는 오의, 영야는 세상의 모든 것을 끝나지 않는 밤으로 빠트린다.
─그렇기에 끝나지 않는 밤, 영야를 깨트릴 수 있는 유일의 기술을 되새겼다.
“《백야(白夜)》.”
새하얀 밤, 그 이름대로였다.
냉기가 휘몰아쳤다.
휘몰아칠 리 없는 서릿발, 내릴 리 없는 눈, 보일 리가 없는 순백의 밤하늘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시엔 역시 그곳에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검고 어두운 망령이 아니라, 겨울의 설산에 어울릴 법한 새하얀 망령이 되어서.
칠흑처럼 검고 어두운 다크 미스릴의 칼날이, 희고 시린 서슬을 머금고 있다.
“어떻게 나의 영원한 밤을 깨트렸니?”
라일라가 물었다.
“꿈이 깨고, 환상이 깨지고, 물거품이 없어지고, 그림자가 사라지고, 이슬이 떨어지고, 벼락이 소멸하는 것처럼─.”
시엔이 대답했다.
“어머니의 밤 역시 영원하지 않으니까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조차 언젠가는 끝나는 법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 따위는 없으니까.
설령 그것이 밤을 걷는 자들의 정점,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펼치는 꿈과 환상, 물거품이라 해도─.
“멋진 대답이구나.”
휘몰아칠 리 없는 서릿발이 그녀의 옷자락을 나부꼈고, 내릴 리 없는 눈이 소복하게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동시에 순백의 밤하늘이 스러졌다. 서릿발이 그쳤다. 내리고 있던 눈이 없어졌다.
꿈이 깨고, 환상이 깨지고, 물거품이 없어지고,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처럼.
라일라의 망령된 세계가 스러졌고, 마찬가지로 시엔의 망령된 세계가 스러졌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1식의 마스터들이 그곳에 있었다.
어느덧 그곳은 가문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성사를 치르고 있던 방이었다.
툭.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알이 떨어졌다.
* * *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라일라의 손에 들린 금빛 잔을, 수정색 머리카락의 어린 소녀가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나이트워커 공작 가문의 저택에 지어진 비밀스러운 지하 예배당. 가문의 시조, 산상노인 카산 나이트워커와 그가 거느렸던 고대 암살자 교단의 잔재.
“─이것은 나의 피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정적 속에서 의례가 끝을 맺었고, 수정색 머리카락의 소녀, 밤의 아이 ‘티아’가 머뭇머뭇 금잔을 입에 옮겼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마스터 시엔을 비롯한 각양각색의 밤을 걷는 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다. 그러나 앞서 죽은 아이들은 시엔의 가족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 아이들의 죽음은 시엔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다.
눈앞의 소녀는 아니었다.
직전에 세 명의 아이들이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죽어 나갈 때조차 꼼짝하지 않던 주제에, 시엔이 비로소 입술을 깨물었다.
티아 나이트워커, 그녀는 시엔의 가족이자 그들의 전부가 될 운명을 가진 아이였으니까.
콰직!
육체가 뒤틀린다.
육체를 세포 단위에서 재구축하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고통, 세례성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운명이 바뀌지 않기를’ 기도하며 시엔이 눈을 감았다.
귀를 찢을 것처럼 울려 퍼지는 소녀의 비명을 뒤로하고.
* * *
“견진 후보자, 오스카 그란델과 그의 대모(代母)께서는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신성 제국의 추기경이 엄숙하게 목소리를 높이자, 오스카 그란델과 그의 대모를 자처하는 《죽음의 성모》가 나란히 몸을 일으켰다.
“친애하는 나의 대자, 세례명 이스카리옷.”
추기경이 의식에 따라 오스카의 이마에 축복받은 기름을 붓는다.
“성령의 은사로 견진성사를 받은 주님의 종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가 신앙을 확고히 함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성사.
“견진 받은 이들의 부모와 대부모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멀찍이서 친아들의 성사를 지켜보는 아버지, 검마 오스왈드 그란델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까닭에.
* * *
1년하고 몇 개월 뒤.
나이트워커 공작 저택의 집무실.
“대부님.”
유리창 너머로 찬란한 역광을 등진 실루엣이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은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가 아니었다.
“티아.”
가장 어린 밤을 걷는 자, 티아의 대부이자 동시에 그들 가문의 가장 어린 마스터, 시엔이었다.
“어머니께서 영지로 돌아올 예정이야.”
“아, 공작 각하께서…….”
“가주님이 오고 나서는, 나도 꽤 오래 영지를 비우게 되겠지.”
아무리 마스터가 됐다고 해도 아직 배울 게 많은 시엔이다.
그것은 눈앞의 어린 소녀, 티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때까지 네게 가르쳐줄 게 있거든.”
“네, 시엔 대부님.”
대녀(代女) 티아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 것 없어.”
“그래도…….”
과거의 라일라가 어린 시엔에게 으레 그랬던 것처럼.
“저기,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요?”
티아가 되물었다. 시엔이 별생각 없이 대답하려다 말고, 무심코 지금 자기 나이를 깨달았다.
‘맞다, 나 아직 17살이지.’
심지어 티아의 나이는 올해 15살, 겨우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할 수는 없으니…….’
아무리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풍이 이질적이라고 해도 결국 이 세계의 사람이다.
“……그냥 그대로 부르자.”
“네, 대부님.”
멋쩍은 듯한 시엔의 말에 티아가 대답했다. 시엔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미소를 머금고.
* * *
훗날 시엔이 세 검식을 마스터하고 그랜드마스터가 되듯, 티아는 두 가지 검식을 통달하고 가문의 하이마스터가 된다.
그녀가 마스터하게 될 가문의 검식은 각각 3식과 5식.
제5식 가시나무의 자세는 훗날의 시엔도 마스터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제3식은 그렇지 않았다.
「명경지수의 자세(Equilibrium Stance)」.
망령의 자세, 명경지수의 자세, 나락의 자세.
훗날의 시엔에게 그랜드마스터의 칭호를 가져다줄 가문의 세 가지 검식.
묵시록의 기마상이 세워진 분수대 광장, 쏟아지는 햇살을 뒤로하고 티아가 땅을 박찼다.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보통의 쇳소리가 아니다.
그저 힘과 힘으로 맞부딪치는 소음이 아니라, 훨씬 더 깊고 청아한 울림이 깃들어 있었다.
“사람은 흘러가는 물에는 비춰 볼 수가 없고, 고요한 물에 비춰 보아야 한다.”
시엔이 말했다.
“너 자신을 깨끗한 거울과 멈춰 있는 물이라 생각하고, 네 앞의 상대를 비춰 보는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걸로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왜, 못 믿겠어? 시험해 볼까?”
시엔이 짓궂게 되물었다.
“……어떻게요?”
“공격해봐.”
“대부님은 딱히 제 마음을 읽지 않아도 공격 정도는 받아칠 수 있잖아요.”
티아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왜 받아칠 거라고 생각해?”
“……그럼 갈게요.”
말하자마자 티아가 땅을 박찼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춤을 추었다. 일부러 자기 생각을 읽지 못하게 하려는 듯, 쓸데없이 과장되고 복잡하며 기교가 실린 검이었다.
“아…….”
그러나 검무 끝에 티아의 손끝이 당황하며 떨린다.
마치 거울을 마주하는 것처럼, 자신의 동작을 그대로 모방하며 대칭을 이루는 시엔이 그곳에 있었기에.
“《심경(心鏡)》.”
놀란 듯 눈동자를 끔벅거리는 티아에게 시엔이 말했다.
“마음의 거울이란 뜻이야.”
명경지수의 자세는 이질적이다.
“명경지수의 자세를 통달한 마스터는 이 ‘마음의 거울’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지.”
아니, 애초에 나이트워커 가문의 자세 중 이질적이지 않은 자세는 없다.
그런데 명경지수의 자세가 갖는 이질감의 맥락은 조금 달랐다.
이 자세는 이질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이질적이었다.
거기에는 나이트워커 가문이 자랑하는 어떤 기이함도 이능도 없다.
깨끗한 거울과 정지한 물.
그 이름처럼 이 자세는 오히려 너무나도 고지식할 정도로 ‘검의 정통’을 추구하는 자세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