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기사도의 나라 (1)
─나이트워커 가문의 지하 투기장.
일찍이 세례를 마친 시엔이 홀로 그곳에 내던져졌듯, 티아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그곳에는 일전에 시엔이 맞섰던 것과 같은 목 없는 기사가 있었다.
녹슬고 해진 흉갑 위에는 희미하게나마 백합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샤를마뉴 왕국을 상징하는 플뢰르 드 리스(Fleur de Lis)─. 눈앞의 망자가 왕국 출신의 기사임을 알 수 있는 증거였다.
땅을 박차며 목 없는 기사가 쇄도했다. 그리고 그의 칼끝에서 꽃처럼 우아하고 화려한 검술이 펼쳐졌다.
샤를마뉴 왕국 기사단이 자랑하는 「백합 문장의 자세」.
그 자세에 맞서 티아의 칼끝도 춤을 췄다.
백합처럼 우아하고 화려하게, 심지어 목이 잘린 눈앞의 기사보다 훨씬 더 고결하고 기품 있는 움직임이었다.
‘훌륭하다.’
거울처럼 서로가 대칭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순간, 대칭이 무너졌다. 티아의 검이 어느새 목 없는 기사의 갑주를 베고 쓰러뜨리고 있었다.
쿠웅!
어느새 티아의 칼끝이 쓰러진 망자의 흉갑 위로 내리꽂혔다.
‘벌써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3식을 펼치다니.’
그 모습을 보며 시엔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훗날의 하이마스터였던 티아는, 어쩌면 그 이상의 경지를 노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재능을 꽃피지 못하고 스러진 것은 사실상 시엔의 책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살아남아요, 오라버니.’
가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가족을 지키지 못했던 까닭에.
아니, 지키기는커녕 그들이 흘린 핏속에서 비참하게 살아남는 것도 급급했던 까닭에.
이제는 아니었다.
각오를 다진 시엔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검이구나.”
기척조차 없이 시엔의 곁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던 사람처럼. 시엔 역시 당황하지 않고 담담히 예를 표했다.
“……빨리 돌아오셨네요, 어머니.”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정도까지 명경지수의 자세를 구사할 줄이야.”
“배움이 빠른 아이니까요.”
“네 옛날 모습처럼 말이지.”
그 말에 멋쩍어진 시엔이 쓴웃음을 짓는다.
“─샤를마뉴 왕국에서 왕실 주최의 검술 대회가 열릴 예정이란다.”
그런 시엔을 향해 라일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때마침 좋은 기회가 되겠다 싶어서 말이야.”
“……그 말씀은?”
“대회 자체는 별 볼 일 없는 ‘광대 기사’들의 여흥이지. 그런데 그와 별개로, 샤를마뉴 왕실이 전쟁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에게 빌린 채무의 상환이 지지부진해지고 있던 참이라서.”
“그 자리를 빌려 경고하란 거군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별과 단검의 이름을 드러내고 왕실의 챔피언을 죽이렴.”
라일라가 차갑게 미소 짓는다.
“그걸로 그쪽 왕실의 인간들에게도 충분한 메시지가 되겠지.”
그것은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다.
이 이상 나이트워커 가문과의 약속을 지지부진하게 미루거나 깨트리려 들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가문의 마스터가 된 시엔이 맡아야 할 임무는 더 이상 이전과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가 없는 사이, 티아를 잘 부탁드립니다.”
“두말할 것도 없는 부탁이구나.”
시엔의 대모, 라일라가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전부잖니.”
* * *
샤를마뉴 왕국, 일명 「기사도의 나라」.
칠왕국 연방이 자랑하는 원탁의 기사단, 신성 제국의 철십자 기사단과 더불어 ‘샤를마뉴의 12기사’라 불리는 대륙 최강의 기사 조직을 거느린 강대국.
물론 시엔이 죽여야 할 대상은 그 정도 레벨의 강자가 아니었다.
시엔의 암살 대상은 그저 일개 광대에 불과하니까.
왕실의 챔피언이란 말은 그럴싸해도, 결국에는 라일라의 말처럼 무대 위에서 여흥을 채워주는 속칭 ‘광대 기사’다. 조국의 명운을 걸고 실전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진짜 기사와는 결이 다르다.
기사도의 나라답게, 샤를마뉴 왕국에서는 이런 식의 기사도 로망을 채워주는 광대와 여흥이 넘친다.
그리고 시엔의 역할은 바로 그 광대의 목을 잘라 경고하는 것이다.
애초에 샤를먀뉴 왕국 정도 되는 강대국이 정말로 갚을 돈이 없어서 채무의 상환을 미룰 리가 없다. 아마 나이트워커 가문과 베네토 공화국을 상대로 유치한 기 싸움을 하려는 거겠지.
그렇기에 나이트워커 가문 역시 그들의 유치한 기 싸움에 어울려주는 것이다.
“곧 배가 항구도시 마르티나에 정박할 예정입니다.”
육로가 밤하늘 산맥과 신성 제국에 의해 가로막혀 있는 대신, 베네토 공화국에게는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가 있었다.
공화국의 배는 흑해와 지중해, 대서양을 가리지 않고 대해를 가로지른다.
지금 시엔이 타고 있는 무역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판 위로 나오자 시원한 바닷바람이 시엔의 얼굴을 훑고 내달린다. 바람에는 희미하게 소금 냄새가 섞여 있다. 멀리서 새 소리가 났다.
어느새 끝없이 펼쳐져 있던 망망대해의 끝자락에, 희미하게 육지의 끄트머리가 보이고 있다.
항구도시 마르티나, 샤를마뉴 왕국 북부의 무역 거점.
“육지에 도착하는 즉시 왕도 루테시아로 향할 겁니다.”
밤이 있는 곳에는 늘 그림자가 있다.
등 뒤에서 도열하고 있는 여섯 명의 그림자 기사들을 향해 시엔이 말했다.
모두 보통의 그림자 기사들이 아니었다.
마스터가 된 가문의 암살자를 보좌하는 직속 기사이자, 일명 「하이 섀도우(High Shadow)」라 불리는 고위 그림자 기사.
“곧바로 말을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마스터 시엔.”
기사도의 나라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긍지도 명예도 알지 못하는 사냥개들이었다.
* * *
왕도 루테시아.
기사도의 나라, 샤를마뉴 왕국의 심장이자 대륙에서 가장 비옥하고 풍요로운 도시.
따사로운 햇살 아래 봄날처럼 부드러운 정취가 넘쳐흐르는 그곳은, 시엔의 가문과 조국이 새삼 얼마나 척박한 대지 위에 놓여 있는지를 실감케 했다.
‘햇살 참 좋네.’
그 자리에 느긋이 서서 불어오는 봄볕을 쬐고 있자니,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낯익은 기척 하나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시엔.”
등 뒤에서 기품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를 리 없는 목소리였다.
“오랜만이네요, 이자벨 누님.”
보란 듯 주위의 눈길을 사로잡는, 핏빛의 드레스를 길게 늘어뜨린 적발의 여성이 있었다.
어린 시절, 시엔의 정체를 의심하던 미하일에 맞서 으르렁거렸던 이자벨 나이트워커.
“벌써 견진성사를 치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짜 놀랐지 뭐니!”
주위에 보는 눈이 없지는 않다. 없기는커녕 그녀의 화려함에 압도되어 이목이 쏠릴 대로 쏠린 채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에게는 그중에 무엇이 ‘진짜 눈’이고 그렇지 않은지를 가려낼 능력이 있었다.
“그 자리에 참여하지 못한 게 정말 유감이네.”
“누님의 자세를 상대하지 않아서 다행이었죠.”
“어머나, 참으로 겸손하기도 하지.”
「블랙파이어」 이자벨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는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검(劍)을 다룬다. 그러나 「마녀」의 이명을 가진 하이마스터 그레텔처럼, 이자벨 역시 가문 내에서도 몇 없는 ‘마법을 주력으로 다루는’ 암살자 중 하나였다.
“앞서 가주님의 밤매를 받았단다. 사정은 대충 들었거든.”
“검술 대회의 일정은 어떻게 되죠?”
“마침 딱 좋게 왔어.”
이자벨이 미소 지으며 말을 잇는다.
“몇 주 전에 적당한 남작 가문 자제의 이름을 빌려서 대회 참가자로 등록시켜둔 참이란다.”
“고마워요, 이자벨 누님.”
“시합 당일까지는 여유가 좀 있으니, 내 살롱에서 마음 놓고 쉬고 있으렴.”
살롱(Salon), 샤를마뉴 왕국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사교장.
“누구랑 다르게, 우리 귀여운 막내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거든.”
* * *
새 임무가 내려질 때마다 가문의 암살자 모두가 대륙 전체를 싸돌아다닐 필요는 없다.
왕도 루테시아에 있는 이자벨의 저택.
“오오! 어서 오시오, 그랑 마드모아젤!”
이자벨이 시엔과 함께 돌아오자, 저택의 응접실에 모여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일어나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갑작스러운 일로 자리를 비우게 돼서 송구해요.”
“신경 쓸 것 없소. 토론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니.”
“아, 그것참 기대되네요.”
“무슨 토론이요?”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곁에 있던 이자벨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샤를마뉴의 12기사를 다룬 새 ‘기사문학’이 얼마 전에 막 발표됐거든.”
“서사가 실로 흥미롭고 담대하지!”
“아하.”
그 이야기를 듣고 시엔이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기사문학, 소위 영웅심을 가진 기사가 모험을 떠나 여정을 겪고 사랑과 의무, 끝으로 기사의 도(道)를 추구하는 허구의 이야기.
‘예나 지금이나 이 나라는 진짜 할 짓도 없네.’
기사도니 기사문학이니, 시엔에게 있어서는 솔직히 별나라의 이야기처럼 와닿지 않는 소리였다.
“하오나 여전히 샤를 폐하를 늙고 무능하게 그리는 기존의 작풍(作風)을 벗어나지 못한 점이 옥의 티라 할 수 있겠소.”
“그거야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문학은 곧 시대의 거울이니─”
“어허, 말조심하시게!”
“조심해야 할 게 뭐가 있습니까? 당장 얼마 전에, 채무를 상환받으러 왔던 공화국 사자를 문전박대하고 쫓아내서 나라가 발칵 뒤집히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모자라 또 흥청망청 왕실 주최의 검술을 시합을 열려 하시니─”
“그러다 자칫 ‘공화국의 사신(死神)’이 움직이기라도 했다가는 대체 어쩌려고 그러시는지.”
“어허! 경솔히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마시오.”
거기까지 이름이 나오자, 당당히 왕의 실정을 지적하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았던 귀족들 사이에서 일순 당황이 내려앉았다.
“서, 설령 그렇다고 쳐도 무엇이 걱정이겠소. 우리에게는 긍지 높은 샤를마뉴의 12기사들이 있지 않소!”
“제아무리 공화국의 사신이니 뭐니 해도, 결국 기사도를 알지 못하는 무뢰배니 말이오.”
그들로서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지금 그들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이 바로 기사도를 알지 못하는 무뢰배이자, 공화국의 사신이란 사실을.
* * *
“참 할 짓도 없는 사람들이네요.”
“실로 동감이란다.”
살롱이 문을 닫고 나서, 저택에 남겨진 시엔이 말했다. 이자벨 역시 달리 부정하지 않고 손에 들린 포도주를 홀짝였다.
“그래도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는 늘 도움이 되는 법이지.”
“그렇게 수다스러운 자들에게 제 모습을 보여줘도 되겠어요?”
“어머, 네가 그들에게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기는 했니?”
이자벨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되물었다.
“보여줘도 누님께서 제 모습을 숨겨주셨을 테죠.”
“망령의 자세를 마스터했다고 들었을 때는 내 귀를 의심했는데 말이야. 설마 이렇게까지 아름답고 우아하게 자기를 감출 줄이야.”
딱히 시엔의 얼굴에 가죽을 덧씌운 것도, 마스크를 쓴 것도 아니다. 심지어 투명 마법을 부린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때 이자벨의 곁에 있었던 ‘어린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려 해도, 그들로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녀의 곁에 누가 있었는지조차도 모를 테니까.
“아무래도 내 믿음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그렇지 않아요.”
“진실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니?”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저는 가족의 기대를 배신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시엔의 대답에 이자벨이 놀란 듯 눈을 끔벅거리더니, 이내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멋진 어른으로 자랐구나.”
* * *
그로부터 얼마 후, 왕도 루테시아를 떠들썩하게 하는 검술 대회의 날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