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기사도의 나라 (2)
그로부터 얼마 후, 왕도 루테시아를 떠들썩하게 하는 검술 대회의 날이 밝았다.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야 비로소 왕실의 챔피언에게 도전할 자격을 얻는다. 따라서 당장 시엔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대회의 우승을 거머쥐는 것이다.
자신이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란 사실을 감춘 채로.
─어느덧 시엔의 첫 상대가 그곳에 있었다.
“나, 랑부예의 롤랑!”
롤랑. 샤를마뉴의 12기사 중 정점에 서 있는 기사의 이름.
그러나 눈앞의 기사는 그 당사자가 아니다. 그저 이 나라의 전통에 따라, 그와 같은 기사가 되기를 바란 마음에서 이름 지어준 그저 그런 귀족 가문의 자제니까.
“하느님을 경외하고 교회를 수호하며! 용맹과 신앙으로 주군을 섬기며, 약자를 존중하고 보호하며, 과부와 고아에게 친절하며, 함부로 모욕하지 않으며! 금으로 이루어진 보상을 경멸하며, 명예와 영광을 위해 살며, 평화를 위해 싸우고, 동료의 명예를 지키며! 불공정과 비열함을 멀리하고─”
‘아이고, 제발 일절까지 해라.’
광대 기사의 가장 우스꽝스러운 점은, 정작 자기가 광대란 점을 모른다는 데 있다.
진짜 조국의 이익을 위해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기사의 도처럼 쓸모없는 것도 없다. 적어도 신성 제국의 기사들은 그 점을 잘 알았다. 아니, 너무 잘 알아서 탈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순진한 기사는 달랐다.
귀족 가문의 자제로 풍족하게 태어나, 아들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걱정해 적당히 깔아준 부모의 도로 위를 달리는 주제에, 자기를 ‘진정한 기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광대.
“나, 역전(歷戰)의 기사 롤랑이 명예와 긍지를 걸고 호적수의 이름을 묻겠다!”
“정말 전쟁에 나가본 적은 있습니까?”
“어린 기사여, 이 몸은 그대가 헤아릴 수 없는 전장을 겪어왔도다.”
그 말에 시엔이 황당해서 코웃음을 쳤다.
헤아릴 수 없는 전장. 물론 전장에 참가한 경험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여차할 때는 사로잡혀 포로가 되어 대우받고, 몸값을 내서 풀려날 수 있는 전쟁놀이 따위. 그것을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저에게 댈 이름 같은 것은 없습니다.”
시엔이 대답했다.
대답과 함께 시엔이 땅을 박찼다.
칼날이 맞부딪친다. 심지어 상대는 오러조차 쓰지 못하는 기사였다.
그러나 굳이 압도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가는 거꾸로 의심을 살 테니까.
강철을 베는 오러도 없이, 갑주 속에서 상처 입거나 피 흘릴 염려 없이 치고받는 안전한 싸움.
오러 없이 싸우는 이상, 상대의 갑주 틈에 스틸레토 따위의 칼날을 꽂는 ‘대 갑주전투술’을 펼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정정당당한 기사들의 시합에서는 암기를 쓰는 것도, 심지어 상대를 죽이는 것조차 불명예스러운 행위로 여겨져 실격 처리다.
‘아니, 이게 싸움이냐. 소꿉놀이지.’
동시에 보통의 대중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놀이조차 충분히 흥미로운 자극이다.
콰직!
어느덧 시엔이 거리를 좁히며 소드 레슬링을 걸고, 상대의 팔다리를 있는 힘껏 꺾고 있었다.
갑주의 가동 범위가 곧 팔다리의 가동 범위를 뜻하지는 않으니까.
“아아아아악! 항복! 항복! 항복하겠습니다!”
아직 뼈도 부러지지 않았는데, 참으로 호들갑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첫날의 대진이 끝나고 나서도 시엔의 승리는 크게 주목받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 대신 시합 첫날부터 오러 블레이드를 펼친 어느 기사의 활약이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목숨을 걸고 죽고 죽이는 진짜 전쟁터와 달리 이런 세계에서 ‘오러 블레이드’는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구경거리가 아니니까.
그에 비해 다음 상대, 다다음 상대, 64강, 32강, 차례가 줄어도 시엔이 사람들의 주목을 사로잡는 일은 없었다. 늘 적당하게 싸워서 적당하게 이기고, 이렇다 할 정도로 딱히 열광할 게 없었으니까.
“하, 항복!”
“항복하겠소! 내가 졌소!”
그런데 16강, 8강이 되어서도, 심지어 결승에서조차 늘 ‘적당하게 싸워서 적당하게 이기는 승리’가 거듭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심지어 결승 상대가 시합 첫날부터 오러 블레이드를 써서 이목을 사로잡은 대망의 우승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또, 또다시 루이스 남작 가문의 이남, 시엘 루이스의 승리입니다!”
앞서 이자벨이 준비해준 시엔의 가짜 신분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시엘 루이스, 이 검술 대회의 가장 어린 참가자이자 가장 어린 우승자.
“오오, 참으로 놀랍도다!”
승리 후, 시엔은 왕국의 예법에 따라 시합을 지켜보는 샤를마뉴 왕국의 국왕, 샤를 4세가 있는 단상(壇上)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대로 투구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며 생각했다.
‘이대로 죽일 수 있을까?’
정말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으로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엿보는 직업병에 가까운 강박일 뿐.
‘불가능하다.’
확신할 수 있다.
단상 위에 있는 저 늙고 어리석은 왕의 곁을 지키는 12기사, 그들은 앞서 싸운 광대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진짜 강자들이니까.
하나하나가 지금의 시엔이 아니라 훗날의 완성된 시엔조차도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할 강자.
“폐하 앞에서 제 보잘것없는 검을 보여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그렇기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검을 세로로 내리꽂으며, 왕국의 예법을 차린다.
“참으로 훌륭하도다, 루이스의 시엘 공!”
경기장의 시엔을 내려다보며 왕이 말했다.
“그 어린 나이에 벌써 그 정도의 검술 실력을 갖다니! 실로 이 나라의 미래가 창창하구나!”
“과찬이십니다, 폐하.”
시엔이 재차 고개를 숙였다. 일순, 왕의 곁을 지키는 열두 기사들의 눈빛에 깊은 의심이 어린다.
왕은 어리석어도 그의 곁을 지키는 기사들은 어리석지 않다. 그게 바로 이 나라, 샤를마뉴 왕국이 어쨌든 ‘기사도의 나라’라 불리며 그 위용을 유지할 수 있던 비결이니까.
“자, 그럼 대회의 우승자가 가려진 이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바로 그때였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폐하,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중이다. 함부로 입을 열지 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을 지키는 최강의 기사가 입을 열었다.
시엔이 가진 ‘운명의 창’에 맞먹는 신기급 아티팩트, 지고의 성검이라 불리는 ‘듀란달’을 허리춤에 매달고 있는 기사였다.
“오, 친애하는 롤랑이여! 그럴 것 없네. 이 어린 우승자의 말을 내 기꺼이 들어봄세.”
12기사의 수좌, 롤랑의 제지에 당치도 않다는 듯 왕이 손을 내저었다.
“자, 어디 말해보게나. 어리고 당돌한 기사여.”
“─이 대회의 우승자로서 저에게 주어진 ‘도전자의 자격’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까?”
시엔이 물었다.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즉시 말입니다.”
“…….”
왕실 주최의 검술 대회는 계절마다 열리는 행사다. 그리고 이 대회의 우승자는 비로소 왕실의 챔피언에게 도전할 자격을 얻는다.
“호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더냐?”
“물론입니다.”
그런데 계절이 지나고 해가 지나도, 그 어느 대회의 우승자도 여태껏 왕실의 챔피언을 쓰러뜨린 적은 없다. 아니, 애초에 도전하려는 이들조차 없었다.
모두 챔피언과의 시합 도중 살해당했으니까.
─애초에 그게 바로 이 우스꽝스럽고 시시한 대회의 진짜 목적이었다.
어느 실력 있는 기사도 감히 왕실의 기사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백성들 앞에서 보란 듯이 과시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왕과 왕실의 힘과 위험을 과시하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쇼.
“호오, 실로 당돌하구나. 휴식도 취하지 않고 ‘튤립의 뒤샹 경’과 싸움을 계속하려는 것이냐?”
“이 자리에서, 이 흙 위에서 바로 싸우고 싶습니다.”
시엔이 말했다.
“가능하겠습니까?”
“참으로 당돌하도다!”
자비로운 척 미소 짓던 왕의 표정에 불쾌한 웃음이 걸린다.
“짐이 즉위하고 나서 치러진 대회 우승자 중 누구도, 뒤상 경과 싸워 살아남은 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이겠지?”
“알고 있습니다.”
시엔이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재고할 기회를 주겠노라, 당돌하고 어린 기사여. 아비처럼 네 재능을 아깝게 여겨서 하는 말이니라.”
“걱정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시엔이 담담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왕 역시 미소 짓는다.
‘그래, 요 몇 해 사이 모처럼 제물이 없기는 했지.’
왕실의 위엄을 세우는 데 사람들 앞에서 무력을 과시하는 것처럼 좋은 것도 없다.
가장 좋은 것은, 그렇게 추린 대회의 우승자를 제물 삼아 베어버리는 것이다. 처음부터 꼬리를 말고 도망치게 놔두는 게 아니라.
“당장 뒤샹 경에게 갑주와 검을 준비시키거라!”
“알겠습니다, 폐하.”
왕이 손짓했다.
쿵!
머지않아 경기장의 철문이 열린다. 철문 너머에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튤립처럼 붉은빛으로 칠해진 갑주 차림의 기사였다.
붉은빛? 아니다. 보고 나서 깨닫는다.
저것은 튤립의 색이나 염료(染料)도 아니다. 진짜 사람의 피였다.
“아비처럼 자애로운 마음을 갖고 마지막으로 묻겠노라, 나의 어린 아들이여. 정말로 쉬지도 않고 죽음조차 겁내지 않고, 이 시합을 바로 속행할 셈이더냐?”
“그렇습니다, 폐하.”
“좋다, 검투(劍鬪)를 시작하라!”
최후의 확답을 받자마자 특등석에 앉은 왕이 소리 높여 외쳤다.
그 소리와 함께 시엔이 흘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지 않은 숫자의 왕도 사람들이, 이 경기장에 물 샐 틈 없이 들어차 시엔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바로 직전까지 그들이 보고 있던 것은 시엔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시엘 루이스란 이름의 광대 기사였을 뿐.
그들이 보게 될 시엔 나이트워커의 진짜 모습은 이제부터였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은 조용함과는 거리가 멀다. 어둠 속에서 모두가 잠든 틈을 타 표적을 살해하지 않는다. 임무를 마친 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유유히 사라지는 법조차 없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 ‘신뢰’를 얻을 수 없으니까.
대개의 경우, 그들의 방식은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과시적이고 화려했다.
철컥.
시엔이 입고 있던 흉갑의 고정 리벳을 풀었다.
갑자기 갑옷을 벗다니. 객석에서 뜻밖의 웅성거림이 일었다.
비록 오러 블레이드를 가진 자들끼리의 싸움에서 갑옷이 의미가 없다고 하나, 갑주는 그 자체로 기사의 상징과도 같은 복장이었다.
갑주를 벗는다는 것은 기사들에게 있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명예’를 의미하니까. 특히 기사도를 목숨처럼 숭배하는 샤를마뉴 왕국에서는 그 의미가 더더욱 남달랐다.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지.”
눈앞의 기사, 튤립의 뒤샹 경을 향해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믿음이 없으니 신성을 부르짖고, 기사도가 없으니 기사의 도덕을 부르짖는 것처럼 말이야.”
“애송이 놈이……!”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조롱했다. 동시에 땅을 박차고 상대를 압살하려던 뒤샹 경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뭐지?’
일대의 공기가, 기백이 달라졌다.
“폐하, 당장 시합을 중지하십시오!”
다음으로 그 의미를 깨달은 것은 왕의 곁을 지키고 있던 12기사의 수장, 롤랑이었다.
“뭐? 시합을 중지하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저자는 절대 일개 남작 가문의 자제 따위가 아닙니다!”
롤랑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당장 대회를 중지하고, 제가 놈을 사로잡게 해주십시오!”
“지금 이 대회를 보고 있는 백성들의 눈을 잊었느냐!”
그러나 롤랑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왕이 노호했다.
“여기서 짐과 왕실의 위엄을 의심케 하는 행위는 설령 경의 충고라 할지라도 불가하다!”
“하오나 폐하……!”
“게다가 경도 뒤샹 경이 충분히 실력 있는 기사란 것을 알지 않느냐.”
말하려다 말고 롤랑이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식의 말싸움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어떻게 끝이 났는지 모를 정도로 기억력이 나쁘지도 않다.
“저 아이는 아무리 못해도 채 스물조차 되지 못한 풋내기! 아무리 재능 있다 하더라도 저 나이대의 성취로 뒤샹 경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말하며 왕이 손에 들린 포도주를 홀짝였다.
맞는 말이다. 적어도 상식이 통용되는 세계에서는 그럴 것이다.
그런데 롤랑이 싸우는 세계에서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았고, 그 상식 밖의 존재들이야말로 이 왕국을 위협하는 진짜 적수들이었다.
곧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저기 있는 어린 기사 역시, 그 같은 상식 바깥의 존재란 것을.
그 시각.
“……네놈, 대체 정체가 뭐냐.”
모래 위에서 시엔을 상대하는 핏빛 갑주의 기사, 뒤샹 경이 되물었다.
“빚 받으러 온 망령.”
채귀(債鬼).
시엔 나이트워커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