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기사도의 나라 (3)
튤립의 뒤샹 경은 비록 샤를마뉴의 12기사는 아니었으나, 동시에 이런 시시하고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에 어울릴 정도의 체급을 가진 기사 역시 아니었다.
적어도 그는 진짜 전쟁을 알고 있었다.
상대가 귀족이니까 무릎을 꿇는다고 봐주는 일도 없고, 알량하게 자비를 베풀지도 사로잡아 몸값을 받아내는 일도 없는, 말 그대로 죽기 전에 죽이는 전장.
그리고 눈앞의 저 어린 기사, 아니, 기사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저 소년 역시 이쪽 세계의 인간임을.
묵묵히 자세를 다잡는다.
「백합 문장의 자세」─.
앞서 검술 대회에서 풋내기들이 보여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세가 아니다. 철저하게 상대를 죽이기 위해, 살상을 목적으로 갈고닦아진 살상용 검술이다.
칼날을 따라 백합처럼 희고 찬란한 순백의 서슬이 깃들었다.
마찬가지로 시엔의 손에 들린 기사 검 역시 오러의 서슬을 머금었다.
이전까지 적당하게 보여준 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경지의 검고 어두운 서슬.
“망령의 자세─.”
자세의 명칭을 굳이 입으로 담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평범하게 정신을 집중하기 위한 자기 암시의 목적일 수도 있고, 일부러 위력적인 검식의 이름을 들려줌으로써 상대를 위축시키려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개중에서도 극소수의 몇몇 검식은, 그저 해당 자세의 구사자란 사실 자체로도 차고 넘칠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아.”
바로 지금처럼.
따사하게 내리쬐는 봄볕 속에서 시린 냉기가 뒤샹 경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린다.
“나,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
공화국의 사신.
“도(道)가 없는 자가 도를 논하는 법이지.”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용기가 없으니 용맹함을 부르짖고, 욕망을 탐하니 금욕을 찬미하고, 비겁하니까 정정당당함을 외치지. 약자를 존중하지 않으니 자비를 논하듯이 말이야. 참 웃기지?”
그것이 바로 기사도다. 그 말대로였다.
지금, 뒤샹 경에게는 감히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와 검을 맞댈 용기도 용맹도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눈앞의 괴물에게는 절대로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제, 제발 자비를…….”
“왕실의 위엄을 세우겠답시고, 네가 죽여버린 광대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그런데 살려두지 않았다. 그는 자비롭지 않았으니까.
“그, 그것은 기사로서 어디까지나 주군의 명령에─”
“불공정하고 부당한 명령에 복종하지 말라.”
시엔이 대답했다.
카앙!
검이 부딪쳤다. 그러나 부딪치는 칼날에는 아무것도 울려 퍼지지 않았다. 마치 칼로 물을 베는 것처럼 공허하기 이를 데 없는 울림.
죽음의 공포에 이가 딱딱 부딪쳤다.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튤립의 뒤샹 경, 그 이름처럼 그의 갑주는 붉게 흐드러진 기사들의 피로 덧씌워져 있었다.
그러나 피는 결국 산 자가 흘리는 것이다.
눈앞의 존재는 아니었다.
“!”
어느덧 시엔에게 더 이상 인간의 형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검고 어두운 그림자가 있을 뿐.
《망령의 형상》.
칠흑의 오러로 전신을 덧씌운 ‘망령’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살과 피와 뼈마저 뛰어넘어─ 역설적으로 인간의 굴레마저 뛰어넘게 되는 인간의 의지.
동시에 망령의 형상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적 앞에서 등을 돌리지 말라.】
“?!”
등 뒤에서 망령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직전까지 뒤샹이 보고 있던 것이, 마치 물에 비친 달에 불과했던 것처럼.
‘진짜 달’은 어느덧 뒤샹 경의 배후를 잡고 있었다.
호수에 비친 달을 내려다보는 뒤샹을, 밤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듯.
“《낙월(落月)》.”
검고 어두운 서슬이 내리꽂혔다.
등 뒤의 배후를 치는 일격. 기사로서 용납될 수 없는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행위. 그러나 시엔은 개의치 않았다.
암살자는 기사의 도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촤악!
튤립의 꽃이 붉게 흐드러졌다.
* * *
“나,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
샤를 4세, 대머리왕의 별명을 가진 늙고 어리석은 왕의 표정이 하얗게 질린다.
“서, 설마 나를 노리러 왔나?! 내, 내, 내 목을 치러 온 것이냐?!”
“침착하십시오, 폐하.”
그러나 그의 곁을 지키는 12기사의 수장, 롤랑은 당황하지 않았다.
“저자는 그저 경고를 위해 온 사자일 뿐입니다.”
“겨, 경고라니! 대체 무슨…….”
“공화국과의 채무 계약을 잊으셨습니까.”
말하다 말고 떠올렸다. 새로운 궁전을 짓고 싶어서 전쟁 자금이 필요하다고 적당히 거짓말을 친 뒤, 공화국 은행에 빌린 거액의 채무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일을. 심지어 그 채무를 독촉하러 온 베네토 공화국의 사자에게 망신까지 주고 쫓아냈던 일까지.
“─샤를 폐하.”
“히, 히익?!”
어느덧 일말의 기척조차 없이, 시엔이 그곳에 있었다.
왕과 고작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스릉.
왕을 지키는 열두 기사들이 일제히 허리춤에 손을 올린다. 그러나 그중 아무도 검을 뽑지 않았다.
“뭐, 뭘 하고 있나, 롤랑 경! 당장 검을 뽑아라!”
“상대는 검을 집어넣었습니다.”
“뭐, 보시다시피.”
롤랑이 대답에 시엔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는 그저 대화나 하러 왔을 뿐이랍니다.”
“그, 그깟 헛소리를 믿을 것 같으냐! 뭐하나, 롤랑 경! 당장 검을 뽑아서 놈을 베지 않고!”
“비무장 상태로 대화 의지가 있는 적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은 기사도에 어긋납니다.”
“기, 기사도는 무슨! 상대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가 아니더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당장 임전 태세를 갖춰라!”
“여기는 제게 맡겨주십시오, 폐하.”
당황하는 샤를 4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롤랑이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앞에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어린 암살자를 마주하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보통내기가 아니다.’
시엔을 마주하는 그의 표정에는 일말의 방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일찍이 그란델 가문 삼남의 검을 철저히 망가뜨리고 부러뜨렸다는 게 허명이 아니었나.’
대륙 제일의 검술 천재라 알려진 오스카의 명성에 대해서는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 보여준 것들, 가능성, 내심 그 아이가 성장했을 때는 자기 이상의 기사가 될 거란 불길 어린 확신마저 있었다.
그런데 그 검술 천재의 검이 어느 날 갑자기 부러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심지어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자기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소년이 바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괴물이었나.’
롤랑 드 뒤랑달.
제국의 ‘검마’ 오스왈드 그란델, 공화국의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 칠왕국의 ‘원탁왕’ 아서 펜드래곤(Arthur Pendragon)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륙 최강의 강자 중 하나.
‘검성’ 롤랑.
훗날 노쇠하고 나서는 시엔 나이트워커의 손에 쓰러져 패배하게 될 기사.
그러나 아직 지금의 그는 노쇠하지 않았다.
“도가 없는 자가 도를 논하는 법이라 했나.”
“그렇습니다.”
“아, 과연. 그래서 공화국과 귀공의 가문은 그토록 진실과 신뢰를 부르짖는 것이군.”
“…….”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사기와 거짓으로 이뤄진 추악한 실체를 숨기기 위해서 말이지. 그렇지 않나?”
“흠, 유감스럽게도─”
그의 도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엔이 대답했다.
“진실은 당신이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랍니다, 롤랑 경.”
“여기서 그대가 저지른 무례는 돌이킬 수 없는 외교적 결례다. 설령 전쟁으로 이어져도 할 말이 없지.”
“결례라니, 뭐가 말입니까?”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냐.”
“저는 어디까지나 별과 단검의 대리자로서, 이 나라와 맺은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찾아왔을 뿐입니다.”
시엔이 태평하게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 겸사겸사 기사도의 나라라 불리는 이 나라의 검에 흥미가 생겨, 대회에 참가했을 뿐이죠.”
시엔이 저지른 짓은 그저 대회에서 우승하고 왕실의 챔피언을 쓰러뜨린 게 다다. 심지어 왕실의 챔피언 역시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는 도전자들을 죽여왔다. 피차 이상할 것 없는 일이다.
“이 행위에 달리 문제가 될 소지가 있나요? 혹시 시합에 참가하기 위해 남작 가문의 이름을 사칭했던 게, 설마 전쟁으로 이어질 정도의 무례였습니까?”
“…….”
‘교활하기 그지없는 놈들.’
결과적으로 시엔의 행위 자체는 문제 삼을 명분이 없다.
그것이 바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방식이었다.
이 세계는 명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히려 그 명분에 있어 상대에게 틈을 준 것은 정작 이 나라의 지배자, 대머리왕 샤를 4세였으니까.
“빌린 돈이나 갚으시죠, 폐하.”
시엔이 말했다.
짤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윽고 침묵하는 열두 명의 기사와 가신들 앞에서, 대머리왕 샤를 4세가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 * *
“아주 화려하게 임무를 수행했네.”
그날 밤, 이자벨 나이트워커의 저택.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이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라고 밝혀놓고, 그 길로 이자벨의 저택에 향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개의치 않았다.
이곳이 나이트워커 가문의 저택이란 것은 애초에 딱히 숨겨야 할 비밀도 무엇도 아니었던 까닭에.
그저 그런 호사가나 보통의 귀족들은 알지 못해도, 자기 나라에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숨어들었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샤를마뉴 왕국은 어수룩하지 않다. 물론 대머리왕 샤를 4세와는 전혀 별개의 이야기였으나.
“그게 우리 가문의 방식이니까요.”
“라일라 언니도 참, 아무리 그래도 아들에게 이렇게나 무리한 임무를 요구하다니.”
이자벨이 쓴웃음을 지으며 포도주를 홀짝였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그래도 위험했어.”
이자벨이 말했다.
“샤를마뉴의 12기사는 강해. 그들 중 하나라도 네게 살의를 품었다가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란다.”
“그래도 품지 않았죠.”
시엔이 대답했다.
“그게 바로 기사란 족속들이니까요.”
“확실히, 이 나라에는 머릿속이 기사도와 꽃밭으로 가득 찬 바보들이 많기야 하지.”
이자벨이 딱히 부정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이 나라의 모두가 그런 바보들밖에 없는 것은 아니거든.”
“알고 있어요.”
시엔이 대답했다. 어쨌든 이 나라는 대륙에서 손꼽는 강대국이고, 그 지위는 아무 이유 없이 거저 손에 넣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저도 마침 궁금하던 참이었거든요.”
“뭐가 말이니?”
“머릿속에 기사도와 꽃밭밖에 없는 이 나라를, 지금의 위치로 끌어올린 진짜 ‘지배자’가 도대체 누구일지.”
“어머나, 그것참.”
이자벨이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있었구나.”
“뭐가 말이죠?”
“─그분께서 네게 흥미를 느낄 거란 사실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죠?”
“뭐, 그래. 몰랐다고 치자꾸나.”
시엔이 짐짓 시치미를 뗐고, 이자벨 역시 그 이상 캐묻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비밀스럽게 너를 보고자 하는 분이 계시거든.”
말하고 나서 이자벨이 응접실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란다, 시엔.”
동시에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말을 잇는다.
“기다리게 해서 실례했습니다, 공주 저하.”
공주 저하. 그 이름과 함께 응접실의 문이 열린다. 여성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성을 지키는 기사, 샤를마뉴의 12기사 중 일좌(一座)를 곁에 거느린 채로.
시체처럼 희고 창백한 여기사와 금빛 머리카락의 귀공녀가 그곳에 있었다.
“처음 뵙겠어요, 시엔 나이트워커.”
“샤를마뉴 왕국의 제1공주, 로젤리아 샤를 저하를 뵙습니다.”
시엔 역시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어느덧 이자벨이 물러났고, 응접실에는 시엔과 공주, 끝으로 그녀를 지키는 여기사가 남겨져 있었다.
“당신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답니다, 시엔 공.”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나라를 둘러본 소감이 어떠신가요?”
짐짓 겸손을 표하는 시엔에게 공주 로젤리아가 물었다.
“부드러운 봄볕이 내리쬐는 비옥한 땅이자, 고결하고 올곧은 기사도의 나라 그 자체였습니다.”
시엔이 대답했고,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로젤리아의 차가운 비웃음이었다.
“머릿속이 기사도와 꽃밭으로 가득 찬, 멍청이들의 나라란 생각은 하지 않으셨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