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37화 (37/200)

37화. 형제 싸움 (1)

머릿속이 기사도와 꽃밭으로 가득 찬 멍청이들의 나라.

로젤리아의 조소에 시엔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뭐, 꽃은 원래 봄에 피니까요.”

“아, 그것참 명답이네요.”

로젤리아가 가녀린 미성으로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 앉는다. 그 곁을 지키는 잿빛 피부의 여기사는 미동조차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다.

“그렇게 있지 말고 함께 앉아요, 테레지아 경.”

“그럴 수 없습니다, 공주님.”

테레지아 경이라 불린 여기사가 차갑게 대답했다.

“여기가 밤을 걷는 자들의 소굴이란 것을 명심해 주십시오.”

시체처럼 창백하고 새하얀 피부, 입술 사이로 흘끗 엿볼 수 있는 송곳니가 남들의 배로 길다.

보다시피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뱀파이어도 아니었다.

샤를마뉴의 12기사, 이 나라가 자랑하는 최정예 기사 조직의 일각이자 인간과 뱀파이어의 혼혈, 하프 뱀파이어─.

「창백한 백합」 테레지아 경.

“후후,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는걸요.”

백성을 사랑하는 착하고 마음씨 고운 공주님, 로젤리아 샤를.

“설마 공주님이 제 얼굴이나 보자고 여기까지 걸음을 하지는 않으셨을 테죠.”

“그 말대로랍니다.”

시엔의 비아냥에 로젤리아가 즐거운 듯한 미소를 터뜨리며 말을 잇는다.

“죽여주길 바라는 사람이 있어서 왔죠.”

“…….”

암살 의뢰.

그 말에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유감스럽게도 공주 저하, 우리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는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악마의 가장 커다란 속임수를 아시나요?”

“흠, 잘 모르겠는데요.”

시치미를 떼는 시엔에게 로젤리아가 말을 잇는다.

“바로 세상에 악마가 없다고 믿게 하는 거랍니다.”

“…….”

“그럼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장 커다란 속임수’는 무엇일까요?”

로젤리아가 즐거운 듯 키득거린다. 시엔은 조용히 침묵했다. 얼어붙을 것 같은 정적 속에서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동시에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 속에서, 시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상상력이 참 풍부하시네요.”

“새장 속에 갇혀서 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요.”

“하실 말씀은 그것뿐입니까?”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새장 속 공주님의 공상에 어울려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아서 말이죠.”

“네놈…….”

시엔의 비아냥에 테레지아 경이 칼자루 위로 손을 올린다.

“뭐, 지금 당장 죽여달란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며 로젤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저 때가 찾아왔을 때, 저의 제의를 진지하게 고려해주길 바랄 뿐이죠.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다랍니다.”

말하고 나서 로젤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돌아가죠, 테레지아 경.”

그녀가 말하는 ‘때’가 도대체 어느 때이며, 죽여주길 바라는 대상의 이름을 입에 담는 일조차 없이.

“─설령 그렇다고 쳐도.”

바로 그때였다.

등을 돌린 로젤리아를 향해 시엔이 입을 열었다.

“제가 무엇 때문에 공주님의 제의를 고려해야 하죠?”

“저는 가진 게 아주 많은 사람이니까요.”

로젤리아가 대답했다.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그리고 저는 제가 가진 것들, 이 나라와 백성들을 무척 사랑하고 있답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죠.”

“뭐가 말입니까?”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이 나라의 봄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왕국이 자랑하는 샤를마뉴의 12기사로도 말입니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해요.”

로젤리아가 말을 잇는다.

“그들이 기사가 아니라 ‘암살자’로 활약하는 이 나라의 모습을.”

“…….”

“왕국 최강의 기사들이 제 명령 아래 절대복종하고, 설령 그게 무슨 비열하고 더러운 명령이라 해도 기꺼이 따라줄 때의 이 나라 말이죠.”

백성을 사랑하는 착하고 마음씨 고운 공주.

“어때요, 무척 기대되지 않나요?”

“뭐, 확실히 겁나기는 하네요.”

그게 이 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로젤리아 샤를의 이미지다. 적어도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런데 그녀는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가족을 사랑하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그렇듯이.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숭배하는 기사도가 얼마나 허황하고 우스꽝스러운지, 모두의 앞에서 똑똑히 보여줄 필요가 있겠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그러나 로젤리아는 그렇게 착하지도 않고 마음씨가 곱지도 않았다.

“롤랑 경을 죽여주세요.”

“…….”

검성 롤랑.

이 나라 기사들의 정점이자 기사도의 모범, 그리고 대륙의 최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당대 제일의 검사 중 하나.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정의로운 기사.

그 말에는 시엔 역시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동시에 그 의미를 모를 정도로 바보도 아니었다.

우상파괴.

“말했듯이, 지금 당장 죽여달란 말은 아니에요.”

그 말에 시엔이 헛웃음을 터뜨린다. 애초에 가능할 리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머지않아 때가 올 거랍니다.”

“…….”

“때가 됐을 때, 저의 의뢰를 진지하게 고려해주길 바랄 뿐이죠.”

로젤리아의 차가운 목소리는, 일말의 의심도 없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가진 것들이 아주 많거든요.”

* * *

“로젤리아 공주는 샤를마뉴 왕국을 장차 ‘암살자의 나라’로 바꿀 생각입니다.”

기사도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이 나라처럼 말이지.”

왕국에서 임무를 마친 시엔이 돌아와 로젤리아의 ‘암살 의뢰’를 보고하자, 라일라는 놀랄 것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롤랑 경은 절대로 그녀의 뜻에 동의하지 않을 테고요.”

“이상(理想)을 추구하는 기사니까.”

라일라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조소가 깃들어 있었다.

치졸한 명성과 침 발린 영광 앞에 눈이 멀어버린 신성 제국의 ‘검마’ 오스왈드 그란델.

대륙 진출과 영토 확장의 야욕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칠왕국 군도의 ‘원탁왕’ 아서 펜드래곤.

애초에 기사를 자청한 일도 없는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는 말할 것도 없다.

대륙에서 손꼽는 힘을 가진 그들조차, 철저히 그들의 힘을 눈앞의 실리와 이익을 위해 행사하고 있다. 기사도니 뭐니 하는 허황한 이상이 아니라.

그런데 샤를마뉴 왕국의 ‘검성’ 롤랑 드 뒤랑달은 달랐다.

그는 뼛속까지 진짜 기사였다.

더욱 우스운 것은, 그의 머릿속이 기사도와 꽃밭으로 가득 차 있을지언정 적어도 멍청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도가 없는 자가 도를 논한다 했나.

그래서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은 그토록 진실과 신뢰를 부르짖는 것이군.

그는 바보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정확히 나이트워커 가문과 공화국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마저 갖고 있었다.

“장기적으로 기사도가 사라진 왕국이 얼마나 위협이 될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롤랑 경을 제거하는 것은 우리도 손해 볼 것 없는 이야기지.”

“로젤리아 공주의 의뢰를 받아들이는 겁니까?”

“그녀가 말하는 때가 얼마나 적절하냐에 따라 달려 있겠지.”

“알겠습니다, 가주님.”

아주 훗날의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신경을 써야 할 일도 아니다.

적어도 지금의 라일라는 그렇게 생각하겠지.

“─참, 그러고 보니.”

그렇기에 라일라가 담담히 화제를 돌린다.

“얼마 전, 비고가 견진성사를 준비해달라고 하더구나.”

“비고 형이 벌써……?”

뜻밖의 말에 시엔 역시 놀란 듯 눈을 끔벅거렸다.

시엔과 다섯 살 차이의 형제이자, 가문의 7식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를 수련하는 가족.

‘22살 나이로 마스터 시험이라…….’

그렇기에 시엔이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너무 일러요.”

자기가 올해 17살이란 사실은 진즉에 잊어버린 것처럼.

“후후, 네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시엔의 걱정에 라일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랑은 경우가 다르잖아요.”

“그래, 확실히 지나치게 이르기는 하지.”

비고는 시엔과 다르다. 시엔처럼 미래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것도 아니고, 가문의 기준에서 재능 역시 그렇게 특출하지 않다.

당장 시엔이 없었던 과거의 비고는 세례조차 통과하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그 아이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더구나.”

“고집이라니…….”

“마침 영지에 머물고 있는 참이거든.”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모습에 시엔이 숨을 삼켰고,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네가 가서 이야기를 좀 해보겠니?”

* * *

“비고 형.”

“돌아왔구나, 시엔.”

등 뒤에서 동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기척조차 없이.

“왕국에서 어려운 임무를 수행했다고 들었는데─”

비고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평소에 좀처럼 볼 수 없는 이질적인 모습의 시엔이 있었다.

“너, 그 옷…….”

평소 즐겨 입는 검게 옻칠한 쇠가죽 코트가 아니라, 특수 재질의 섬유로 이루어진 정장 차림.

그것은 일명 《거미 허물》이라 불리는 옷이었다.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 나이트워커 가문의 7식을 구사하기 위해 검 대신 갖춰야 하는 무장(武裝) 그 자체.

“루나 님에게 말씀드려서 사이즈를 고친다고 고쳤는데 아직도 좀 많이 끼네.”

시엔이 멋쩍은 듯 입을 열었다.

“하도 평소에 입지를 않아서.”

“가주님 말을 듣고 왔구나.”

거미 허물 차림의 시엔을 보자마자, 그 의미를 헤아린 비고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할게. 형에게 견진성사는 너무 일러.”

“그걸 가르쳐주러 온 거야?”

“응.”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빙빙 돌려 말하고 싶지 않았거든.”

시엔은 7식의 마스터가 아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시엔이 거미 허물을 입고 있다. 해당 자세의 마스터를 자청하는 그의 형, 비고 앞에서.

“꼭 형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야. 그 나이에 마스터가 된 경우는 전례를 찾기 힘들어.”

“너는 늘 예외고 말이지.”

“응.”

시엔이 달리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고가 쓴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조급하게 마스터가 되려는 이유라도 있어? 정말 7식의 마스터를 자처할 정도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해?”

“항상 그런 식으로 날 내려다보는구나, 시엔.”

“딱히 내려다본 적 없어.”

시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

정적 끝에 비고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가문에서는, 어딜 가도 네 그림자밖에 보이질 않아. 그러다 깨달았지.”

“…….”

“눈과 귀를 막고 고개를 돌린다고 해서, 네 그림자는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그렇게 말하며 비고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어느덧 그의 정장을 따라 시린 오러의 서슬이 창백하게 빛났다.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

그 이름처럼 제7식의 구사자는 검을 쓰지 않는다. 대신 특수한 재질의 섬유로 엮은 옷, ‘거미 허물’을 무기 삼아 오러를 싣고 죽음의 실을 짠다.

그렇기에 시엔 역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거미 허물의 섬유 가닥을 손끝에 걸어 엮는 7식의 시동 자세.

일명 《실뜨기 준비》.

“이렇게 둘이서 싸웠던 게 세례를 받기 전이 마지막이었나?”

“응.”

“늘 네가 이겼지.”

“형은 졌고.”

항상 이기는 것은 시엔이었다. 알고 있었다. 비고에게 그것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 운명 그 자체였으니까.

“이제는 다르다는 걸 보여줘.”

그렇기에 시엔이 말했다.

“이 자리에서 나를 이기고, 형이 7식의 마스터를 자청할 자격이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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