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형제 싸움 (2)
“솔직히 자신 없네.”
자조하는 듯한 목소리와 별개로, 어느덧 비고의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다.
《거미줄 짜기》.
어느덧 시엔이 딛고 있는 일대에 시린 서슬이 빛을 흩뿌린다.
촤아악!
촘촘히 뒤엉켜 사방에서 시엔을 옥죄어오는 죽음의 실.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를 상징하는 거미 허물과 거미줄.
마찬가지로 시엔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참철의 실마리》.”
비고가 펼친 가느다란 실과 달리,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두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뚜렷한 형태의 강사가 휘몰아쳤다.
마치 실로 엮은 칼날처럼.
직후 땅을 박찬 시엔이 거리를 좁혔고, 서로 딱 붙어 있는 상태에서 열 손가락 사이에 촘촘히 이어진 거미줄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마치 둘을 함께 가두는 올가미처럼.
‘《거미줄 감옥》!’
두 형제의 행동 범위와 움직임을 제약하는 형태의 거미집. 시엔의 의도 자체는 명백했다.
‘자세의 경지를 다투는 게 아니라, 지근거리의 순발력 싸움으로 승부를 이끌어갈 셈이다.’
동시에 확신할 수 있었다. 제아무리 가문 제일의 천재, 시엔이라 해도 정정당당한 7식의 경지로는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당장 경지 자체는 내 쪽이 더 높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부조리할 정도로 시엔에게 불리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싸움이란 것을.
그리고 이렇게까지 하지 않는 이상, 그로서는 절대로 시엔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 역시도.
‘그러니까 절대로 질 수 없다.’
이것만큼은, 적어도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만큼은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양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부끄러워서 진실을 말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미하일의 대자가 되어 자연스레 7식을 배웠을 때는 내심 ‘7식을 배운 진짜 이유’를 말할 필요가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동생과 비교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시엔이 가장 미숙하고 흥미도 없어 보이는 7식을 택했다는 것을.
호흡이 닿을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다. 그 와중에도 시엔의 거미줄은 철저하게 두 사람의 감옥처럼 행동과 움직임을 제약하고 있었다.
‘시엔의 거미집을 깨트리고 거리를 벌릴까?’
생각하고 나서 고개를 젓는다.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로 펼치는 거미줄은 애초에 무한하지 않다. 게다가 지금 시엔이 일대에 펼치고 있는 거미줄의 양과 거기에 실린 오러를 생각했을 때, 시엔의 전력은 상당히 줄어든 상태일 것이다.
그 상태로 좁혀진 거리에서 다시금 서로가 ‘실뜨기 준비’를 취했다.
거미 허물과 이어진 열 개의 손가락이 거미 다리처럼 정교하게 움직였고, 손가락 사이에 걸린 실들이 다발처럼 엮여 ‘뾰족한 칼날’의 형태를 이루었다.
《실마리 바늘》.
서로의 손에 들린 실마리 바늘이 교차했고, 칼날이 엇갈리며 시엔과 비고를 향해 내리꽂혔다.
촤악!
그러나 두 형제의 손에서 엮은 바늘이 서로를 향해 닿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상대의 바늘귀에 실을 꿰어 낚아채듯, 바늘을 엮고 있는 ‘실마리’를 서로 걸거나 잡아당기고 있었으니까.
얼핏 보기에 으레 아이들의 실뜨기 놀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풍경.
시엔의 손에 들린 바늘에 비고의 실이 걸린다. 그대로 비고가 가볍게 실을 조작하자, 시엔의 칼날이 실타래를 풀듯 형태를 잃고 맥없이 풀려나갔다.
상대의 실뜨기를 방해하고 형태를 풀어헤치는 것처럼 능숙하게.
그러나 비고의 손에 들린 실마리 바늘은 그렇지 않았다. 시엔의 거미줄에 쉽사리 걸리지 않고 풀어지는 것 역시 순순히 허락하지 않는다.
‘내 거미줄 조작이 훨씬 더 능숙하다.’
7식의 경지는 결국 거미 허물의 섬유를 얼마나 능숙하게 조종하느냐 하는 것이다. 같은 자세의 구사자끼리 맞붙을 때도 예외가 아니다.
상대가 조종하는 거미줄을 풀고 낚아채고, 이쪽의 거미줄은 상대가 낚아채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 그렇게 거미줄을 뺏고 뺏기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이쪽의 거미집’을 늘려 점차 상대를 집어삼키는 것.
거미줄을 통해 상대의 집을 무너뜨리고 빼앗아 이쪽의 거미집을 확장하는 것.
─묘리 자체는 일찍이 시조 카산이 있던 동방 대륙에서 오로(烏鷺)라 불렸던 게임과 비슷하다.
가로세로 각각 19줄의 판 위에서 흑색과 백색의 돌을 차례대로 놓으며 집을 차지하는 것을 겨루는 놀이.
커다란 판에서는 지금의 시엔조차 비고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시엔은 굳이 거리를 좁히고 서로를 아우르는 거미집을 짜서, 판의 크기를 줄이고 경우의 수를 제약한 것이다.
‘좁아진 판에서의 수읽기는 그나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던 거겠지.’
아니었다. 조금씩 시엔의 거미줄을 잡아먹고 제압하며 이쪽에서 영역을 늘리고, 시엔이 자기가 놓은 거미집에 거꾸로 궁지에 몰리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길 수 있다.’
8년 전의 그날을 마지막으로 체념하고, 체념하고 나서는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가문 제일의 천재. 도저히 올려다볼 수 없는 재능을 가진 동생.
이제는 승부에 쐐기를 박을 때였다.
“《천장 무너뜨리기》.”
허공에 점과 점을 잇는 선(線)이 거미줄.
그 선들을 무수히 겹치며 2차원 연속체─ 면(面)의 형태로 확장한 것이 거미집.
끝으로 그렇게 확장한 거미집을 평면에서 다면체(多面體)로 확장해 일격을 내리꽂는 최상급 기술 중 하나.
‘이걸로 끝났……!’
“니들 뭐 하냐?”
─그런데 그때였다.
기척조차 없이 비고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귀에 익은 목소리다.
동시에 시엔과 비고가 맞붙고 있는 그곳에, 새로운 거미줄이 섞여 들어왔다.
시엔이 주위에 쌓아 올린 거미집을 가볍게 통과하더니, 그대로 침투해 비고가 쌓아 올린 거미집 하나하나를 낚아채 모조리 풀어헤치는 터무니없는 기교.
그 압도적일 정도의 실력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7식의 마스터이자 비고의 대부, 미하일 나이트워커가 그곳에 있었다.
“미하일 대부님, 이게 무슨……!”
“뭐기는 뭐야, 내가 집 지을 때 정신 똑바로 차리란 말을 그렇게 했는데.”
미하일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직후 사방으로 풀어헤쳐진 비고의 실무더기 속에서, 유독 이질감이 느껴지는 몇 가닥의 실이 보였다.
분명 비고의 거미집을 이루고 있던 실들 중 하나이자, 교차점을 담당하고 있던 축.
그런데 그 거미줄은 비고의 것이 아니었다.
“거미집에는 내 것도 네 것도 없다.”
─시엔의 것이었다.
미하일의 말에 비고가 황망하다는 듯 숨을 삼켰다.
“설마 처음부터……?”
“틀렸어.”
그런 비고를 향해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다시 봐.”
그렇게 말하며 시엔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대로 시엔의 손가락에 이어진 거미 허물의 섬유가 춤추듯 움직였다.
‘분명히 움직였는데─.’
그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망령의 자세…….”
“7식 하나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었거든.”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몇 가닥 실에 1식의 《수월》을 써서 형의 거미집에 숨겨 넣었지. 여차할 때를 위해서.”
“또 졌구나.”
그 말을 듣고 비고가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달라질 것은 없다 자조하며.
“지기는 뭘 져?”
그런 비고를 향해 미하일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가 이겼잖아.”
“네?”
“반칙한 놈이 진 거지, 그럼 이긴 거냐?”
“그래도─”
“그럼 아예 처음부터 1식을 갖고 싸우든가.”
“그 말이 맞아, 비고 형.”
시엔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졌어.”
“…….”
물론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안다. 애초에 이것은 처음부터 부조리할 정도로 시엔이 불리하고 자신이 유리한 싸움이며, 그 부조리한 룰을 어떻게든 트집 잡아 손에 넣은 억지 승리일 뿐이니까.
“형의 승리야.”
그럼에도─.
“물론 아직 7식의 마스터가 되는 것은 일러.”
“─.”
“그래도 약속할게.”
“뭘?”
시엔이 말했다.
“형은 머지않아 마스터가 될 거야. 내가 보증할게.”
“그렇구나.”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순간,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개운해졌다.
시엔 앞에서 무엇이 그렇게 조급했는지, 자신의 고뇌가 모두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바보같이 느껴졌다.
새삼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견진성사를 통과하든 통과하지 않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눈앞에 있는 시엔이나 미하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서로에게 있어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자 그들의 전부였으니까.
* * *
“전쟁 났습니다, 전쟁.”
얼마 후, 공작 저택의 집무실.
라일라의 손등에 입맞춤하기 무섭게, 미하일이 남의 일처럼 태평하게 입을 열었다.
“전쟁이라, 이 대륙에 전쟁이 나지 않았던 때가 있기는 했니?”
“뭐, 그거야 그렇죠. 그런데 오늘따라 치고받는 규모가 좀 커서 말입니다.”
미하일이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몇 주 내로 알 놈들은 다 알게 될 겁니다. 저도 듣자마자 후다닥 배 타고 달려왔죠.”
마치 옆집에서 불이 났다는 것 같은 말투로.
“칠왕국의 맹주, 원탁왕 아서가 직접 그의 기사단을 이끌고 샤를마뉴 왕국을 침공할 예정입니다.”
호사가들 사이에서 최강자 논쟁이 끊이질 않는 대륙의 3대 기사 조직 중 하나, 원탁의 기사단.
그 정도의 강자들이 움직이는 이상, 샤를마뉴 측에서도 그들이 자랑하는 최고 전력이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샤를마뉴의 12기사.
“무슨 명분으로 그 정도의 전쟁을?”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던 가주, 라일라가 짐짓 놀란 듯 되물었다.
이 세계는 명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명분 없이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까닭에.
“아, 음. 그게 좀 복잡합니다. 제가 제대로 기억하는 게 맞나 싶네요.”
미하일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잇는다.
“그 뭐시기냐, 샤를마뉴 왕국과 칠왕국 사이에서 양모 수출 문제로 분쟁이 좀 있었는데…….”
그 후로도 미하일이 설명하는 ‘전쟁의 명분’은 30분 가까이 이어졌다.
“뭐, 그러다 보니까 칠왕국 측에서는 플랑드르 백작령 내 분리 독립파의 지지를 명분 삼아 그쪽 지역의 실효 지배 및 영토 합병을 요구하더니…….”
“덩달아 샤를마뉴 왕국의 부르군트 공작까지 칠왕국 측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뭐 어쩌고저쩌고─”
수출 금제령부터 왕위 계승부터 영토 지배, 도시의 자치 및 왕국으로의 합병 요구 등등.
이 세계는 명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시에 명분은 결국 명분에 불과하다.
“칠왕국 군도의 입장에서는 마침 대륙에 진출할 절호의 기회나 다름없겠죠, 뭐.”
그렇게 온갖 복잡하기 짝이 없는 핑곗거리와 미사여구로 덕지덕지 발린 명분의 실체는 결국 하나였다.
영토 확장과 정복, 탐욕이었다.
“시엔.”
“예, 가주님.”
“《웃는 남자》를 비롯해 호명하는 가족들에게 소집령을 내리렴.”
“!”
라일라의 말에 시엔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좀처럼 동요할 일 없는 미하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대륙에는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 하루가 멀다고 벌어지는 전쟁은 그렇게 대수로운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웃는 남자》 요한 나이트워커가 소집된 무게를 모를 그들이 아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최고 전력, 하이마스터 내에서 정점에 서는 강자.
게다가 전쟁의 타이밍이 지나칠 정도로 공교롭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젤리아 샤를…….’
대륙의 최강자 사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원탁왕 아서가, 직접 최강의 기사 조직 중 하나로 칭송받는 ‘원탁의 기사단’을 거느리고 직접 움직였다.
샤를마뉴 왕국도 그들이 자랑하는 최고 전력, 12기사(팔라딘)와 검성 롤랑이 움직일 수밖에 없을 테지.
그리고 그 충돌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롤랑 경을 죽여주세요.
‘그녀는 처음부터 이 상황을 알고 있었겠지.’
바로 그때였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칠왕국이 우리 가문더러 차용증 좀 쓰겠다네요.”
미하일이 남의 일처럼 말을 잇는다.
“남의 나라 침략하고 땅따먹기 놀이 좀 하게 함대랑 돈 좀 빌려달랍니다.”
“전쟁에는 늘 돈이 드니까 말이지.”
마찬가지로 샤를마뉴 왕국 역시, 칠왕국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돈을 빌릴 것이다.
대륙 제일의 부국이자 금융으로 명성을 쌓은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에, 얼마나 값비싼 이자를 치르게 되더라도.
공화국과 그들 가문에게 있어 이 전쟁은 말 그대로 남의 일에 불과하니까.
“우리 가문의 지혜를 가늠해볼 좋은 시험대가 준비되겠구나.”
등 뒤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역광으로 드리운 채, 라일라가 차갑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