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갈까마귀의 자세 (1)
칠왕국 군도와 샤를마뉴 왕국 사이의 전쟁.
나이트워커 가문과 공화국에 있어 이 전쟁은 결국 남의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륙 제일의 부국이자 금융과 무역을 업으로 삼는 그들에게 있어, 이 전쟁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라일라가 대륙 각지의 하이마스터에게 소집령을 내리고 나서 얼마 후, 공작 저택의 집무실.
“겨, 경애하는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어려운 걸음을 하시느라 수고가 많았어요.”
낯선 남자가 라일라의 손등 위에 입맞춤하며 조심스럽게 예를 표하고 있었다.
이 저택에 오는 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남자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마치 뱀을 눈앞에 둔 개구리 같은 표정.
“저, 저는 어디까지나 위대하신 샤를 4세 전하의 뜻을 대리해 이 자리에 왔음을 재차 공작 각하 앞에서 밝히며! 저를 향한 일말의 위해나 겁박은 곧 샤를 전하와 샤를마뉴 왕국을 향한…….”
“그런 시시한 말이나 하려고 여기까지 왔습니까?”
“히이익!”
바로 그때였다. 남자의 등 뒤에서 직전까지 없었던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왕국의 사자(使者)가 의자에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는다.
“손님 앞에서 예의를 차리렴, 시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공작 각하.”
라일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다그치자, 시엔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자, 그래서 무슨 용무로 위대한 샤를 전하의 대리자께서 이런 누추한 땅을 찾으셨는지요.”
“그, 그것이…….”
라일라의 물음에 사자가 당혹스러운 듯 말을 흐렸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공작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칠왕국 군도의 일방적이고 야만적인 주장으로 인해 촉발된 전란이 우리 왕국을 위협하는 가운데…….”
“돈 좀 빌려달라고요?”
“그,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도 전쟁 치르겠다고 돈 빌려놓고 엉뚱한 데 흥청망청 쓰더니, 또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요?”
“그쯤 하렴, 시엔.”
시엔의 당돌한 물음을 제지하며 라일라가 키득거렸다.
“물론 우리 가문은 귀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기꺼이 자금을 준비해드릴 의지가 있답니다.”
“그, 그렇다면─!”
“그런데 저 역시, 아들의 말처럼 위대한 샤를 전하의 불성실한 채무 이행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전쟁에는 돈이 든다. 그것도 아주 막대한 돈이.
설령 대륙에서 가장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을 가진 나라라 해도 예외일 수 없었다.
“……국왕 폐하 역시 귀 가문과의 신뢰에 오해가 생긴 점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고 계십니다.”
“흠, 그것참. 실로 믿음직하게 들리는 말이네요.”
사자의 말에 라일라가 차갑게 실소를 흘렸다.
“그래서, 하실 말씀은 그게 다인가요?”
라일라가 물었다.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정적 끝에 샤를마뉴 왕국의 사자가 머뭇머뭇 문서를 내밀었다.
“폐하와 왕국의 이름으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서른아홉 가지 요구에 대해 무조건 수용하겠다는 성의의 공증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조건과 계약으로 가득 찬 왕의 각서(覺書)였다.
* * *
“베네토 공화국 국영은행과 총독의 이름으로, 조금 전 칠왕국 연방과의 비밀 거래가 성사됐다고 합니다.”
“전쟁에는 늘 돈이 드니까 말이지.”
시엔이 소식을 전하자, 직전까지 ‘샤를마뉴 왕국’과의 거래를 진행하고 있던 라일라가 남의 일처럼 말을 잇는다.
“그것도 아주 막대한 돈이.”
무일푼의 농노들을 무장시킬 병장기(兵仗器)가 필요하고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밥을 먹여야 한다. 용병이라도 고용한다면 그들을 데리고 있는 일분일초가 곧 지출이다.
당장 수중에 돈이 없다면 빌려서라도 마련해야 한다. 패배하면 돈 몇 푼이 아니라 모든 걸 잃어버릴 테니까.
그 과정에서 누군가 전쟁으로 이득을 본다. 아니, 이득을 보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없는 전쟁조차 만들어내는 게 이 세상이다.
죽음의 상인(Merchant of Death).
침략자들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돈과 무기와 물자를 빌려주고, 침략당하는 이들에게도 똑같은 것을 빌려준다.
그것이 바로 그들 가문과 나라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신뢰야말로 우리 가문이 쌓아 올린 그 무엇보다 커다란 자산이란다.”
이 대륙에는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적당한 감언이설로 돈을 빌린 뒤, 일방적으로 채무 불이행(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통치자들도 적지 않다.
쉽게 말해 배 째고 드러눕는 거다.
그리고 그들의 땅에서는 그들이 곧 법이다. 그런 식으로 막대한 거금을 빌려줬다가 파산하고 길거리에 나앉은 상인과 상회의 숫자는 셀 수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무력을 갖췄다고 해도 일개 상인이 땅을 가진 왕과 귀족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까닭에.
하지만 나이트워커 가문은 달랐다.
누구도 감히 그들의 칼날과 그들 가문에 갚아야 할 채무, 그리고 이자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설령 갚아야 할 이자가 아무리 눈덩이처럼 불어났다고 해도.
“헤아릴 수 없는 가족들의 피를 통해 쌓은 신뢰지.”
“이번에는 그렇게 두지 않을 거예요.”
“나 역시 그랬으면 좋겠구나.”
시엔의 말에 라일라가 쓴웃음을 짓는다. 직전까지 보여줬던 차가운 표정이 아니라,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하고서.
‘─아마 그렇게 되겠지.’
시엔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알기 때문에 이제는 다를 것이다.
「마지막 기사들의 전쟁」.
기사도의 시대와 정신에 끝을 고하는 전쟁.
물론 전쟁은 결코 하루아침에 벌어지지 않고, 전쟁이 끝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올해에 벌어지는 전쟁은 그 시작이자 전초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전쟁을 통해 기사도의 시대는 확실하게 끝이 난다.
시엔이 가주가 되었던 시점에서는 이미 사실상 모든 나라가 ‘암살자들의 나라’가 되어 있었으니까.
이 시점에서 오직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밖에 갖지 못한 가치들이, 훗날에는 모든 나라의 핵심 자산이 된다.
그 시대에 나이트워커 가문과 공화국의 존재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았다.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사실은, 기사도의 시대에 쐐기를 박고 ‘암살자의 시대’를 알린 당사자가 누구도 아니고 바로 시엔 자신이란 점이었다.
자기 손으로 기사들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시대를 가져오며, 역설적으로 자기 손으로 가져온 새 시대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게 될 당사자.
* * *
로젤리아 샤를의 바람대로 기사도(騎士道)의 이상이 산산이 부서지고 추락하며, 그들이 자랑했던 긍지와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수치스러운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로젤리아의 통찰은 확실히 위험하다.’
그리고 그녀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세월의 마모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치고 노쇠한 검성 롤랑은 시엔의 손에 쓰러진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하지는 않으니까.
「붉은 백합의 여왕」 로젤리아 샤를.
훗날 시엔과 공화국이 멸망하고 나서도 여전히 살아남아 칠왕국 연방을 무너뜨리고, 신성 제국과 대륙의 패도(霸道)를 다투게 될 괴물.
“대부님?”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는 와중, 목소리가 들렸다.
시엔이 고개를 내린다. 시린 달빛이 쏟아지는 그곳에, 호수처럼 새파란 머리카락의 소녀가 있었다.
“티아.”
“근심이라도 있으신가요?”
“너무 많아서 탈이지.”
“음, 그것도 그렇네요.”
시엔의 말에 티아가 조용히 웃었다. 차분하고 아름다운 웃음소리였다.
“가문의 하이마스터들 전원에게 소집령을 내렸다고 들었어요.”
“그래, 큰 전쟁이 일어날 예정이거든.”
“슬퍼요.”
티아가 말했다. 슬프다니, 설마 전쟁이? 시엔이 놀란 듯 눈을 끔벅거렸다.
“뭐가?”
“제가 아직 무력하니까요. 대부님의 발목밖에 잡지 못하고─”
그녀가 슬퍼하는 것은 전쟁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제가 미워져요.”
“그렇구나.”
시엔이 쓴웃음을 짓는다.
“가족을 사랑해?”
“네, 사랑해요.”
티아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전부잖아요.”
“그렇지.”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사랑하는 가족. 정작 피 한 방울 이어져 있지 않은 주제에,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은 서로가 ‘가족’이란 이유 하나로 대가 없는 무한한 애정을 베푼다. 왜 그런 애정을 베풀어야 하는지, 왜 그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티아, 너 역시 나의 전부란 걸 잊지 말렴.”
“……네.”
“그리고 훗날의 너 역시, 널 지켜볼 수밖에 없는 어린 가족을 위해 싸우게 될 거란다.”
시엔도 티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런 형태의 비합리적 결속을 가족이라고 불렀다.
“죄송해요, 대부님.”
“마음에 담아둘 것 없어.”
시엔이 고개를 젓는다.
“발목 좀 잡는 것 가지고 자기를 탓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그렇네요.”
티아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게 가족이니까요.”
말하고 나서 티아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혔다. 시엔 역시 묘하게 대화가 낯간지럽다는 것을 느꼈다.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우리 가문은 강해.”
낯간지러움을 뒤로하고 시엔이 말했다. 아니, 강하다는 말조차 부족했다.
“특히 가문의 하이마스터들은 더더욱 그렇지.”
하이마스터.
가문의 검식을 두 가지 이상 완벽하게 통달한 최고 전력─.
그것이 가문 내에서나 세간에서나 일반적으로 통하는 하이마스터의 정의다. 하지만 시엔은 알고 있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하이마스터는 그런 알기 쉬운 정의(定意)로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님을.
애초에 하나의 검식을 마스터하는 것과 두 개의 검식을 마스터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다르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나이트워커 가문의 아홉 가지 검식이 갖는 개성과 특징을 아는 자들은, 그 무게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새벽 늦게까지 둘 다 수고가 많네.”
그와 동시에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듯이.
“시엔, 오랜만에 다시 보는걸.”
“오랜만입니다, 돈 요한.”
무척이나 부드러운 미소가 인상적인,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 일색의 남자였다.
“아, 네가 새로운 가족이구나.”
요한이라 불린 남자가 티아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티, 티아예요…….”
“좋은 이름이네.”
요한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미소 짓는다.
그러나 그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에도 불구하고, 티아의 표정에는 마치 낯선 타인을 보는 것 같은 경계의 빛이 어려 있었다.
《웃는 남자(Laughing Man)》 요한.
두 사람에게 눈길을 돌린 요한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오랜만이야, 라일라.”
동시에 차갑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하나밖에 없는 가주님의 부탁이니까 말이지.”
어느덧 공화국의 예법에 따라 정중하게 무릎 꿇고 손등 위에 입맞춤하는 그를 내려다보며, 라일라가 나직이 미소 짓는다.
“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