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41화 (41/200)

41화. 갈까마귀의 자세 (3)

고위계 저주 「살 날리기」.

망치로 전신을 내리치고, 그때마다 대못이 육체를 짓이기고 날카로운 바늘이 창자를 꿰뚫는 고통.

보통 사람의 정신이라면 당장 절명해도 이상하지 않을 끔찍한 고통 속에서, 시엔이 가까스로 의식을 다잡았다.

그대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제1식, 망령의 자세를 취하며 자신의 존재를 감춘다.

물론 상대는 가문의 하이마스터. 아무리 시엔이라 해도 어설프게 기척을 감추다가는 꼬리를 밟히고 말 것이다.

콰직!

어느새 볏짚 인형에 바늘과 대못을 내리꽂던 그레텔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우리 시엔이 어디 숨었을까~?”

그녀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그곳에 남겨진 시엔의 모습은 그저 망령의 자세를 써서 남겨둔 잔상(殘像)에 불과하다. 허물을 남기고 사라진 시엔이 다시 나타날 때를 기다리며, 그레텔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그 자리에 남겨진 잔상, 망령의 허물이라고 생각했던 ‘껍데기’가 땅을 박찼다.

“앗! 속였구나─!”

그레텔이 당황하듯 소리를 높였다. 물론 그녀 정도의 강자가 고작 이 정도 속임수에 허를 찔릴 리는 없다.

그저 어린 조카의 기교가 기특해서 참을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을 따름이다.

설령 견진성사를 치르고 마스터가 됐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가문의 최고 전력, 하이마스터가 보기에는 마스터가 된 지금의 시엔조차 어린아이에 불과하니까.

어느덧 그레텔 주위로 검고 어두운 칼날 몇 자루가 마력으로 벼려졌다.

얼핏 봐서는 일찍이 시엔이 염력 마법으로 벼렸던 ‘사이킥 나이프’와 흡사하다. 실제로 염(念)을 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염력과 저주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았다.

그러나 두 마법의 결정적 차이점은, 저주 마법에는 사이킥 마법처럼 알기 쉬운 물리적 실체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레텔이 벼린 칠흑의 칼날 역시 마찬가지다.

사이킥 나이프와 달리 저 칠흑의 칼날은 그 자체로 아무런 물리적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베어도 상처 입지 않고 심지어 칼날끼리 맞부딪치는 일조차 없다.

‘저 칼날에 닿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제아무리 시엔이라 하더라도 저 칼에 닿는 것은 피해야 했다. 설령 그 자체로는 아무런 상처도 입힐 수 없는, 실체 없는 환영의 칼날이라 해도.

4위계 저주 마법 《고통의 칼날(Blade of Pain)》.

앞서 그레텔이 보여준 ‘짚신 인형’과 비슷하다.

저주 마법은 사이킥 마법과 달리 그 자체로 어떤 물리적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

저주 마법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상대의 정신 그 자체니까.

아울러 저주 마법이 정신에 직접적으로 가하는 고통은 살이 베이고 내장이 짓이겨지며, 뼈가 부서지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상처 하나 내지 않고도, 어지간한 정신력을 가진 이들조차 절명(絶命)시킬 수 있는 살상 마법.

철저하게 상대의 영혼을 파괴하는 금기의 술법.

카앙!

그리고 울려 퍼질 리 없는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철과 강철, 금속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아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칼날이 맞부딪치는 소리였다.

어느덧 시엔이 마력을 통해 벼린 사이킥 나이프가 그레텔의 ‘고통의 칼날’과 격돌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칼날을, 똑같은 마력끼리의 척력으로 맞받아친 것이다.

“어때, 저주 마법에 흥미가 좀 생겨?”

저주 마법과 함께 1위계 염력 마법 「보이지 않는 손」으로 고통의 칼날을 쥐고 있는 그레텔이 물었다.

“벌써 그 정도로 염력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아마 저주 마법도 금방 능숙해질 거야!”

“나쁘지 않네요.”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사이킥 나이프를 쥐고 맞받아치는 시엔이 대답했다.

“그런데 저는 아직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가 마법을 쓰는 방식을 못 봤는걸요. 설마 이게 전부는 아니겠죠?”

“헤헤, 물론이지!”

시엔의 도발에 그레텔이 빙긋 웃으며 재차 두 팔을 벌린다.

지금까지와 비할 바 없는 차갑고 시린 목소리와 함께.

“「저주받은 크라켄의 자세(Cursed Kraken Stance)」─.”

가문의 9식이자, 그레텔의 손을 통해 개량된 고유 검식.

어느덧 그레텔의 주위에서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 마찬가지로 무수한 저주의 칼날을 쥐고 있었다.

지금의 시엔이 동시에 펼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손과 사이킥 나이프의 숫자는 열 개 남짓. 그에 비해 저주와 사이킥 마법을 잇달아 구사하는 그레텔의 손과 칼날은, 문자 그대로 세는 게 무의미할 지경이었다.

북해에 서식하는 두족류 형태의 바다 괴수가, 다리를 뻗어 배를 휘감고 조이는 듯한 압박감.

“……!”

아주 오래전, 가문의 지하 도서관에서 봤던 9식의 검결(劍訣)이 문득 떠올랐다.

「9식의 극의를 추구하는 그대에게 묻나니,

사람의 다리는 2개, 문어의 다리는 8개, 오징어의 다리는 10개.

크라켄의 다리는 몇 개?」

상식적으로 떠오르는 대답은 ‘알 수 없다’다.

그런데 눈앞의 풍경을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상식이 바로 정답이란 것을.

알 수 없다. 너무 많아서 셀 수조차 없다.

감히 대적할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 물량. 심지어 그 칼날에 깃든 악의는 알기 쉬운 오러의 칼날도 사이킥 나이프도 아니다.

상대의 정신과 영혼을 파괴하는 고통의 칼날이다.

악의로 가득 찬 크라켄의 촉수들이 내리꽂혔다.

시엔이 구사하는 여덟 자루의 사이킥 나이프로는 도무지 막아낼 수 없는 물량 공세. 사방에서 칼날의 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대양의 괴수가 시엔을 움켜쥐는 것처럼 내리꽂히는 고통의 칼날.

막아내려 했으나 막아낼 수 없었다.

시엔에게는 고작 여덟 개의 다리밖에 없었으니까.

그에 비해 그레텔의 ‘다리’는 그렇지 않았다.

콰직!

칠흑의 칼날 하나가 시엔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없다. 피도 흐르지 않고 내장이 찢어지지도, 뼈가 부러지지도 않았다.

“커헉……!”

고통의 칼날.

그 이름처럼 그저 악의로 가득 찬 고통이 있을 뿐이었다.

콰직!

육체가 부서지는 고통 따위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겪었다. 정신의 고통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숙달된 저주 마법사의 고통은 기어코 정신의 가장 나약한 부분, 가장 아물지 않는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부순다.

일찍이 절망의 가장 깊숙한 수렁에 빠졌던 그때의 고통과 기억을, 기어코 끄집어내는 것이다.

─지금의 시엔 나이트워커가 겪었고 겪게 될 절망과 고통을, 그레텔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으리라.

그레텔이 저주의 칼날을 통해 시엔에게 보여주는 고통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시엔의 눈앞에 있는 그레텔의 최후였다.

시엔이 제국과의 전쟁에 나서 승리할 때마다, 그렇게 놈들에게 상처를 입힐 때마다…….

제국에 사로잡혀 있던 그레텔의 잘린 신체가 하나씩 가문의 저택에 보내졌다.

아직 잘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핏기가 남은 채로.

훗날 ‘마지막 기사들의 전쟁’을 통해 기사도의 허황한 이상을 완전히 벗어버린 신성 제국은,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이 추구하던 ‘암살자의 나라’조차 아니었다.

사람의 살가죽을 뒤집어쓴 악마의 나라였다.

형용할 수 없는 절망이 시엔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결코 17살 남짓한 어린아이가 품을 수 있는 규모의 그것이 아니었다. 동시에 미래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시엔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의 고통이었다.

‘……!’

세상의 온갖 끔찍한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었다고 생각했다.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뭉개지는 고통 따위는 고통 축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그런데 아무리 겪어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고 아물지 않는 고통이 딱 하나 있었다.

가족을 잃는 고통이었다.

“가족이 전부다…….”

영혼의 일부가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시엔이 나지막이 읊조린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시엔은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시, 시엔?!”

폭주하듯 휘몰아치는 마력의 폭풍에 그레텔이 일순 당황하며 숨을 삼켰다.

그녀조차 예상하지 못한 터무니없는 마력의 격랑. 아니, 그녀가 놀란 것은 마력의 양 자체가 아니었다.

마력 속에서 느껴지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렬한 증오였다.

사이킥 마법, 염력 학파가 강력하고 명징(明澄)한 의지 그 자체를 동력 삼아 펼치는 데 비해─.

저주는 기본적으로 증오와 원념의 세기를 원천으로 삼는다.

그리고 지금, 그레텔 앞에서 시엔이 펼치는 저주의 동력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마녀조차 경악하며 숨을 삼킬 수밖에 없는 증오의 소용돌이.

도대체 무엇이 이 아이에게 이토록 끔찍한 악의의 씨앗을 심어놓았을까.

형용할 수 없는 악의가 휘몰아치며 시엔의 통제를 벗어나 손끝에서 검고 어두운 칼날의 형태를 이룬다.

칠흑의 마력으로 벼려진 흑도.

그리고 시엔에게 꽂혀 있던 무수한 고통의 칼날들이, 덧없이 마력의 입자로 화하며 스러졌다. 마치 허공에서 흩날리는 까마귀의 깃털처럼 덧없이.

“네버모어(Nevermore)……!?”

그레텔 역시 그 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주살검 《네버모어》.

스치거나 닿는 것으로도 상대를 즉사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최고위 저주 마법.

그리고 나이트워커 가문의 4식 「갈까마귀의 자세」를 통달하기 위해 손에 넣어야 하는 오의─.

그녀가 익히 알고 있어야 할 귀엽고 어린 조카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설고 어두운 눈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벌써 4식의 오의를……?!”

나이트워커 가문의 하이마스터조차 동요할 정도의 경지.

그 상태로 시엔이 땅을 박찼다.

앞서 보여준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움직임. 완벽의 경지에 이른 망령의 자세. 심지어 시엔의 손에 들린 것은 4식, 갈까마귀 자세의 극의(極意)라 일컬어지는 최악의 마검이다.

그 모습에 가족을 눈앞에 둔 어린 조카의 모습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1식과 4식, 두 가지 검식의 오의를 자유자재로 펼치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 하이마스터가 있을 뿐.

‘그래도 이 이상 전력을 냈다가는 시엔이─!’

물론 그레텔 역시 하이마스터란 이명을 거저 얻은 게 아니다.

하지만 확신이 없었다. 지금의 시엔을 상대로 어디까지 전력을 내야 할까. 눈앞에 있는 어린 조카의 경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로가 상처 없이 끝나는 결말이,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바로 그때였다.

“그쯤 해라.”

카앙!

실루엣 하나가 악의로 가득 찬 시엔의 검을 맞받아친다.

소름 끼칠 정도로 시리고 창백한 달빛을 내뿜는 칼날이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신기급 아티팩트.

롤랑의 듀란달, 원탁왕의 엑스칼리버, 갤러해드의 ‘이상한 띠의 검(Espee as Estranges Renges)’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륙 최강의 명검─.

《월광검(月光劍)》의 시린 서슬이었다.

“요한 오빠……?”

웃는 남자, 요한 나이트워커가 그곳에 있었다.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시엔의 공격을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능숙하게 제지하며.

여전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 채로.

“가족을 상처 입혀서 어쩔 셈이니.”

─어느새 시엔의 목덜미를 따라 또 하나의 시퍼런 서슬이 빛을 내뿜는다.

“멈춰, 시엔.”

「사냥꾼」 헨젤 나이트워커의 칼날이었다.

“아…….”

통제를 잃고 휘몰아치는 저주의 마력이 스러진다. 이내 깨달았다.

산산이 부서지고 깨졌다고 생각한 영혼이, 시엔의 전부가, 아직 무엇 하나 부서지지 않고 여기 있었음을.

그런 주제에 자기 손으로 지키겠다고 맹세했던 전부를 향해, 정작 자기가 상처를 입히려 들었다는 사실 역시도.

자세가 무너져 내리며 무릎을 꿇는다.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 왕바보 멍청이 돌대가리 그레텔!”

그 순간, 여동생을 향한 헨젤의 호통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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