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44화 (44/200)

44화. 암살자와 공안 (1)

이 세계는 죽여야 할 자들로 넘쳐나고 있다. 굳이 시엔이 증오하는 이름들이 아니더라도, 나이트워커 가문의 살생부에는 여전히 헤아릴 수 없는 이름들이 적혀 있었던 까닭에.

“앙리 드 칼바도스 백작.”

달빛을 등진 채,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속삭였다.

“일명 《죽지 않는 노기사》라 불리는 노장이란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로서 시엔에게 맡겨진 임무는 여느 때와 같았다. 가문의 블랙리스트를 제거하는 것.

“그에게 죽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물론이지.”

시엔의 당돌한 물음에 라일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침략을 시작한 칠왕국의 함대가 도버 해협을 통과해 샤를마뉴 왕국의 ‘칼바도스 백작령’에 상륙할 예정이니까. ─마침 함대에 타고 있던 가족이 때맞춰 상륙 시기를 알리는 매를 날려줬지.”

그리고 시엔이 죽여야 할 자의 이름, 칼바도스의 앙리(Henri de Calvados).

다시 말해 그는 칠왕국 함대가 상륙할 지역, 칼바도스 백작령을 지킬 의무가 있는 샤를마뉴 왕국의 변경 수비대장이었다.

“칼바도스 백작은 그 별명처럼 역전의 노기사란다. 그가 휘하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을 이끌고 상륙을 저지할 경우, 칠왕국 측의 손해가 막심하겠지.”

“칠왕국과 함대 피해를 줄이기 위해 상륙에 앞서 적장을 죽이란 거네요.”

“그래.”

물론 칠왕국 연방과 샤를마뉴 왕국 사이의 전쟁에서, 라일라가 딱히 칠왕국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이 본격화되기도 전에, 우리나라에서 빌려준 값비싼 함대가 상륙조차 실패하고 뱃머리를 돌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하물며 피해를 입는 것은 더더욱 말이야.”

그녀는 처음부터 어느 쪽의 편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니까.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이며,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죽음의 상인이다.

침략자 칠왕국에 함대와 군수 물자를 빌려주고, 심지어 침략당하는 샤를마뉴 왕국에도 똑같이 칼과 방패, 갑옷과 각종 물자를 빌려준다.

양쪽 모두 ‘무사히’ 전쟁을 치를 수 있도록.

그녀와 나이트워커 가문에 있어서 이 전쟁은 결국 비즈니스에 불과하다. 그리고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는 비즈니스가 허무하게 끝나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시엔 역시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무척 특별한 임무가 되겠네요”

“그래, 침묵의 계율(Omertà)을 지켜야 하는 임무지.”

침묵의 계율, 오메르타.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은 조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둠 속에서 모두가 잠든 틈을 타 표적을 살해하지 않는다. 임무를 마친 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유유히 사라지는 법조차 없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서는 그들 역시 평범하게 ‘암살자의 방식’을 수행할 때가 있다.

조용하게, 어둠 속에서 모두가 잠든 틈을 타 표적을 살해하고 사라지는 방식.

지금처럼 두 나라의 전쟁에 나이트워커 가문이 직접적으로 손을 썼다는 정황이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악수다. 그런데 이런 전쟁 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처음에는 하이마스터에게 맡길 임무였는데, 아무래도 ‘망령의 자세’를 통달한 너에게 기대를 걸어보고 싶구나.”

“믿어줘서 고마워요, 어머니.”

물론 그 외에도 망령의 자세를 마스터한 또 하나의 가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 정도의 하이마스터를 고작 이 정도 수준의 임무에 투입할 리가 없다.

그와 동시에 침묵의 계율을 지키며 수행하는 임무는 최소한 하이마스터 수준이 아니고서야 맡길 수 없는 임무이기도 했다.

침묵의 계율을 지키며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가문의 마스터조차 불가능하니까.

그런 임무를 시엔에게 맡겼다는 것은 오직 하나를 의미했다.

라일라는 시엔을 최소 하이마스터 수준의 전력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

“너 혼자란다.”

라일라가 말했다. 지금까지와 비할 수 없는 진중하고 걱정 어린 목소리로.

“네가 부릴 수 있는 그림자도 없고, 함께 할 형제자매도 없고, 심지어 네 정체조차 드러낼 수 없지. 밤매를 날릴 수도 없으니, 나는 설령 네 죽음조차 알 수 없을 거야.”

오직 하이마스터 이상의 가족밖에 수행할 수 없는 일명 《흑색 임무(Black Service)》.

“심지어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너는 별과 단검의 이름을 자청할 수조차 없단다. 설령 그런 식으로 네가 별과 단검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목숨을 구걸하고 우리에게 교섭을 요구해도─”

“우리는 그가 누군지 모르겠죠.”

“그래.”

시엔이 대답했고, 라일라가 씁쓸하게 미소 짓는다.

“제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가족들이 그런 식으로 스러졌겠죠.”

시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라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라고 해서 다를 게 있나요?”

“…….”’

“저는 저의 전부를 위해 싸울 뿐이에요.”

그리고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다.

그 말에 라일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무사히 살아 돌아오렴.”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 * *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가 ‘흑색 임무’를 수행할 때는, 앞서 몇 가지의 철저한 준비들이 필요하다.

“네가 운명의 창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달리 있니?”

“이름 없는 자, 최고위 뱀파이어 체사레입니다.”

“그럼 네가 ‘뇌전의 장갑’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얼굴 없는 자, 베네토 도둑 길드의 시프 마스터─ 모니카 써틴입니다.”

“그럼 네가 다크 미스릴 소재의 칼날, 왕 시해자를 가졌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군중들과 강자들이 목격했습니다.”

시엔이 대답했다.

“그럼 ‘운명의 창’을 제외하고 전부를 내놓으렴.”

흑색 임무에 나서기 위해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는 철저하게 자신을 숨길 필요가 있다.

복장부터 무구 등의 각종 애장(愛裝)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평소 트레이드마크처럼 화려하게 과시하거나 내지는 어떤 형태로 비밀스레 손에 넣은 것이든, 목격자가 있는 시점에서 임무에 가져갈 수 없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은 그 무엇보다 진실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 그것이 그들이 가진 신뢰의 기둥이 되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진실에 대해 침묵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침묵의 계율(오메르타)」이라 불리는 흑색 임무다.

누군가 이 일을 추궁해도 나이트워커 가문은 결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그 대신, 애초에 그들 가문이 추궁받을 여지를 주지 않는다.

특히 이런 전쟁 속에서 적국이 상륙 지점으로 삼는 지역의 수비대장이 정체불명의 암살자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랄 것도 없는 일이니까.

하물며 명분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함부로 나이트워커 가문을 의심하는 것은 거꾸로 그들에게 명예를 더럽히고 모욕받는 ‘명분’이 되어 움직이게 할 여지를 준다. 그렇기에 알든 모르든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심증이 확실하다 해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그들 가문의 방식이었다.

“따라오렴.”

무려 금화 500닢을 주고 바가지로 산 뇌전의 장갑, 끝으로 하이마스터 헨젤과 그레텔이 준 다크 미스릴 소재 단검 ‘왕 시해자’를 넘기고 나서, 시엔이 라일라의 뒤를 따랐다.

공작 저택의 지하에 있는 비밀스러운 일실.

“시엔에게 벌써부터 침묵의 계율을 지키게 하려는 것이냐.”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와 뾰족한 귀를 가진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평생에 걸쳐 태양을 볼 수 없는 저주받은 종족이자 가문의 가장 지혜로운 자, 다크 엘프 루나였다.

“어머나, 친애하는 루나 님.”

라일라는 놀라는 일 없이 담담히 미소 지었다.

“이미 이야기는 들으셨을 테지요.”

“네버모어를 펼친 정도로 정녕 4식의 극의라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럴 리가요.”

그 말대로 4식의 경지, 그 오의라 일컬어지는 네버모어는 어느 의미에서 시작에 불과하다.

네버모어는 통상의 저주 마법과 달리 검의 형태를 이루고 있고, 상대에게 닿거나 스치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으니까. 그렇기에 갈까마귀의 자세 특유의 검법을 익히지 않는 이상, 그 위력을 오롯이 끌어낼 수는 없다.

일찍이 미하일이 보여준 무희와 같은 움직임처럼.

“걱정하실 것 없어요, 루나 님.”

그럼에도 시엔이 고개를 젓는다.

“저는 이미 준비됐는걸요.”

“시엔…….”

“루나 님께서 그러셨죠.”

“뭘 말이냐?”

“우리는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마스터의 경지를 규정하느냐고.”

시엔의 말에 루나가 쓴웃음을 짓는다.

“그래, 확실히 그랬었지.”

“아무래도 그 답을 찾은 것 같거든요.”

시엔이 당돌하게 대답했다.

“호오, 꼭 들어보고 싶구나.”

그 말에 콘실리에리 루나는 물론이고 라일라조차 흥미로운 듯 귀를 쫑긋했다.

“무엇이 특정 검식의 ‘마스터’를 마스터로서 정의하는 것이지?”

루나의 물음에 시엔이 대답했다.

“결과입니다.”

“승패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요.”

시엔이 고개를 젓는다.

“결과가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

젓고 나서 시엔이 말을 잇는다.

“정말로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것이 곧 결과인 셈이지요.”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압도적 힘.

루나가 나지막이 입꼬리를 뒤틀었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기품도 무엇도 없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였다.

“너에게 정말 그럴 힘이 있다는 것이냐?”

“있어요.”

“그럼 어떻게 그것을 정당화할 셈이지?”

“결과로 보여줄 테니까요.”

모순이다. 논리적으로 말이 맞지 않는 동어반복.

그럼에도 루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라일라 역시 흡족한 듯이 미소 짓는다.

“그러나 잊지 말아주렴, 시엔.”

“뭘 말이죠?”

라일라의 물음에 시엔이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다.

“그 결과를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 가족들이 흘린 피를.”

끼이익.

그 말을 끝으로 라일라가 닫혀 있던 밀실의 입구를 열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지하, 평소에는 하이마스터조차 함부로 입장할 수 없는 가장 비밀스러운 곳.

오직 가주와 콘실리에리의 입회하에, 흑색 임무를 명령받은 가족밖에 입장할 수 없는 방.

그 방에 준비된 것은 바로 결과를 입증하고 수단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문이 쌓아 올린 보고(寶庫)였다.

평소 임무에는 결코 지닐 수 없으며, 개개의 소유도 허락하지 않으며, 오직 흑색 임무를 받는 찰나의 시기에밖에 착용할 수 없는 장비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대륙 제일의 부호 가문, 나이트워커 가문조차 출혈을 일으키며 손에 넣을 수밖에 없는 보구들.

“가문의 규칙에 따라, 네가 잃어버린 두 개의 장비를 대신해 가져가렴.”

흑색 임무에 나서는 암살자는 평소 아끼고 이용하는 장비를 쓸 수 없고, 그 대신 이곳에 있는 가문의 보구를 임시로 가져갈 수 있다.

운명의 창 수준의 신기급 아티팩트 정도를 제외하고서.

애초에 운명의 창은 위명과 별개로 무척이나 수수하고 ‘눈에 띄지 않는’ 신기다. 일찍이 어린 시엔을 노린 제국의 암살자이자 소드마스터가 그랬듯, 대다수는 운명의 창을 발동했다는 사실을 쉽게 깨닫지 못할 테니까.

시엔이 흘끗 실내를 둘러보았다. 질식할 것처럼 목을 옥죄는 마력을 뒤로하고.

그곳에서 무엇을 골라야 할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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