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암살자와 공안 (2)
얼마 후, 샤를마뉴 왕국의 칼바도스 백령.
멀리서 바닷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소금 냄새 사이로 우뚝 솟은 성채가 시엔의 눈에 들어왔다.
“후우.”
아무도 보지 않는 숲의 어둠에 등을 기대고 길게 호흡을 내뱉었다. 지친 피로가 역력히 묻어나는 숨이었다.
비밀스럽게 고속 갤리선을 타고 샤를마뉴 왕국령 남서부에서 내린 뒤, 며칠 밤낮을 쉬지도 않고 움직였다.
아무리 밤을 걷는 자의 육체라 해도 지칠 수밖에 없는 지옥 같은 강행군.
시엔은 적진 앞에서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호주머니의 사과를 꺼내 크게 베어 물었다. 와그작. 터지는 과즙을 방울 하나 남기지 않고 마시며 말라붙은 목을 축였다.
죽지 않는 노기사, 칼바도스 경.
그 이름과 명성에 대해서는 시엔 역시 알고 있었다. 과거 시엔이 미숙했던 시절에는, 가문의 어느 하이마스터가 그를 처치했다는 사실도.
좋든 싫든 ‘죽지 않는 노기사’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에게 죽을 운명이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운명이란 바꿀 수 없기에 운명이니까.
‘어디로 들어갈까.’
앞서서 전보(戰報)를 받은 칼바도스 백작은 영지에 있는 백작성이 아니라, 칠왕국 함대의 상륙 예상 지점에서 적들을 격파할 수 있도록 요새에 주둔을 마친 채였다.
물론 칼바도스 백작의 요새는 적 함대의 상륙 자체를 저지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곳을 거점 삼아 상륙한 적들의 발을 묶고 고립시켜─ 천천히 말려 죽이는 고도의 유격전을 목표로 삼기 위함이니까.
다시 말해 그 정도로 복잡한 전술과 작전을 수행할 수준의 역량을 가진 ‘지휘관’이 없는 이상, 일개 백작령 따위가 왕국 규모의 대병력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시엔의 역할은 바로 그 노련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관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게 다다.
수십 년 가까이 칠왕국은 물론 북방 스카디 제도의 오크 부족, 일명 ‘바이킹’의 침탈에서도 대대로 영지를 지켜온 역전의 노기사.
그저 조국을 지키는 문지기일 뿐이라며, 샤를마뉴의 12기사에 명예 추대되는 영광조차 마다했던 왕국의 충신.
그런 노장에게 죽어 마땅한 죄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죽어야 할 이유가 있을 뿐.
“《무월(無月)》.”
나지막이 읊조리고 나서 우뚝 솟은 요새의 성곽을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서 일대를 감시하는 경비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로서는 결코 시엔을 볼 수 없을 테고.
어느덧 시엔이 성벽 위를 향해 슬쩍 팔을 뻗었다.
손목 위에 덧씌워진 흑색의 아대, 일명 거미 허물이라 불리는 특수 섬유 재질의 ‘거미줄’을 사출하며.
《거미줄 기동》.
흑색 임무를 수행할 때는 함부로 가문의 검식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런데 그게 곧 검식과 거기에 포함된 초식의 일체를 쓸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거미줄을 타고 움직이는 거미처럼, 허물에서 사출한 거미줄을 타고 시엔이 재빨리 성벽을 기어올랐다.
비록 시엔이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를 완벽히 마스터하지 않았다고 해도 일자무식은 아니다. 게다가 가문의 검식을 꼭 전투 중에 쓰란 법도 없다.
가령 지금의 시엔처럼 적진의 침투나 은밀 기동을 위해 《거미 허물》을 장갑이나 손목 보호대의 형태로 쓰는 것처럼.
어느새 성곽을 뛰어넘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까지, 심지어 뛰어넘고서도 그곳에 있는 이들 중 시엔의 존재를 깨닫는 이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누구도 아니고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을 상대로 시험을 치르고 ‘망령의 자세’를 증명한 시엔이다. 여기 있는 어중이떠중이들, 설령 오러를 쓰는 경지의 기사라 해도 지금 여기 있는 시엔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피를 뿜으며 쓰러뜨려 봐야 초식이 깨지고 쓸데없는 소란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무월(無月), 없는 달.
말 그대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망령의 자세가 갖는 초식 중에서 가장 암살자다운 초식.
수월이나 경화처럼 상대의 눈앞에서 기척을 흐리거나 오감을 헷갈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초식을 쓰는 시점에서 상대는 애초에 존재를 깨달을 수조차 없다.
동시에 이 초식은 수월이나 경화와 달리 상대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는 순간밖에 쓸 수 없다.
거꾸로 말해 ‘거기에 무엇이 있다는 의심’을 주는 시점에서, 무월은 무너진다.
닫혀 있는 문을 직접 열 수도 없고, 어설프게 발소리를 낼 수도 없다. 무의식중에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던 생명의 기운, 온갖 형태의 기척을 무심결에 흘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그 자리에 서서 그저 조용히 때를 기다릴 따름이다.
다음 교대가 나타나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고, 이곳을 지키던 이들과 자리를 바꿀 때까지. 그들 틈에 섞여 무사히 요새 내부로 침입할 수 있을 때까지.
그런데 그때였다.
“……야, 너 그거 들었어?”
“뭐?”
그곳에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경비들이 말을 잇는다.
“칠왕국의 ‘아서 왕’이란 놈은 절대로 포로를 곱게 살리는 법이 없다더라.”
“이 멍청한 사람아. 곱게 포로로 잡혀서 살려주는 것도 기사 나리들 이야기지, 우리 같은 쌍놈이랑 무슨 상관이야?”
“아니, 그게…….”
머뭇거리며 경비가 말을 잇는다.
“기사고 우리 같은 쌍놈이고 나발이고, 그냥 차라리 죽여주는 게 감지덕지할 지경이란다.”
“뭐?”
“전투에서 사로잡을 수 있는 놈들은 최대한 사로잡고, 그렇게 살린 놈들을 구경거리로 세워서 산 채로 사지를 찢거나 살가죽을 벗겨서, 누가 비명을 크게 지르게 하나 내기까지─”
“시, 시끄러워, 이 새끼야!”
듣자마자 시엔은 무심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도(道)가 없는 자가 도를 논하는 법이다.
기사도의 나라, 샤를마뉴 왕국.
용기 없고 겁쟁이로 가득 찬 그들이 기사의 용맹과 명예를 논하듯, 칠왕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칠왕국의 귀족과 기사들이 귀에 닳도록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을 떠올린다. 샤를마뉴 왕국의 기사들이 평소에 부르짖는 기사도처럼.
《신사도의 나라》.
‘Manners, Maketh, Man.’
예절이 사람을 있게 할지어다.
경비병의 걱정이 맞았다. 놈들에게는 예절이 없었다.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당장 나라가 두 쪽 세 쪽도 모자라 일곱 쪽이 나버리고, 스카디 제도의 바이킹에게 끝없이 약탈당하며 수탈에 시달리고, 끝없는 내전 속에서 전란을 거듭해온 칠왕국의 야만성은 그 어느 나라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예절이 없었고, 그렇기에 명분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그들은 샤를마뉴 왕국처럼 없는 것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신사도.
“그, 그래도 요즘은 다르다던데! 어쨌든 정당하게 명분을 주장하는 전쟁이니까, 그쪽에서도 우리를 막 대하지는 않을 거라고…….”
“싸우기도 전에 지는 소리를 해서 어쩌자는 거야! 백작님이 듣기라도 했다가는 네 모가지 매달리는 것부터 걱정해야 할걸!”
병사들의 말소리가 높아졌다.
그들의 바로 등 뒤에 있는 암살자의 존재를 꿈에도 깨닫지 못하고.
머지않아 때가 찾아왔다.
“어이, 교대다!”
문이 열린다. 그 틈에 시엔의 그림자가 미끄러졌고, 그곳에 있는 이들 중 누구도 거기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곳에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 * *
죽지 않는 노기사, 칼바도스 경.
임무에 앞서 암살 대상의 신상 명세를 파악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굳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이 시엔은 그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구사하는 자세는 「뿌리 깊은 나무의 자세」.’
물 샐 틈 없는 전신 미스릴 갑주에 대량의 오러를 흘려서 경화시키는 절대 방어의 검식.
이 자세를 구사하고 있는 이상, 강철 갑옷이 금속을 튕겨내는 것처럼 칼바도스 경의 미스릴 갑주는 시엔의 오러 블레이드조차 맥없이 튕겨낼 수 있다.
어둠 속에서 복도를 가로지르며 시엔이 소맷자락 속의 칼자루를 꺼내 들었다.
평소 아끼는 다크 미스릴 소재의 애검, 왕 시해자가 아니다.
─맹금류 발톱처럼 칼날이 뾰족하게 구부러져 있는 카람빗 나이프, 일명 「밤 발톱(Night Talon)」.
각오를 다진 시엔이 임무를 수행하려는 찰나.
“어라, 이것 참.”
바로 그때였다.
죽여야 할 백작의 침실, 헐떡이는 숨소리와 더불어 또 하나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직전까지 시엔조차 깨닫지 못할 정도의 기척.
“세상에, 타이밍이 공교로워도 이렇게 공교로울 줄이야.”
정장 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뿌리 깊은 나무의 자세를 구사하는 노기사 앞에서, 전신 미스릴 갑주로 무장한 절대 방어의 검식을 너무나도 덧없이 무너뜨리며.
“이럴 줄 알았음 내일 올 걸 그랬네.”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제국의 쥐새끼…….”
“제국의 일개 쥐새끼가, 감히 위대하신 밤을 걷는 자를 뵙나이다.”
남자가 능청스럽게 미소 지으며 예를 표했다.
“생각해 보니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이 이런 커다란 비즈니스를 놓칠 리가 없었는데 말이죠.”
“네, 네놈들…….”
입에서 피를 흘리며 ‘죽지 않는 노기사’가 힘겹게 읊조렸다.
“이야, 아직도 말할 기력이 남으셨습니까? 다 죽어가는 노친네가 힘도 좋으시네.”
정장 차림의 남자가 조롱하며 고개를 돌린다.
─겉보기에 칼바도스 경의 미스릴 갑주에는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갑주 속의 노기사는 그렇지 않다. 그야말로 죽음을 목전에 둔 모습.
“명예도 긍지도 없는 무뢰배 놈들에게…… 절대로 이 땅은 넘겨줄 수, 없─”
쿠웅!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노장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죽지 않는 노기사의 죽음.
딱히 놀랄 것은 없었다. 애초에 시엔 역시 저 뿌리 깊은 나무의 자세를 파훼할 셀 수도 없는 기술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눈앞의 저 남자는 달랐다.
“보아하니 그쪽 용무도 다 끝마친 것 같은데, 그냥 못 본 척하고 지나가도 되냐?”
“흠, 그러시겠습니까?”
시엔이 태평하게 되물었다. 정장 차림의 남자, 제국의 쥐새끼가 키득거리며 웃는다.
일찍이 시엔이 비고와 함께 맞섰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장 차림에 모노클을 쓰고 루비 조각의 세공에 열중하던 그 남자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자기 목숨조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던질 수 있는 광신의 괴물.
눈앞의 남자 역시 그와 같은 족속이었다.
제국의 쥐새끼─ 정식 명칭은 신성 로마누스 제국 국교회 「감찰성성」 소속 공안감찰부.
이 세상에 만연한 온갖 이단과 악으로부터 제국의 신앙과 질서를 지키는 수호자들.
“이름이 알려진 나이트워커 가문의 무구가 보이지 않네요.”
제국 공안, 동시에 이단심문관(Inquisitor)의 칭호를 가진 남자가 말을 이었다.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흑색 임무란 뜻이겠고, 그쪽이 적어도 하이마스터 이상의 강자란 뜻이지요.”
“누가 쥐새끼 아니랄까 봐, 별걸 다 알고 있네.”
“쥐새끼는 어디에나 있거든요.”
남자가 미소 짓는다. 시엔 역시 미소 지었다.
‘내 정체까지는 알지 못한다.’
시엔이 덧씌운 후드, 그 아래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그냥 음영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후드 속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마법적 처치가 깃든 그림자니까.
1위계 암흑 마법 《섀도우 페이스》.
시엔의 그림자 얼굴을 앞에 두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흠, 옛날부터 궁금했습니다.”
“뭐가 말이지?”
“악명으로밖에 듣지 못한 나이트워커 가문의 ‘하이마스터’가 도대체 어느 정도의 괴물일지.”
“알고 싶나?”
남자의 물음에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알려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