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암살자와 공안 (3)
“옛날부터 궁금했거든요. 나이트워커 가문의 하이마스터가 도대체 어느 정도의 괴물일지.”
“알고 싶나?”
남자의 물음에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알려주지.”
하이마스터.
대륙 제일의 암살자 가문, 나이트워커 가문의 실질적 최고 전력.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성품성사를 치르지 못한 지금의 시엔은 하이마스터가 아니다.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었다.
‘이길 수 있다.’
알기 쉬운 자신감이나 자기 암시 따위가 아니었다. 냉정하게 자신을 헤아리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할 뿐이다.
‘내가 가진 전부를 끌어내서 쓴다는 가정하에서.’
대화는 길지 않았다. 피차 느긋하게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타앗!
그저 움직일 따름이다.
어느덧 시엔의 소맷자락 속에 숨겨져 있던 카람빗 나이프, 밤 발톱이 쇄도했다.
카앙!
쇄도와 함께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엔의 칼날을 튕겨내는 그 무기는 이름처럼 방어용 단검, 일명 패링 대거(Parring Dagger)였다.
그리고 시엔의 일격을 패리하는 동시에 또 하나의 손에 들린 가느다란 찌르기용 세검, 라 피에르(la rapière)가 시엔에게 쇄도했다.
일명 레이피어.
‘패링 대거와 레이피어의 이도류.’
패링 대거로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그 틈을 노려 레이피어로 급소를 찌르는 정통파 검술.
그러나 시엔은 나이프 손잡이에 뚫린 링에 재빨리 새끼손가락을 걸치고, 빙글 돌려서 역수(逆手)로 고쳐 잡으며 튕겨 나갔던 칼날을 다시 중심으로 되돌렸다.
카앙!
아슬아슬하게 레이피어의 칼날을 비껴내며 시엔이 역으로 쇄도했다. 남자 역시 그 일격을 받아치기 위해 자세를 취했다.
아까처럼 패링 대거로 시엔의 밤 발톱을 튕겨내고 역습을 노리려는 움직임.
그러나 두 자루 칼날이 맞부딪치기 무섭게, 시엔의 손에 들린 카람빗 나이프가 미끄러지듯 패링 대거를 휘감고 손목을 향해 짓쳐 들었다.
촤아악!
패링 대거를 쥔 남자의 손목을 따라 피가 흩뿌려졌다.
─칼날이 맹금류 발톱처럼 구부러진 호크빌(Hawkbill) 내지는 리커브 스타일의 나이프는 찌르기에 적합하지 않다.
대신에 직도보다 훨씬 더 깊고 날카로운 절삭력을 이용해, 제대로 된 베기 하나로도 동맥을 깊숙이 찢어발겨 상대를 치명상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닿고 베었다. 그러나 시엔이 가진 증오의 검, 네버모어를 써서 베지는 못했다. 그럴 수도 없었다.
‘아직 실전에서 즉발로 발동하기가 어려워.’
게다가 네버모어는 발동 그 자체로 터무니없을 정도의 소모값이 필요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네버모어를 쓰려 했다가는, 아마 움직임을 읽히고 시엔 쪽이 역습을 당할 수준이다.
무엇보다 눈앞의 상대는…… 그렇게까지 증오스럽지 않았다.
저것은 그저 피라미에 불과하니까.
‘요골 동맥과 척골 동맥을 벴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기는커녕, 주요 동맥이 찢겨 너덜너덜해진 손목의 상처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엔에게 레이피어를 내리꽂았다.
카앙!
제 몸을 돌보지 않는 동귀어진. 뼈를 내주고 뼈를 취하려는 역습.
그것이 시엔에게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카앙!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아야 할 시엔의 손이, 직전에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능숙하게 공격을 패리했다.
시엔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다. 겉으로는 그랬다. 그럼에도 남자는 볼 수 있었다.
직전에 자신이 썼던 것과 같은 ‘패링 대거’가 시엔의 손에 들려 있었으니까.
2위계 염력 마법 「사이킥 나이프」.
일말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똑같은 모양과 형태로 복제되어서.
“놀랍네요. 사이킥 나이프로 즉석에서 제 패링 대거를 카피하다니.”
상처 속에서 걸음을 물리며 남자가 웃는다.
“역시, 밤을 걷는 자들의 암살검에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아직도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네.”
“믿는 구석이라.”
시엔의 말에 남자가 차갑게 조소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쓸데없이 대화를 늘어놓으며 틈을 주는 것은 삼류나 할 짓이다.
그런데 지금의 경우는 아니었다.
남자의 장광설을 뒤로하고 흘끗 고개를 돌린다.
명예도 긍지도 알지 못하는 비겁한 암살자의 손에 쓰러진 노장의 시체. 겉보기에 생채기 하나 없는 그의 미스릴 갑주.
‘방금 수준의 검술로는 뿌리 깊은 나무의 자세를 돌파할 수 없다.’
실제로 갑주 자체에는 아무런 흠이 없다. 그 속을 뚫고 들어갈 무엇이 있었다는 뜻이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침실 옆의 곁 테이블에 놓여 있는 술잔.
죽지 않는 노기사의 명성치고 너무나도 힘 빠지는 결말이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조심해야 하는 법이지요.”
시엔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남자가 웃는다. 흘끗 고개를 내려 남자의 발밑에 흘러내린 피의 양을 살폈다.
출혈량이 적지 않다. 이대로 의식을 잃고 절명하는 것도 곧이겠지. 동시에 상대가 그렇게 순순히 쓰러질 상대가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다.
방금 싸움은 그저 상대를 가늠하기 위한 탐색전에 불과했다.
그걸 위해 손목이나 동맥 몇 개 정도를 내주는 것은 피해라고 부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이걸로 당신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촤악!
어느덧 남자가 레이피어를 너덜너덜해진 손목 위로 내리찍는다.
툭.
잘린 손목과 손에 들린 패링 대거가 바닥에 떨어졌다.
“뭘 말이지?”
시엔의 정체는 깊이 눌러쓴 후드 밑의 어둠, 1위계 마법 《섀도우 페이스》로 가려져 있다.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저는 당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 말에 시엔이 무심코 실소를 터뜨렸다.
“겸손도 심하시네.”
“아니요, 이것은 당신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진실일 뿐입니다.”
남자가 말했다. 손목에서 쏟아지는 대량의 출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래, 그래서 알기 쉽게 자살이라도 하려고?”
“말했듯이 ‘저’로서는 당신을 이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덧 잘린 손목의 출혈이 멎는다.
“그런데 제가 믿고 섬기는 분께서는 그렇지가 않답니─.”
느긋하게 상대가 말을 마치는 것을 기다려줄 이유는 없었다.
타앗!
그런데 그보다 더 빨랐다.
찬란한 금빛이 남자를 휘감았고, 금색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시엔을 튕겨냈다.
“「순교자의 자세(Martyr Stance)」─.”
빛나는 휘광 속에서 남자가 속삭였다.
망령의 자세가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를 상징하듯, 제국의 이단심문관을 상징하는 자세.
“중품의 제6품, 능천사 강림.”
자세(스탠스)는 기사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사와 마법사들이 고유의 자세를 갖듯, 자세 그 자체는 결국 하나의 이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신을 섬기는 성직자들이 신성의 힘을 다루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 어린 양의 살과 피와 뼈에 친히 깃들어 주시매, 능히 악을 무찌를 힘을 주시옵소서.”
남자가 말했다.
콰직!
이윽고 남자의 육체가 기괴하게 뒤틀린다. 더없이 신성하게 빛나는 휘광 속에서 날개뼈가 등을 찢고 튀어나오고, 잘려야 할 손목에서 끝없이 살덩이가 재생되며 하나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중급 천사 강림…….’
중품의 제6품, 일명 능천사(能天使).
가장 서열이 낮은 제9, 8, 7품의 천사들을 일컬어 하품천사.
그 위의 6, 5, 4품을 일컬어 중품천사.
끝으로 치천사를 비롯해 3, 2, 1품의 최고위 천사들을 일컬어 상품천사(First Sphere).
상품천사를 강림시킬 수 있는 것은 ‘사도’라 불리는 극소수의 이들뿐.
따라서 중품천사를 강림시킬 수 있는 경지의 상대부터가 사실상 가장 많이 마주치게 될 적의 전력이란 뜻이다.
육체가 뒤틀리고 뼈가 튀어나오고 살이 뒤틀린다.
얼핏 보기에 나이트워커 가문의 세례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 뒤틀림 끝에, 시엔의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서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천사가 있을 뿐이었다.
‘뭐, 저걸 천사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둘째치고.’
잘린 손목 위로 어느새 쇠스랑처럼 날카로운 금빛 칼날의 손이 돋아나 있다. 등을 찢고 튀어나온 날개 역시, 흔히 상상하는 천사의 날개와 거리가 멀었다.
깃털도 없다. 하얗지도 않다. 알기 쉬운 성스러움도 빛도 없다.
뼈로 이루어진 날개── 아니, 차라리 조류 동물의 날개 골격에 가까웠으니까.
“그 꼴이 천사의 몰골이라니,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네.”
차가운 조소와 함께 시엔이 밤 발톱을 고쳐 잡는다.
“인간의 기준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드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도 없는 법이지요.”
“그래, 보통 그걸 괴물이라고 부르지.”
시엔이 태평하게 대답했고, 괴물처럼 그로테스크하고 기괴하게 뒤틀린 천사가 쇄도했다.
쇠스랑처럼 날카로운 금속 갈퀴를 가진 손이 휘둘러졌다.
‘아무리 신의 사자라도 중품의 제4품 천사까지는 물리적 구속을 벗어날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저것이 정말 신의 사자이기는 할까? 그들이 부르짖는 천사나 신이란 게 정말 있기는 할까? 알 수 없다.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훗날 시엔이 쓰러뜨린 헤아릴 수 없는 수의 천사와 순교자들을 되새기며 대처법을 복기할 뿐.
카앙!
휘둘러지는 쇠스랑과 시엔의 밤 발톱이 부딪쳤고, 쇳소리 대신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금빛의 파장이 뿜어졌다.
「찬미의 아리아」.
그러나 그 이름이 무색하게, 고막을 터뜨리고 뇌를 뒤흔들 정도의 고음이 울려 퍼졌다.
찬미도 아니고 아리아도 아니었다. 그저 귀를 찢을 듯 시끄럽고 무자비하게 울려 퍼지는 천사의 비명이었다.
시엔의 청각을 거치며 뇌 내에서 고통을 느끼도록 해석을 유도하는 매질(媒質), 음파 공격.
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고막이 찢어지는 고통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이 또 하나의 손에 들린 레이피어가 쇄도했다.
밤 발톱과 더불어 시엔이 숨겨둔 또 하나의 칼날이 천사의 레이피어를 튕겨냈다.
튕겨내고 나서 깨닫는다.
천사의 금빛 갈퀴손을 튕겨낼 때처럼 찬미의 아리아가 울려 퍼지지 않는다. 저 부위는 여전히 인간의 육체다.
‘완전체 강림이 아니다.’
레이피어를 튕겨내며 칼자루를 고쳐 잡는다.
히르슈폔거(Hirschfänger)─ 제국어로 일명 사슴잡이라 불리는 사냥칼. 그러나 그 칼에는 또 하나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천사잡이.
레이피어로 시엔의 움직임을 유도하고 나서, 다시금 천사의 갈퀴손이 휘둘러졌다. 첫 일격으로 시엔의 움직임을 제약하고 나서 갈퀴손을 휘둘러 찬미의 아리아로 쐐기를 박으려는 것이다.
카앙!
아니나 다를까 칼날이 맞부딪치고 황금빛의 파장이 울려 퍼진다.
찬미의 아리아.
고막을 찢고 두개골 속에서 끔찍하게 울려 퍼지는 괴성.
제국 국교회에서 말하는 아리아(Aria)는 천사의 목소리다. 그 자체로 신의 뜻과 의지를 대행하는 성스럽고 강력한 힘을 가지는 목소리.
그러나 그 실체는 천사의 목소리도 무엇도 아니다. 그저 소리의 공명에 불과하니까.
카앙!
달라질 것은 없다. 천사의 갈퀴손과 시엔의 밤 발톱이 맞부딪쳤다. 손끝에서 지금까지와 비할 바 없는 터무니없는 규모의 금빛 파장이 요동쳤다.
그저 고막이 찢어지고 머리가 울리는 것으로 끝날 규모가 아니다. 확실히 상대의 뇌와 정신을 파괴시킬 정도의 강렬한 파장. 그 파장이 시엔을 향해서 휘몰아친다.
‘끝났다!’
천사가 생각했다. 아무리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빠르다고 해도, 이 거리와 상황에서 울려 퍼지는 음속보다 빠르게 도망칠 수는 없을 테니까.
끝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찬미의 아리아는 시엔의 정신을 산산조각 낼 것이다.
“영야(永夜)─.”
바로 그때,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그럴 리가.
이 와중에 느긋하게 발음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다니? 그런데 두 글자의 발음이 또렷하게 천사의 귀에 울려 퍼지고 나서도, 둘이 맞부딪친 칼날에서 공명하는 금빛 아리아는 아직도 그 자리에 멈춘 채였다.
아니, 깨닫고 보니 그곳은 직전까지 있던 노기사의 침실조차 아니었다.
사방이 끝없는 어둠으로 가득 찬 세계였다.
‘!’
끝이 아니다.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이름처럼 끝나지 않는 밤이 있을 뿐.
‘설마……!’
꿈이 깨고 환상이 깨지고 물거품이 없어지고 그림자가 사라지듯, 세상에 절대적이고 고정된 것은 없다.
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는 시간이 빨리 흐르고, 누구에게는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시간의 절대성이란 결국 허상에 불과하니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고정된 것이 없다. 아무것도 절대적이지 않다.
망령된 세계, 끝나지 않는 밤.
시간의 흐름이 모두에게 평등하고 절대적이란 개념을 깨부수고, 시간 역시 꿈과 환상, 물거품과 같다는 진실을 보여주는 것.
「특정 영역에서 시간의 흐름을 상대적으로 가속하거나 느리게 할 수 있는」 1식의 극의.
시간 조작.
견진성사 당시 라일라가 시엔에게 영야를 펼치고 시엔이 그 영야를 ‘백야’를 써서 깨트릴 때까지, 시험장의 모래시계는 알갱이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검을 맞받아치고 대화를 주고받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문의 이들로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그들이 느끼는 시간의 흐름과 시엔과 라일라, 두 모자의 시간이 같지 않았던 까닭에.
지금 천사의 갈퀴손과 시엔의 칼날이 부딪쳐 음속으로 퍼져 나가야 할 파장이 멈춰 있고, 천사의 움직임이 멈춰 있되, 천사의 머릿속에서 흐르는 시간 감각 자체가 멈춰 있지 않듯.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지.”
멈춰 있는 시간 속에서 홀로 자유로운 시엔이 입을 열었다. 물론 정지해 있는 시간 속에서 대답이 들려올 리 없다.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내뱉는 말조차 아니었다.
“그렇게 겸손을 부르짖는 네놈들이, 정작 세상에서 가장 콧대가 높은 것처럼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시엔이 얼굴 위에 손을 댔다.
후드 밑에 드리워진 어둠을 향해 손을 대고, 마치 마스크를 벗는 것처럼 덧씌워진 어둠을 벗는다.
이윽고 섀도우 페이스 너머에 숨겨진 얼굴을 보자마자, 천사의 눈이 더없이 인간적인 경악으로 물들었다. 눈을 감는 것도 동공을 좌우로 움직이는 것조차 불가능할 상황에서.
오직 시엔이 시간의 흐름을 허락해준 그의 사고(思考)가 더할 나위 없는 경악으로 물들었다.
‘시엔 나이트워커……!’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커다란 죄악을 범했는지 깨달았다.
‘중품의 4품 중 자드키엘(Zadkiel), 하쉬말(Hashmal), 야리엘(Yahriel), 무리엘(Muriel)을 강림할 수 있는 네 명의 형제자매를 제외하고 그 이하의 모두에게 알린다.’
‘혹시라도 나이트워커 가문의 장남 시엔 나이트워커와 마주칠 경우, 100% 이길 수 있는 싸움 이외에는 도망쳐라.’
‘어설프게 이길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덤비지 마라. 도망칠 수 없을 때는 차라리 자결해라.’
‘그 아이를 키우지 마라. 기꺼이 놈의 양분이 되기를 자처하지 마라. 순순히 죽어줘라.’
‘절대로 놈의 앞에서 순교하지 마라. 그것은 순교가 아니다.’
‘대죄다.’
제국의 쥐새끼들에게 속삭일 수 있는 유일의 존재, 《시궁쥐 추기경(Rat Cardinal)》의 경고를 되새겼다.
‘항상 겸손해져라.’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범하지 마라.’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자신의 거룩하고 아름다워야 할 순교가, 순교가 되지 못했다.
적을 키우고 양분을 자처하는 돌이킬 수 없는 대죄였다.
‘아, 아아아……!’
아무리 후회해도 늦었다.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상태로 시엔의 손에 들린 칼날이 휘둘러진다.
‘천사잡이’란 이명을 가진 칼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