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단
제법 커다란 소란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곳을 찾는 이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시엔이 이곳에 발을 디딜 때부터 일대를 봉쇄하고 있던 방음 결계의 탓이다.
시엔이 설치한 것이 아니다. 시엔보다 앞서 이곳을 찾은 제국의 쥐새끼가 설치한 것이었다.
‘흠, 이것들을 어쩐담.’
그곳에 쓰러진 두 구의 시체를 보며 시엔이 생각했다. 백작의 시체야 그렇다 쳐도 저 남자, 제국의 인간으로 보이는 시체를 남겨두는 것은 여러모로 골치 아프다.
‘그냥 없애는 게 낫겠지.’
생각하고 나서 시엔이 나지막이 손가락을 튕겼다.
화르륵!
불꽃이 피어올랐다. 평소 즐겨 쓰는 마법은 아니나 원소 마법 역시 어지간한 상급 마법사 그 이상의 경지를 가진 시엔이다. 즉석에서 불을 피워 시체를 잿더미로 태우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다.
말 그대로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불타서 흔적조차 없이 스러지는 천사의 유해를 뒤로하고 시엔이 흘끗 쓰러진 노기사를 흘겼다. 어차피 살았다 하더라도 시엔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달라질 것은 없다.
그저 하나 신경 쓰이는 것은, 또다시 예정된 운명이 달라졌다는 점.
‘하이마스터의 손이 아니라 제국의 손에─.’
역사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는 어느 의미로 사소한 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공화국의 손에 죽나 제국의 손에 죽나, 두 나라 모두 이 전쟁이 그렇게 쉽게 끝나길 바라지 않으니까. 어차피 누구의 손에 죽어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알아도 찝찝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느덧 화마가 실내를 집어삼키고, 열기가 시엔의 살갗을 핥기 시작했다. 슬슬 방음 결계로 비밀을 지키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독살이라.’
그렇기에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시엔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은색 술잔을 손에 쥐었다.
죽지 않는 노기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독배(毒杯)─ 거기에 남아 있는 독을 두어 모금 홀짝였다.
마치 포도주를 시음하듯 독액을 입에 물고 천천히 음미하며, 시엔이 나지막이 눈을 찌푸렸다.
‘이 독 레시피, 설마…….’
삼키고 나서 가볍게 힘을 주며 술잔을 부숴뜨린다.
“불이다! 불이야!”
“백작님의 침실이다!”
뒤늦게 호들갑을 떨며 병사들이 상황을 찾았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국의 쥐새끼는 물론, 전신 미스릴 갑주 속에 지켜져야 할 백작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윽고 요새의 봉우리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봉화가 되어 날아올랐다. 머지않아 그 불을 신호 삼아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진다.
검고 어두운 수평 너머에서 때를 기다리던 칠왕국 함대의 소리.
침략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 * *
함대의 뱃머리 위에 남자가 서 있었다.
한쪽 손에는 엑스칼리버란 이름으로 불리는 전설의 검을, 또 하나의 손에는 롱고미니아드(Rhongomyniad)란 이름의 물푸레나무 창을 쥐고 있는 거구의 남자였다.
남자에게는 여러 이름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흔히 불리는 것은 원탁왕 아서였다.
일곱 국가로 쪼개진 섬나라, 칠왕국의 맹주(盟主)를 자처하는 로에그리아 왕국의 국왕.
그리고 왕의 곁을 보좌하는 기사들 역시 하나하나가 섬나라를 넘어 대륙 전체에 무명을 떨치는 강자들이었다.
가웨인, 랜슬롯, 퍼시벌, 베디비어, 모드레드, 갤러해드, 멀린…….
그들 전부가 로에그리아 왕국 소속은 아니다. 저마다 웨식스, 서식스, 베오르니체, 데렌리체, 머시아, 이스트앵글리아, 로에그리아의 일곱 왕국에 소속된 그들을 하나로 결속해주는 것은 오직 ‘원탁’뿐이었으니까.
원탁의 기사단(Knights of the Round Table).
차례대로 함대에서 상륙하는 그들의 군세를 보며 시엔이 헛웃음을 흘렸다.
침략자의 함대 속에, 그것도 왕이 타고 있는 배에 일말의 위화감도 없이 녹아들어서.
‘이 괴물 놈들을 일개 백작이 막을 수 있다고?’
웃기는 소리였다. 시엔의 활약 같은 것은 처음부터 아무 의미도 없었다.
“폐하의 어전에서 무엇이 그토록 우습더냐? 비겁한 자여.”
바로 그때, 기품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드레드 르 페이, 아서 왕의 아들이자 로에그리아 왕국의 1왕자.
“흠, 제가 웃음을 지었던가요?”
그 모습에 시엔이 태평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여전히 후드 밑의 어둠을 마스크처럼 덧씌운 채.
“저는 그저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폐하를 찾았을 뿐이랍니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나불대는구나.”
모드레드가 차갑게 내뱉었다.
“우리의 계약은 어디까지나 ‘함대의 무사 상륙’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랬지요.”
시엔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저는 귀공과 우리나라의 함대가 무사히 상륙하기 위해 약속을 이행했답니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모드레드가 말했다.
“네놈의 비겁한 수작 따위가 없어도, 우리는 충분히─”
콰직!
바로 그때였다.
침묵을 지키던 왕의 망토 속에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커다란 손이 튀어나와, 모드레드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동시에 그 자리에 왼쪽 무릎을 꿇고 움켜쥔 아들의 머리를 있는 힘껏 바닥에 처박았다.
쾅!
갑판에 구멍이 뚫리고 그 속으로 모드레드의 얼굴이 처박혔다.
쾅! 쾅! 쾅!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머리채를 움켜쥐고 처박은 얼굴을 다시 들어 올려 처박고, 또 처박고, 모드레드의 얼굴이 부서진 갑판에 짓눌려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아서왕은 멈추지 않았다.
“부디 아들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밤을 걷는 자여.”
원탁왕 아서가 왼쪽 무릎을 꿇은 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갑판 위에 처박은 아들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꺼낼 생각도 하지 않으며.
‘이야, 예절 교육 하나는 기가 막히네.’
그 모습을 보며 시엔이 황당해서 생각했다.
“모드레드 왕자님의 치기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지요, 폐하. 그럴 나이 아닙니까.”
그렇기에 시엔 역시 사무적인 미소로 화답했다. 정작 자기가 눈앞의 왕자보다 훨씬 더 어리다는 사실은 시치미를 뚝 떼고.
“저는 그저 거래의 이야기를 하러 왔을 뿐입니다. 경애하는 우리 암살자들의 어머니,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의 명령에 따라서 말이지요─.”
“……공화국 금화 1,500,000닢.”
“그렇습니다.”
금으로 따져도 무려 5톤에 해당할 정도의 터무니없는 거액.
그게 바로 전쟁에 드는 돈이다. 아니, 이조차 그들 정도 되는 규모의 국가들이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드는 최저 비용에 불과하다.
“병력 수송을 위해 빌려드린 공화국 함대, 징집병부터 기사에 이르기까지 제공해드린 각종 병장기들, 그 외에도 이런저런 보급품과 공성 병기를 비롯해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로 하는 전략 물자들을 합친 값이지요.”
“…….”
시엔의 말에 아서왕이 싸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서 짐의 적들에게도 똑같은 무기를 팔고, 똑같은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시키고, 그들이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물자를 제공하고 돈을 빌려줬는가?”
무기를 파는 자들은 싸움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야 무기를 많이 팔 수 있으니까.
장의사는 사람이 많이 죽기를 바란다. 그래야 염(斂)을 하고 장례를 치러 돈을 받을 수 있으니까.
전쟁과 죽음의 상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폐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폐하의 자비를 시험하지 마라, 공화국의 암살자여.”
바로 그때, 또 하나의 살기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성배의 기사」 갤러해드.
아서왕의 뒤를 이어 원탁의 기사단 내에서 제2의 실력을 자랑하는 강자이자,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아서왕 이상의 실력을 지녔을지도 모른다고 일컬어지는 기사.
그러나 그가 내뿜는 박력 앞에서 시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말씀드렸듯 공작 각하께서는 제가 돌아오는 즉시, 폐하께서 어떻게 대금을 치를지 즉답을 듣고자 하십니다.”
스릉.
뱀 가죽으로 된 칼집에는 금색의 띠가 휘감겨 있고, 십자가 모양의 칼자루에는 온갖 빛나는 보석들이 수놓아진 채다.
아서왕의 엑스칼리버에 버금가는 명검, 일명 ‘이상한 띠의 검’이 그 칼끝을 시엔을 겨눈다.
“이것이 우리의 대답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나?”
“무슨 대답을 들려주시든 그것은 폐하의 자유지요.”
갤러해드의 겁박에 시엔이 태평하게 고개를 돌린다.
거기에는 보란 듯 잘린 남자의 목이 창 위에 꽂혀 있었다. 무척이나 낯익은 얼굴이었다.
‘저, 저는 위대하신 샤를 4세 전하를 대리해 이 자리에 왔음을 공작 각하 앞에서 밝히며! 저를 향한 위해나 겁박은 곧 샤를 전하와 샤를마뉴 왕국을 향한…….’
앞서 나이트워커 공작령을 찾았던, 왕과 왕국의 이름을 방패 삼아 추할 정도로 자기 보신에 필사적이던 샤를마뉴 왕국의 겁쟁이 사자.
밤을 걷는 자들의 영지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갔어도, 칠왕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말했듯이 저는 대답을 들으러 온 일개 암살자입니다.”
그 앞에서 시엔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동시에 저를 향하는 대답이 곧 경애하는 우리 ‘암살자들의 어머니’를 향하는 대답이 될 겁니다.”
그곳에 있는 대륙 최강의 강자들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는 기백으로.
“부디 그 사실을 명심해 주시길.”
“…….”
바로 그때,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공기 속에서 아서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을 거둬라, 갤러해드 경.”
“알겠습니다, 폐하.”
갤러해드 경이 그의 검을 도로 칼집에 넣는다.
“─겨울이다.”
침묵 끝에 아서왕이 입을 열었다.
“아홉 달 뒤 이 대지에 겨울이 올 즈음, 우리가 손에 넣은 전리품을 귀국이 빌려준 함대에 실어 공화국으로 보낼 것이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어둠이 덧씌워진 마스크를 뒤로하고, 시엔이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걸로 거래는 성립되었습니다.”
창백하게 빛나는 별 아래, 소맷자락 밑에서 시퍼런 서슬을 내뿜는 칼날을 뒤로하고.
* * *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구나.”
영지로 무사히 돌아온 시엔을 보는 라일라의 눈빛은 여느 때와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시엔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정식으로는 하이마스터조차 아니다. 하물며 가문의 미래를 이을 후계자를 얼마나 위험한 곳에 보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당사자니까.
“설마 6품의 능천사와 싸우게 될 줄은 몰랐구나.”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였어요.”
그럼에도 그게 바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방식이다.
“칠왕국의 함대가 무사히 칼바도스 백작령에 상륙해 요새를 점령했고, 이후 샤를마뉴 왕국에서 약탈을 통해 얻게 될 전리품으로 겨울까지 채무를 상환할 거란 확답을 들었습니다.”
“따서 갚는다는 말처럼 들리는걸.”
“세상에서 가장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이니까요.”
“듣자 하니 샤를마뉴 왕국에서도 검성 롤랑을 필두로 열두 기사들이 출정 준비를 시작했다지.”
─팔라딘(고위 궁정 기사)이라 불리는 샤를마뉴 왕국 측의 최고 전력이자 기사도의 꽃.
샤를마뉴의 12기사와 원탁의 기사단.
끝으로 신성 제국의 ‘철십자 기사단’과 함께 호사가들 사이에서 최강자 논쟁이 끊이질 않는 대륙 3대 기사 조직.
그중 두 세력이 격돌하는 것은 결코 두 나라 사이의 다툼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과 별개로, 적어도 여름까지는 양측 모두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을 테죠.”
“그렇겠지.”
당장 눈앞의 승리를 얻는 데 급급해 자기들끼리 총력전을 펼쳤다가는, 제삼자 입장의 신성 제국이나 공화국이 어부지리로 이득을 챙기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도 주사위는 던져졌단다.”
낙장불입.
이미 벌어진 전쟁을 물릴 수는 없다. 하물며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치는 것은 아직 이 시대의 정신을 지배하는 기사들에게 있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치욕이다.
그렇기에 그 사실을 아는 나이트워커 가문으로서는 그저 침묵하며 기다릴 뿐이다.
내동댕이쳐진 주사위의 눈금이 드러날 때까지.
이러나저러나 그들에게 있어, 이 전쟁은 말 그대로 남의 일에 불과했으므로.
* * *
그로부터 얼마 후, 뜻밖의 서신이 저택에 도착했다.
그리고 봉랍 위에 새겨진 거대 바다뱀 문장(紋章)은, 나이트워커 가문에 있어서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밤을 걷는 자들이 그림자 속에서 이 나라를 떠받치듯, 바다 위에서 이 나라를 떠받치는 또 하나의 기둥.
서펀트(Serpant) 가문의 인간들이 보내는 초청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