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레이디 마린 (1)
베네토 공화국을 떠받드는 세 개의 기둥.
황금과 그림자, 끝으로 바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은 황금을 위해 그림자 속에서 목숨을 걸고 암약하며 피를 흘린다.
딱 하나, 바다 위를 제외하고.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이트워커 가문의 영향력과 손길이 닿지 않는 장소, 바다 위를 다스리는 것은 서펀트 가문의 몫이니까.
좁쌀처럼 작고 비좁은 이 나라가 유일하게 ‘규모와 물량’에 있어 대륙 최대의 우위를 점하는 해군력, 무려 3,300대가 넘는 무적함대를 지휘하며 대양의 패자(霸者)로 군림할 수 있던 비결.
물론 그림자와 함께 황금의 관리자를 자처하며 공화국 재무부 소속 제1재무경과 재무장관을 대대로 역임하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위세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육로가 밤하늘 산맥과 제국에 의해 가로막혀 있는 이 나라에서는, 제아무리 나이트워커 가문이라 해도 바다의 기둥을 자처하는 서펀트 가문과 협력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밤을 걷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바다, 정확히는 물 위에서는 감히 그들을 당해낼 수 없었으니까.
“서펀트 가문에서 초청장을 보내다니, 드문 일이네요.”
“동감이란다.”
동시에 그들이 이런 식으로 초청장을 보내는 것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설마 그들이 「물 밖에서」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라일라 역시 부정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마침 잘됐구나. 그들과는 여러 가지로 해야 할 이야기가 쌓여 있으니까 말이야.”
“수도로 가시는 거군요.”
“남의 일처럼 말하는구나.”
라일라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우리의 일이란다.”
그 말에 시엔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이런 때가 됐나.’
그녀의 말처럼 이것은 시엔에게 있어서도 결코 남 일이 아니었으니까.
* * *
대평의회(Maggior Cosiglio), 원로원, 40인 평의회(Consiglio dei Quaranta)…….
공식적으로 공화정을 표방하는 이 나라의 정치 제도는, 공화주의적 이념에 따라 서로를 감시하고 공화적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한 그럴싸한 이상 아래 세워져 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수도 베네토, 총독궁 내의 어느 비밀스러운 일실.
대낮에도 어둠이 가득 차 있는 방에는 알기 쉬운 황금 장식이나 예술품 하나 없다. 삭막하고 살풍경하기 이를 데 없는 잿빛 풍경에, 대리석 테이블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비밀스러운 회의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나이트워커 공작.”
그 방에 라일라가 모습을 드러내자, 앞서서 착석해 있던 이들 모두가 차례대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섰다.
“돈나 나이트워커.”
“경애하는 암살자들의 어머니를 뵙습니다.”
공화국의 예법에 따라 손등 위에 정중히 입맞춤하며, 마치 이 나라의 진짜 지배자를 마주하듯 깍듯이 예를 차린다.
그 말처럼 그녀는 이 나라의 진짜 지배자였다.
동시에 라일라의 손등에 입맞춤하는 이들 역시, 감히 그녀의 입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마찬가지로 이 나라의 ‘진짜 지배자’들 중 하나였다.
총독이니 대평의회니 원로원이니, 겉으로 드러나는 이 나라의 정치 제도는 결국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물론 그들 역시 나름의 역할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방, 빙산의 아래에 비할 것은 아니었다.
「10인 위원회의 방」.
이 나라의 외교 및 첩보 활동, 전쟁을 비롯해 국가의 명운이 달린 핵심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총독이나 평의회 따위가 아니다.
이 방에 있는 열 명의 지배자들, 바로 10인 위원회(Consiglio dei Dieci)라 불리는 조직이다.
“위원장께서 입장하셨으니, 이제 슬슬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친애하는 위원님들.”
이 나라의 진짜 지배자들, 그리고 그 지배자 위의 지배자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뵙게 되어 기쁘답니다, 라파엘로 제독.”
“그것참 영광스러운 말씀이네요.”
순백의 코트를 걸친 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바다처럼 새파란 머리카락과 사파이어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자였다.
라파엘로 서펀트.
바다에서 이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 서펀트 가문의 혈기 넘치는 젊은 가주. 공화국이 자랑하는 무적함대를 거느린 불패의 제독.
“설마 이런 뒤숭숭한 시기에 뭍 위로 발을 올리실 줄이야, 참으로 놀랐답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라파엘로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저랑 말도 없이 빌려준 함대가 머저리들 손에 터져나가지 않을까, 요새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지경이라서요.”
“그 임대료 덕분에 국영 병기창(Arsenale di Veneto)에서 신식 군함의 개발 자금이 충당됐지요.”
라일라가 시치미를 떼며 되묻는다.
“예산 좀 배정해 달라고 평소에 그렇게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던가요?”
“뭐, 좀 많이 부르짖기는 했죠.”
라파엘로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재무장관님의 돈 굴리는 능력에는 늘 감복할 뿐입니다. 아주 숨만 쉬어도 돈이 복사되네요.”
“돈이 돈을 부르는 법이니까요.”
“이야, 참 나라의 미래가 믿음직하군요.”
라파엘로가 말했다.
“저는 뭐, 하도 물린 게 많아서 매일 바닷물 수온이나 측정하는 신세라.”
“쓸데없는 잡담은 거기까지 하게, 제독.”
침묵하고 있던 또 하나의 위원이 입을 열었다.
베네토 공화국 국영은행장, 샤일록 디 메디치(Shylock de Medici).
“그리고 경애하는 위원장 각하.”
메디치 가문의 노가주이자 세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 말을 잇는다.
“칠왕국과 샤를마뉴, 두 나라에 빌려준 전쟁 자금의 회수는 우리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실 것 없답니다.”
“감히 실례를 무릅쓰고 여쭙길, 심장 근처의 살 1파운드를 걸고 맹세하실 수 있겠습니까?”
“제 살과 심장 따위는 얼마든지 걸 수 있지요. 살이야 그렇다 쳐도 심장을 하나밖에 걸 수 없는 게 유감일 지경으로 말이죠.”
라일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다.
“그러나 저는 그보다 더 값진 것을 걸고자 합니다.”
“─.”
“별과 단검의 이름이지요.”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는 샤일록을 뒤로하고, 라일라가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빌린 돈과 이자는 확실히 받아낼 겁니다.”
이 나라의 ‘황금과 그림자’를 지탱하는 제1재무경이자 암살자들의 어머니로서.
“우리 가문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지요.”
바로 그때, 실내에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파격적이고 태평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뭐, 대체 이놈의 나라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그 고생을 사서 하는지.”
“라, 라파엘로 제독!”
“도대체 여기가 어디라고 그깟 망발을!”
이어지는 당혹과 손가락질 속에서 라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다.
“제독께서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으시지요.”
미소와 함께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시장바닥 같았던 소란이 멎은 것은 바로 직후의 일이었다.
“누구보다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서 피를 흘린 그대들, 서펀트 가문의 충고니까요.”
“흠, 설마 나이트워커 가문의 그것에 비할 바겠습니까.”
황금과 그림자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것이다. 샤일록 디 메디치가 맡는 공화국 국영은행장의 자리는 말 그대로 은행장의 자리일 뿐이니까. 이곳에 참석해 있는 나머지 상인 가문의 가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자리는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
그러나 라일라와 그녀를 마주하는 라파엘로의 자리는 그렇지 않았다.
“뭐, 저도 할 짓 없이 놀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서.”
“바쁘신 일이라도 있나 보네요, 라파엘로 제독님.”
“제가 보통 바쁜 사람이어야죠.”
라파엘로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데이트 스케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모처럼 밉상스러운 여동생과 함께 수도로 올라와서요.”
“어머나, 레이디 마린(Lady Marine)께서?”
이어지는 뜻밖의 말에 라일라가 되물었다.
“뭐, 겸사겸사 그쪽 가문의 ‘자제님’을 초청해 파티라도 열까 합니다. 초청장이야 이미 받으셨을 테고.”
라파엘로 제독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듣자 하니, 제 철부지 여동생이 시엔 공자님을 향해 제법 흥미를 느꼈다는 모양이라서.”
“레이디 마린 님의 흥미라, 실로 흥미롭네요.”
“마침 두 사람 나이가 동갑이기도 해서 말이죠.”
“레이디 마린 역시 올해 열일곱 살, 머지않아 18살을 앞두고 있었던가요?”
“18살은 좀 남았고, 막 열일곱이 됐죠.”
라파엘로가 대답했다.
“뭐, 혹시 압니까. 어쩌다 눈이라도 맞아서 그쪽이랑 사돈 사이라도 될지.”
“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뭐, 생각해 보니 ‘그럴 걱정’은 없…….”
말을 이으려다 말고 라파엘로 제독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미소 짓고 있던 라일라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얼어붙은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아차차, 이놈의 빌어먹을 입이 방정이지.”
“……라파엘로 제독.”
라일라가 차가운 미소와 함께 말을 잇는다.
“여기는 제독께서 자랑하는 바다 위가 아니랍니다. 어리석은 농담을 하기 전에, 적어도 때와 장소를 가려주시지 않겠어요?”
“참으로 실례했습니다, 경애하는 공작 각하.”
시종 능청스럽게 웃고 있던 라파엘로 제독이, 그제야 비로소 미소를 지우고 심각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 멍청이가 물 밖에서 무능하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모양이네요.”
* * *
그 시각, 수도에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별장 저택.
“서펀트(Serpent) 가문을 섬기는 집사가, 경애하는 밤을 걷는 분을 뵙습니다.”
라일라와 함께 수도를 찾은 시엔 앞에, 정장 차림의 노신사가 예를 표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께서는 서펀트 가주님과 함께 저택에 머물고 계십니다.”
물의 도시 베네토, 곳곳에 핏줄처럼 뚫린 수로와 미로처럼 구부러진 운하(運河) 속에서 나룻배조차 없이, 서펀트 가문의 ‘집사’가 있었다.
물속에 수영하듯 잠겨 허리 아래를 감춘 채.
“제 등 위에 타고 바로 향하시겠습니까?”
“마음은 감사하나 사양하겠습니다.”
그 말에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도에는 오랜만에 온지라. 어머니와 제독님께는 직접 나룻배를 몰고 가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돈 시엔.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시엔의 대답에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그대로 물속에 잠겼다.
풍덩!
물고기가 물속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노집사의 몸이 잠겼고, 동시에 사람의 두 다리 대신 물고기의 꼬리가 첨벙 소리를 내며 튀어나와 물 위에 파문을 그렸다.
보는 대로 서펀트 가문을 섬기는 눈앞의 집사는 인간이 아니다.
인어(人魚)였다.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니까.’
도시의 수로를 따라 미끄러지는 인어 겸 집사를 뒤로하고 시엔이 생각했다.
그리고 가까운 데 적당히 정박해 있는 나룻배 위에 올라, 요금을 내고서 직접 노를 저어 도시의 수로를 타고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인어들의 가문, 서펀트 가의 초청장을 받아, 마땅히 참가해야 할 손님이 노를 젓는다.
훗날 그들 종족에게 찾아올 결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당사자로서 생각을 정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