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49화 (49/200)

49화. 레이디 마린 (2)

저물녘 어스름을 등진 시엔이 나룻배를 몰고 수로의 물살을 갈랐다.

어느새 레몬빛 가로등이 하나둘씩 점멸하며 도시의 어둠을 밝히기 시작했다. 노를 저을 때마다 출렁이는 물결 위로 빛살이 어스름이 쏟아져 내리며 특유의 물빛을 자아냈다.

그러나 정취에 잠겨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어느덧 운하를 가로지르며 나룻배가 뭍에 닿았고, 밧줄을 묶어 배를 정박하고 내린다.

수도 베네토에 있는 서펀트 가문의 별장 저택.

입구를 지키고 있던 자는 앞서 시엔을 마중 나왔던 집사였다.

“어서 오십시오, 돈 시엔.”

그러나 수로 속을 헤엄칠 때 봤던 물고기 꼬리는 찾아볼 수 없고, 인간의 두 발로 서서 정중하게 시엔을 맞이하고 있다.

“가주님과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엔이 노집사의 뒤를 따라 저택에 들어섰고, 칠흑의 새틴 드레스를 입은 라일라가 맞아주었다.

“어서 오렴, 시엔.”

“어머니.”

“그러고 보니 서펀트 가문의 저택에 얼굴을 비추는 것은 처음이구나.”

“네.”

“모처럼이니 잘 둘러보려무나.”

라일라가 손에 들린 핏빛의 포도주를 홀짝이며 흘끗 고개를 돌렸다.

“바다 위에서 이 나라를 떠받치는 또 하나의 기둥, 바다뱀의 자태를.”

서펀트 가문의 별장 저택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보통의 구조물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물 위에 쌓아 올린 수상 저택이었다.

회랑이나 중정(中庭) 대신에 대형 목욕탕처럼 커다란 온천이 뜨거운 물을 뿜어내고, 초대받은 손님들 역시 가운 차림으로 욕탕에 잠겨 포도주를 홀짝이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 저택의 온천과 수로는 곧장 저 너머의 바다로 이어져 있단다. 상하수도 시설의 처리도 완벽하지. 참으로 아름답지 않니?”

“이야,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바로 그때, 욕탕 속에 잠겨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허리 밑을 가려주는 목욕 타올 하나만을 달랑 걸친 채, 라일라 앞에서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라파엘로 제독.”

“모처럼 오셨는데, 같이 물장구라도 치시죠.”

“일곱 살 애들도 아니고, 그럴 나이는 충분히 지났는걸요.”

“뭐, 가끔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답니다.”

바다처럼 새파란 머리카락에 사파이어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자였다. 잘 다듬어져 있는 몸매는 마치 고대 조각상을 보는 것처럼 각지고 우아하다.

머리부터 인간 형상의 두 다리와 발끝에 이르기까지.

“서펀트 가문의 ‘영역’에 함부로 발을 들이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지요.”

“꼭 저희가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말씀하시네.”

두 발로 온천에서 걸어 나온 라파엘로 제독이 키득거렸다.

“피차 서로 느긋하게 물놀이나 하려고 온 게 아니잖아요?”

“어라, 아니었나.”

어느덧 집사가 가져다준 겉옷을 걸치며 라파엘로가 쓴웃음을 짓는다.

“돈 시엔을 동생에게 데려다줘.”

“알겠습니다, 제독 각하.”

겉옷을 입혀준 집사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것 참, 보기와 달리 여동생이 낯가림이 심해서 말이지요.”

멀어지는 시엔의 뒷모습을 보며 라파엘로가 말했다.

“그럼 물장구는 됐고, 아까 하던 투자 종목 이야기나 마저 할까요?”

“…….”

“아시다시피, 제가 여기서 더 물렸다가는 진짜로 대서양 수온을 측정하기 일보 직전이라서─”

라일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포도주를 홀짝였다.

그녀답지 않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서.

* * *

“아가씨, 돈 시엔께서 오셨습니다.”

시엔을 데리고 온 집사가 정중하게 노크하자, 이윽고 청아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중히 들여보내.”

집사가 고개를 숙였고, 시엔이 걸음을 옮겼다.

그곳 역시 보통의 방이 아니라, 사방에서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초대형 욕실이었다.

욕실 정중앙에는 뱃사람을 홀린다고 여겨지는 바다의 마물, 세이렌의 동상이 입에서 분수를 뿜고 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마린.”

“어서 와, 시엔 나이트워커.”

수정처럼 청아하며 당돌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첨벙. 물속에 잠겨 있던 실루엣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수증기 속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성의 상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의 몸에 물고기의 하체를 가진 종족, 머메이드.

욕탕에 걸터앉은 그녀에게는 인간의 다리가 없었다. 그 대신, 허리 밑으로 물고기의 꼬리와 지느러미가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직전까지 은빛의 비늘에 덮여 찬란히 빛나고 있던 하반신이, 어느새 매끄러운 인간의 두 다리로 의태하며 빛을 잃는다.

“네 명성을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어. 질릴 정도로 말이야.”

“영광스러운 말씀이네요.”

시엔이 담담히 고개를 숙이며 겸손을 표하자, 수증기에 가려진 ‘레이디 마린’이 조소를 흘린다. 어느덧 인간의 두 발로 당당하게 욕탕에서 걸어 나와, 곧장 시엔을 향해 거리를 좁히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인간 여성의 나체.

라파엘로와 마찬가지로 바다처럼 새파란 머리카락을 발밑까지 늘어뜨린 채, 사파이어색의 눈동자를 당돌하게 빛내고 있다.

그런데 레이디 마린의 새하얀 나체가 코앞까지 다가와도, 그녀의 나신을 가린 수증기는 걷히지 않았다.

시엔 정도로 강화된 능력자가 애초에 그깟 수증기 따위로 앞을 보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드레스였으니까.

증기(蒸氣) 드레스로 몸을 휘감고 인간의 두 다리를 의태하고 있는 머메이드, 레이디 마린이 입을 열었다.

“너, 고자야?”

“……뭐?”

천하의 시엔조차 당황해서 숨을 삼킬 수밖에 없는 말을 내뱉으며.

“……아니, 그럴 리가.”

뜻밖의 물음에 시엔이 어이가 없어서 대답했다.

“그런데 어째서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은 직접 아이를 낳지 않는 거지?”

수증기로 몸을 감싼 레이디 마린이 되물었다.

“애를 못 낳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나?”

“아니, 너희 가문이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 정도야 알고 있어.”

“그럼 그걸 묻는 저의가 뭐지?”

뜻밖의 말에 당황하던 시엔이, 어느새 동요를 멈추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눈빛이 달라졌네.”

시엔의 모습에 마린이 흥미롭다는 듯 웃는다.

“멋진 눈빛이야. 마음에 들어.”

세례를 마친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 역시 생식 능력이 있다. 마음먹을 경우, 아이를 가지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그런 식으로’ 가족을 늘리지 않는다. 이 규율을 깨트리는 가족은 더 이상 가족으로 남을 수 없다.

아니, 가족으로 남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다. 즉시 가주의 이름으로 가문 전체에 척살령이 내려지고, 당사자는 물론 맺어진 사람과 아이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추적해서 숨통을 끊어버린다.

그게 그들의 방식이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은 절대 ‘피로 맺어진 가족’을 가질 수 없으니까.

“나는 너희 가문의 방식이 마음에 들거든.”

“뭐가 말이지?”

인간의 두 다리를 혐오스럽게 내려다보며 마린이 말했다.

“나는 말이야, 인간이 정말 싫어. 끔찍할 정도로.”

아울러 그 말의 저의를 모를 시엔이 아니었다.

“─그런데 인간의 아이를 가지는 순간, 머메이드는 인간이 되지.”

“응, 이해가 빠르네.”

그녀의 저의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 내가 자유롭게 살아가야 할 곳은 바로 저 바다 위거든. 자랑스러운 오라버니처럼 말이야.”

서펀트 가문의 수장이자 바다에서 이 나라를 떠받치는 라파엘로 제독.

“그런데 가문의 뜻은 그렇지 않다는 거고.”

“샤를마뉴 왕국의 3왕자와 혼담(婚談)이 확정됐어.”

마린이 대답했다.

“가문의 늙은이들이 멋대로 내린 결정이지.”

인어가 있어야 할 곳은 대지 위가 아니다. 물이다. 그런데 바다에서 이 나라를 떠받치고 있는 라파엘로 제독과 달리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이 바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가문의 부흥을 위해 도구처럼 쓰이는 영애의 숙명이니까.

“나는 인간이 될 생각도 없고 인간의 아이 따위는 죽어도 갖기 싫어.”

마린이 말했다.

“특히 그 버터처럼 느끼하고 구역질나는 왕자랑 맺어질 바에야, 차라리 물거품이 되는 게 나아.”

첨벙!

어느새 등을 돌린 마린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러자 인간의 다리로 의태하고 있던 그녀의 하체가, 다시금 은빛 비늘을 빛내며 물고기의 형태로 돌아갔다.

“나는 인간 따위 정말 싫고, 인간이 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으니까.”

자유롭게 물속을 헤엄치며 마린이 말했다.

“그러니까 너, 나랑 결혼하자.”

“……뭐?”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은 아이를 낳을 수 없지. 나도 인간이 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어쨌든 공화국 제일의 가문끼리 맺어지는 셈이니, 나름의 명분도 있어. 피차 나쁠 것 없지 않아?”

마린의 말에 시엔이 차갑게 되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은 가족이 전부다. 설령 그것이 핏방울 하나 이어져 있지 않은 가족이라 해도.

그리고 가족 이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당장 시엔의 눈앞에서 절실하게 나이트워커 가문의 도움을 바라는 머메이드 소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걱정 마. 나도 아무 대가 없이 너희 가문의 도움을 바랄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으니까.”

“그럼 우리에게 뭘 줄 수 있지?”

“바다.”

서펀트 가문의 영애, 레이디 마린이 대답했다.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대가로, 이 세상의 바다를 모두 너에게 줄게.”

“바다를 준다고?”

너무나도 허황하기 그지없는 그 말에, 시엔이 다시금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아니, 제대로 들었어.”

시엔의 물음에 마린이 대답했다.

“나는 네게 이 세상의 바다 전부를 줄 거야.”

“어떻게 그걸 확신할 수 있지?”

일말의 망설임도 주저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내가 바다의 여왕이 될 테니까.”

“…….”

이어지는 그 말에 시엔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그때도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바로 이곳에서,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확신에 찬 말을.

그리고 그 약속이 훗날에 정말로 지켜질지 아닐지는 지금의 시엔조차 알 수 없었다.

그게 시엔이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으니까.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며 내밀었던 도움의 손길을 그때는 잡아주지 못했다. 아니, 잡아주지 않았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에게는 가족이 전부였고, 가족 이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눈앞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머메이드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잡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레이디 마린은 결국 물거품이 되었다.

그것은 지금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럼 증명해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엔이 말했다.

“……뭘?”

“네가 정말 바다의 여왕이 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스릉.

그렇게 말하며 시엔이 소맷자락 밑에서 검고 어두운 칼날의 서슬을 드러냈다. 일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다.

“응, 좋아.”

마린이 대답했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공기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 지으며.

“그런데 여기서는 못 보여줘.”

“그럼 어디서 보여줄 수 있는데?”

“내 손을 잡아.”

물속에 잠겨 있는 마린이 시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러질 것처럼 희고 가느다란 손이었다.

첨벙!

시엔이 마린의 손을 맞잡기 무섭게, 가느다란 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이 그대로 시엔을 물속으로 잡아당겨 빠트렸다.

그 상태로 물속에서 마린의 꼬리지느러미가 미끄러지듯 춤을 춘다.

이 저택의 온천과 수로는 전부 바다와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곳, 바다야말로 그들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이자 그들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영역이다.

“푸하!”

마린의 손에 이끌려 지하수로를 타고 저택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바닷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검고 어두운 밤바다 위로 별빛이 무너지듯 쏟아져 내린다.

어느새 레이디 마린의 모습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칠흑의 밤바다 위에 홀로 잠겨 있는 시엔이, 묵묵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린 밤공기 속에서 출렁거리는 파도 소리가 아스라하다.

발밑으로 끝없이 펼쳐진 수중의 어둠이, 악의를 갖고 꿈틀거린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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