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51화 (51/200)

51화. 레이디 마린 (4)

“오랜만이다.”

“어이쿠, 이것 참.”

시엔이 모습을 드러내자, 입이 쭉 찢어진 어릿광대 마스크의 남자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함께해서 더러웠다는 분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신지.”

“누가 다시 보기 싫대?”

“어라, 아니었던가요?”

“정확히는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 보자고 그랬지.”

“…….”

시엔의 말에 얼굴 없는 자가 황당하다는 듯 얼굴에 덧씌운 마스크를 벗는다.

그러자 직전까지 마스크 속에서 들린 남자의 목소리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차갑고 기품 서린 여성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베네토 도둑 길드의 13대 시프 마스터, 모니카 써틴이 경애하는 밤을 걷는 분을 뵙습니다.”

“다시 봐서 기쁘지?”

“기뻐서 눈물이 날 것 같네요.”

시프 마스터 모니카가 남의 일처럼 말을 잇는다.

“그래서, 오늘은 또 뭘 도둑놈처럼 떼먹으러 오셨는지.”

“아주 손님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네.”

“손님이라고요?”

“그래, 맡길 일이 좀 있어서 왔거든.”

모니카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되물었고 시엔이 대답했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비밀은 확실하게. 그게 너희 베네토 길드의 캐치프레이즈였지?”

“아, 그야 말씀하시는 대로입니다.”

어느새 어릿광대 마스크를 쓴 능청스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도시에 퍼뜨려줄 소문이 하나 있어.”

“무슨 소문이죠?”

“내가 서펀트 가문의 영애, 레이디 마린과 눈 맞아서 밀회 중이란 소문. 그리고…….”

시엔의 말에 얼굴 없는 자에게 그답지 않은 당혹과 동요가 깃들었다.

“그녀에게 약혼을 제의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것도 이미 샤를마뉴 왕가와의 혼담이 확정된 서펀트 가의 영애에게 말이지요.”

“그래, 잘 아는 모양이네.”

“이 도시에는 모르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걸요.”

애초에 공화국 전체가 발칵 뒤집혀 있는 그 내용을 천하의 시프 마스터가 모를 리 없다.

“그나저나 설마 진짜로 서펀트 가의 영애와 눈이라도 맞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

시엔이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보일 필요는 있지.”

“아하.”

얼굴 없는 자 역시 이내 시엔의 저의를 이해했다.

“애절한 러브스토리로 최소한의 명분과 구색을 갖추려는 거네요.”

“그거야 네 상상이고.”

“뭐, 그쯤이야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그나저나…….”

얼굴 없는 자가 능청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을 잇는다.

“세상 누구보다 진실을 가치 있게 여기시는 ‘밤을 걷는 분’께서, 설마 그런 거짓된 소문을 퍼뜨리길 바라실 줄이야.”

“누가 헛소문이래?”

그러나 남자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엔이 입을 열었다.

“이제 들어와도 돼, 마린.”

“─.”

격식을 차리지 않는 스스럼없는 호칭. 능청스럽게 웃고 있던 얼굴 없는 자의 웃음기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비록 마스크 뒤에 가려진 얼굴을 볼 수는 없었으나.

“응, 시엔.”

시엔의 뒤를 이어 로브로 정체를 가린, 척 보아도 귀족 가문의 영애가 틀림없는 ‘밀회용 복장’ 차림의 레이디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도시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자의 저택에.

“……망했네.”

그 모습에 태평을 유지하고 있던 얼굴 없는 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 나라와 샤를마뉴 왕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태풍의 눈’들과 이렇게까지 깊게 엮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겠지.

“흠, 저는 아무것도 못 봤답니다.”

그렇기에 얼굴 없는 자가 시치미를 떼며 말을 잇는다.

“여기 계시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돈 시엔도, 서펀트 가문의 돈나 마린도, 하물며 두 사람의 밀회는 더더욱 말이죠.”

“그래, 알겠으니까 자리 좀 비켜줄래?”

시엔이 말했다.

“지금부터 ‘헛소문’을 사실로 바꿀 예정이라서.”

“……보고 싶었어, 시엔.”

레이디 마린 역시 걸친 후드를 들추고 생긋 수줍게 미소 짓는다. 시엔이 앉은 소파 옆자리에 달라붙듯 걸터앉으며.

“흠, 살다 살다 자기 집에서 쫓겨나는 일도 다 겪어보네요.”

“누가 저택을 나가래? 방에서 나가라고 했지.”

그렇게 말하며 시엔이 품에서 무엇을 꺼내 내밀었다. 그것이 공화국 국영은행장, 샤일록 디 메디치의 서명이 찍혀 있는 공식 어음이란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참고로 이 일을 맡아주는 착수금이다.”

“흠, 염려 마시길. 아무리 저라도 두 분의 사랑을 방해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아서 말이죠.”

어음을 받자마자 방금까지 보여준 당혹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얼굴 없는 자가 미소 짓는다.

“게다가 이렇게나 아름답고 비밀스러운 사랑의 이야기라니, 어디 대나무밭에 들러서 참새처럼 지저귀지 않고는 입이 못 배기겠네요.”

입가가 쭉 찢어진 어릿광대 마스크 뒤에서.

“이야기가 빨라서 좋네. 실컷 떠벌리고 다녀라.”

“그럼 눈치 없는 미천한 장물아비는 이쯤에서 사라져드릴 테니, 부디 느긋이 이야기 나누시길.”

과장스럽게 예를 표하며 시프 마스터가 물러났고, 어느덧 방에는 시엔과 마린 두 사람이 남겨졌다.

“감시하는 기척은 없어.”

“……저 사람, 신뢰할 수 있는 자야?”

“그래.”

의심스러운 듯한 마린의 물음에 시엔이 대답했다.

“베네토 도둑 길드는 사실상 우리 가문의 영향력 아래 있으니까.”

“이 나라에서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영향력이 없는 걸 찾는 게 더 빠르겠지.”

마린이 질렸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속셈이야?”

“뭐가?”

“이런 가짜 정보를 퍼뜨려봐야 장작에 불을 지피는 꼴밖에 되지 않잖아. 가문 사람들이 믿어줄 리도 없고, 설령 믿어준다 쳐도─”

“뭘 믿고 말아? 전부 사실이잖아.”

“……뭐?”

“나는 그들에게 진실을 퍼뜨리라고 부탁했을 뿐이야. 오늘 밤 우리의 ‘밀회’를 포함해서 말이지.”

시엔이 태평하게 탁자 위의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아마 모레쯤 지나고 나서는, 도시 사람들 모두가 그날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될걸?”

“그, 그날 우리 사이의 일이라니─ 무슨 말이야?”

마린의 물음에 시엔이 입을 열었다.

“너, 나랑 결혼 못 하느니 차라리 같이 죽어버리겠다며.”

“──?!”

당혹과 함께 얼굴이 새빨개지는 마린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엔이 말을 잇는다.

“내가 없는 말이라도 지어냈냐?”

“자, 잠깐! 너 정확히 그 사람에게 퍼뜨리란 소문의 내용이 뭐야?!”

“흠, 어디 보자……. 샤를마뉴 왕국의 버터처럼 느끼하고 구역질 나는 왕자랑 결혼할 바에야 죽는 게 낫다고 했지.”

시엔이 차를 홀짝이며 태평하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는 둘이 같이 몰래 밤바다로 향했고, 거기서 나랑 같이 하늘을 올려다봤었지. 뭐랬나, 여기서 보는 밤하늘이 좋다고 했었던가?”

“……?!”

‘여기서 올려다보는 밤하늘이 좋아.’

‘지상에서는 말이야, 아무리 별이 쏟아져도 세상이 빛나지 않거든.’

“그리고 나랑 결혼하지 못할 바에야, 이대로 함께 사역마에게 삼켜지겠다고 그랬지.”

“그, 그 이야기를 전부 떠벌린 거야……?!”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마린이 경악하며 되물었다.

“뭐, 그래도 네가 발가벗고 있었다는 얘기는 생략해 줬으니 고마운 줄 알아라.”

“?!”

시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동시에 그 이야기는 결코 허구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도 별과 단검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지. 널 신부로 맞겠다고 말이야.”

“……!”

“따라서 나는 사람들이 떠드는 이 이야기를, 또다시 가문의 문장(紋章) 아래 전부 사실이라고 고백할 거야.”

나이트워커 가문이 갖는 절대적 신뢰의 상징.

바로 그 별과 단검의 이름이 갖는 의미를, 이 대륙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시엔의 말처럼 그것은 무엇 하나 과장되지 않은, 심지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사실이 꼭 진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까.”

새빨개진 얼굴 속에서 비로소 마린이 숨을 삼켰다. 시엔의 말에 담겨 있는 무게를 깨닫고.

“딱히 너희 가문의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야.”

그저 좋은 이야기는, 그중에서도 특히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그 자체로 어떤 그럴싸한 명분보다 강력한 명분이 된다.

동시에 이 세계는 명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할 호소력이 필요할 뿐이지.”

“전부…… 네 생각이야?”

“그래.”

시엔이 대답했다. 귀까지 붉어진 마린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녀답지 않게 다소 작아지는 목소리로.

“……고마워.”

“그럴 필요 없어.”

시엔이 짐짓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부터 그런 거래였으니까.”

가문과 가족을 위해 시엔 나이트워커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아무 대가도 없이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은 머메이드의 손에 화답해줄 정도로 좋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 응. 그런 거래였지.”

“왜?”

“아, 아무것도 아니야.”

마린이 소심하게 말을 흐렸다. 그렇기에 시엔이 황당해서 중얼거렸다.

“물 위에서 봤을 때랑 아주 딴사람이네.”

“어쩔 수 없잖아!”

다시금 귀밑을 새빨갛게 붉히며 마린이 대답했다.

“우, 우리는 물 밖에서 무능하니까…….”

* * *

그날 새벽. 총독궁 내의 어느 비밀스러운 일실.

그러나 일찍이 10인 위원회의 방이라 불렸던 그곳에는, 평소와 달리 오직 두 명의 지배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나요?”

“그럴 리가요, 경애하는 공작 각하.”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차가운 목소리. 그 목소리 앞에서는 설령 이 나라의 일각을 떠받치는 그 남자조차 나직이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앞서서 육지 위에 두 발을 딛고 있던 머메이드와 마찬가지로, 물 밖에 있는 그 남자는 무능하니까.

아니, 설령 저 괴물 앞에서는 물 위라고 해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제독의 말이 진실하기를 바랄 뿐이랍니다.”

라파엘로 제독 앞에서 이 나라의 진정한 지배자,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인간의 마음을 읽는 데 능숙하다. 그저 거짓말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따위를 알아내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다. 라파엘로 제독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 라일라 나이트워커 앞에서는 오직 진실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그저 동생이 나이트워커 가문에 부린 억지를 들었을 때, 솔직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어째서죠?”

“솔직히 저도 그 결혼이 썩 내키지는 않았거든요.”

“여동생의 거취 하나 자기 뜻대로 결정할 수 없는 허수아비 가주라니.”

라파엘로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물 위에서나 밖에서나, 무능하기는 똑같았던 모양입니다.”

“제독답지 않네요.”

“알다시피 우리 종족의 운명은, 자기 손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그답지 않은 의기소침한 말.

“인간이라고 다를 것 같나요?”

라일라가 우스운 듯 되물었다.

“세상에 자기 뜻대로 자기 운명을 결정 지을 존재 따위는 없답니다.”

“아, 경애하는 위원장님의 훈계 잘 들었습니다.”

라파엘로가 비아냥거리며 말을 잇는다.

“앞으로 인간의 운명을 왈가왈부할 때는, 이쪽이나 그쪽이나 피차 엿 같다는 걸 유의하도록 하죠.”

“그런데도 제 아들은, 제독이 손가락이나 빨며 지켜보고 있는 그 아이를 바라지 않는 운명에서 구해주려 하고 있죠.”

“이야, 꼭 동화 속 왕자님처럼 들리네요.”

라파엘로가 재차 비아냥거렸다. 마치 눈앞의 이종족 따위는 결코 자신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늠름하신 왕자님을 두셔서 참 자랑스럽겠습니다, 여왕 폐하.”

“유감스럽게도 제 아들은 왕자가 아니고, 저 역시 여왕이 아니지요.”

“그럼 뭡니까?”

라일라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암살자.”

* * *

그로부터 얼마 후, 샤를마뉴 왕국.

“오오, 내 사랑!”

3왕자 ‘에릭 샤를’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는 기분이었다.

“뭣들 하고 있느냐! 당장 이 몸의 검과 갑주를 가져오지 않고!”

“와, 왕자님? 겁과 갑주라니, 그게 무슨…….”

“내 사랑, 레이디 마린을 구하러 갈 것이다!”

3왕자 에릭이 소리를 높였다. 늠름한 사각턱 위로 새하얗게 빛나는 치아를 씨익 과시하며.

“저 사악하기 짝이 없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악당 놈들에게서!”

사랑하는 공주가 마왕의 성에 사로잡혔다는 소식이라도 들은 용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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