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52화 (52/200)

52화. 전쟁과 평화

서펀트 가문의 영역은 대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공식적으로 공화국을 지배하는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마땅히 그들의 ‘영지’를 소유하고 있다.

베네토 공화국 남부의 시실리아 섬.

사방이 바다와 암초로 가로막혀 있는 천혜의 대지. 서펀트 가문의 허락 없이는 결코 발을 들일 수도 없고 나갈 수조차 없는 고립된 영지, 서펀트 후작령.

“이야, 이것 참.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요.”

순백의 코트에 바다처럼 새파란 머리카락의 미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천하의 밤을 걷는 분들께서, 이 누추한 섬까지 행차하실 줄이야.”

평소에는 좀처럼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그들 가문의 성채에, 뜻밖의 얼굴들이 발을 딛고 있었다.

“여전하시네요, 라파엘로 제독.”

가주 라일라와 시엔을 비롯한 나이트워커 가문의 두 모자.

“경애하는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 그리고 돈 시엔을 뵙습니다.”

“레이디 마린.”

두 사람을 맞이하는 서펀트 가문의 젊은 가주와 여동생, 그 외에도 적잖은 가문의 인간들이 두 발로 모습을 드러냈다.

“참으로 격조했소이다, 나이트워커 공작.”

아울러 그들 역시 그곳에 있었다.

“정정해 보이셔서 다행이네요, 돈 우르슬라크.”

머리카락은 진즉에 다 벗겨졌고, 주름진 살가죽이 뼈에 늘어지듯 겨우 달라붙어 있는 남자였다.

“농담도 지나치구려, 돈나 라일라.”

그야말로 죽기 직전의 형상이란 말로밖에는 형용할 수 없는 몰골.

그럼에도 눈앞의 남자는, 바로 그 생의 끄트머리를 집요하게 붙잡고 늘어지며 상상할 수 없는 세월에 걸쳐 서펀트 가문을 지배해온 노괴(老怪)였다.

돈 우르슬라크를 비롯해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 예외가 아니었다. 하나같이 등이 굽을 대로 굽어 주름이 자글자글하며, 미라처럼 앙상하기 짝이 없는 아홉 명의 노괴들.

“경애하는 서펀트 가문 원로회, 히드라(Hydra)의 아홉 어르신들을 뵙습니다.”

머리가 아홉 개 달린 신화 속의 뱀, 히드라.

“경애하는 암살자들의 어머니, 나이트워커 공작을 뵙소.”

* * *

공식적으로 하나의 가문을 지배하는 것은 가주의 몫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이 나라를 지배하는 ‘총독’이란 직함이 허울에 지나지 않듯, 서펀트 가문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지금 시엔과 라일라 앞에 있는 그들이야말로, 서펀트 가문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진짜 지배자들이다.

성내의 회담장.

돌담을 쌓아 올린 실내에서도 바닷바람 냄새,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아스라하다.

“길게 말하지 않겠어요.”

창문 너머로 부서지는 파도와 물결을 내려다보며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레이디 마린과 샤를마뉴 왕국 3왕자, 에릭 샤를과의 혼담을 물려주세요.”

“…….”

“그리고 우리 가문의 제의를 받아들이세요.”

성내의 회담용 테이블에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는다.

“유감스럽게도 그럴 수는 없소.”

정적 끝에 원로회의 수장, 우르슬라크가 대답했다.

“이쪽이야말로 길게 말하지 않지. 당장 돈 시엔의 약혼 제의를 물리시오.”

머리 아홉 개 달린 신화 속의 뱀, 히드라의 이름을 자처하는 원로회의 머리들이 잇달아 말을 잇는다.

“그 아이는 ‘서펀트 가문의 여자’로서, 우리 가문의 핏줄과 영향력을 널리 퍼뜨려야 할 의무가 있다오.”

그 말에 동석하고 있던 마린의 표정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할아버님, 저는……!”

“입을 다물어라.”

마린이 입을 열 틈도 없이, 히드라의 아홉 머리를 자처하는 원로 하나가 대답했다.

“이것은 너 같은 계집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왜 아닙니까?”

“!”

그런 그를 향해 시엔이 되물었다. 너무나 당돌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로.

“그녀, 레이디 마린은 바로 이 혼담의 당사자입니다. 그런 당사자의 의지를 무시하고 무슨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겁니까?”

“계집이 어찌 감히 가문의 정사에 끼어들 수 있겠소.”

서펀트 가문의 원로 하나가 말했다. 그 말에 시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계집이 가문의 일에 끼어드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까?”

너무나도 황당해서 그저 웃음을 터뜨릴 뿐이다.

“아, 그것참 가슴 아픈 말씀이네요.”

시엔의 곁에 있는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역시 마찬가지로 웃음을 터뜨린다.

“……나이트워커 가문과는 경우가 다르지 않소.”

“뭐, 그렇다고 치죠.”

뒤늦게 히드라의 원로가 진땀을 빼며 상황을 수습했다. 라일라는 개의치 않고 말을 잇는다.

“그나저나 참 이상하네요.”

“뭐가 이상하지?”

“인간의 아이를 가진 머메이드는 인간이 되죠.”

라일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잇는다. 그 말에 마린의 표정 위로 더더욱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런데 인간이 된 레이디 마린과 샤를 왕자 사이의 아이에게,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괴물’이 무슨 수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거죠?”

“…….”

“나이트워커 공작, 우리는 그대들의 무례와 전횡을 참을 대로 참아왔소.”

바로 그때였다.

히드라의 수장, 돈 우르슬라크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별과 단검의 이름을 내걸었다고 해서, 그대들의 억지가 전부 정당화될 거란 착각은 버리시오.”

눈앞에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정점, 암살자들의 어머니 앞에서도 결코 주눅 들지 않고.

“땅 위의 인간들에게 그런 유치한 겁박이 얼마나 통했는지는 몰라도, 여기서는 아니란 걸 알아둬야 할 거요.”

우르슬라크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무사히 살아서 이 섬을 빠져나가고 싶거든 말이지.”

이곳 시실리아 섬은 비록 육지라 해도 그들 서펀트 가문의 영지다. 그들의 허락 없이는 들어올 수 없고 나갈 수도 없다.

여기는 문자 그대로 그들의 영역이었던 까닭에.

“무사히 살아서─라.”

하물며 이미 들어와 버린 이상에는 더더욱 그렇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듯하네요.”

“무슨 오해지?”

라일라가 능청스럽게 미소 짓는다.

“저는 어디까지나 평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기꺼이 이 자리에 왔답니다.”

“평화라!”

그 말에 우르슬라크가 코웃음을 친다. 정말로 황당해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그 순간,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바닷물이 넘실거리며 그들이 있는 실내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대들은 늘 별과 단검의 이름 아래 횡포를 부리고, 적들에게 타협과 평화를 강요하지.”

“전쟁보다는 평화가 나은 법이니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세상에 평화처럼 소중한 게 또 어디 있겠어요?”

라일라가 태평하게 대답했고, 우르슬라크의 표정이 더더욱 차갑게 일그러졌다.

“전쟁과 평화, 그게 네놈들 가문의 방식이지.”

히드라의 수괴, 우르슬라크가 말했다.

“나이트워커 가문과 전쟁을 벌이느니, 차라리 자신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비위를 맞춰주는 쪽이 낫다고 말이야.”

“물론이죠. 말했듯이 저는 전쟁을 싫어하거든요.”

라일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자신들이 당사자가 되어 치르는 전쟁을.

“그렇게 나이트워커 가문이 적들에게 비겁한 평화와 항복을 강요하며 지금껏 손에 넣은 것들을 내가 모를 것 같나?”

우르슬라크가 되물었다.

“그대의 적들이 그대 가문의 비위를 맞추고 요구를 들어주며─ 전쟁보다 평화가 낫다는 타협 속에서 굴복을 거듭하며 기어코 전부를 빼앗기는 모습을, 나는 이 나라의 역사와 함께 보아왔다.”

진실로 하나의 가문을 이끄는 수장에 걸맞은 위엄을 지니고.

“역사가 나에게 가르쳐줬지.”

전쟁과 평화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그대가 제의하는 것은, 평화란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항복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렇게 나이트워커 가문의 적들이 하나둘씩 타협하고 평화를 택하며 물러설 때마다, 비로소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장소까지 물러서게 됐을 때.

나이트워커 가문은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적에게 더 이상 ‘평화’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이 바란 것은 처음부터 평화가 아니었으니까.

“참으로 지혜롭기도 하셔라.”

라일라가 차갑게 웃는다. 소름이 끼칠 것 같은 미소였다.

“정말이지, 돈 우르슬라크에게는 당해낼 수가 없네요.”

“우리 가문은 비겁한 평화를 택하지 않을 것이오. 설령 전부를 잃더라도.”

그것이 진짜 평화를 지키는 길이기에.

“그럼 마지막으로 묻죠.”

우르슬라크의 말에 라일라가 재차 되물었다.

“전쟁과 평화, 어느 쪽이지요?”

“전쟁이다.”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의 여유도 미소도 찾아볼 수 없는, 차갑고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그것이 정녕 원로회의 뜻입니까?”

“두말할 것도 없는 이야기지. 우리는 싸울 테니까.”

돈 우르슬라크가 대답했다. 일말의 주저도 망설임도 없는 각오를 다지고.

“아무래도 제 뜻을 잘못 이해하신 듯하네요.”

“뭐라고?”

“제가 물은 것은 어디까지나 서펀트 가문의 원로회─ 아홉 머리 히드라의 총의랍니다.”

그렇게 말하며 라일라의 입꼬리가 차갑게 뒤틀렸다.

“당신 하나가 아니라.”

“─.”

일순, 우르슬라크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린다. 얼굴의 핏기가 가시고 창백해진 얼굴로 숨을 삼켰다.

머리 아홉 개 달린 신화 속의 뱀, 히드라의 이름을 자처하는 원로회의 아홉 명.

“대체 어느 틈에─”

그런데 그들 중 ‘하나의 머리’를 제외한 어느 머리도…… 손을 들지 않았다.

“아, 역시나.”

침묵 속에서 아무도 거수하지 않았다. 그저 얼어붙을 것 같은 침묵이 이어질 뿐이었다.

“아무래도 아홉 머리 뱀 전체의 대의(代議)는 전쟁보다 ‘평화’가 낫다고 말씀하시는 듯하네요.”

라일라가 뱀처럼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키득거렸다.

“봐요, 평화로우니까 얼마나 좋아요?”

우르슬라크의 손발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이나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자, 그럼 이 나라의 자랑스러운 전통…… 공화주의적 이념에 따라 평화롭게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라일라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돈 우르슬라크 하나가 아니라, 아홉 명의 원로 모두에게.

“지금 이 자리에서, 어리석은 전쟁광의 머리 하나를 자르고 새 머리를 붙이는 데 동의하시는 분?”

여덟 명의 원로가 일제히 거수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공화주의였다.

“네놈들이 기어코…….”

“세상에 평화를 얻는 방법이 꼭 전쟁밖에 없는 것은 아니랍니다.”

라일라가 말했다.

아울러 그것이야말로 나이트워커 가문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대의 말처럼 별과 단검은 저울질이나 하며 타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지요, 돈 우르슬라크.”

그렇기에 라일라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알기 쉬운 미소도 무엇도 없이.

“우리는 이미 약속을 했고, 이 약속을 진실로 이루기 위해 기꺼이 ‘어떤 출혈’도 감내할 각오가 되어 있답니다.”

그 말대로 전쟁과 평화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나이트워커 가문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동시에 이것이 바로 그들이 평화를 손에 넣는 법이었다.

매수, 모략…….

“이, 이 빌어먹을 배신자 놈들이!”

끝으로 암살.

촤아악!

깨닫고 보니 우르슬라크의 몸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당기면 풀리는 매듭을 푸는 것처럼, 생물의 형태를 엮고 있는 이음새가 너무나도 덧없이 풀려나갔다.

툭.

잘린 목이 공허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제야 침묵하고 있던 라파엘로 제독이 몸을 일으켰다.

“이것으로 나이트워커 가문과의 약속은 지켜질 겁니다, 경애하는 어르신들.”

서펀트 가문의 젊고 야망 넘치는 가주이자, 라일라와 ‘히드라의 나머지 여덟 머리’를 이어준 매수와 모략의 당사자.

“저와의 약속 역시도 말이지요.”

이제는 공백이 된 아홉 머리 뱀의 수괴(首魁)를 차지하게 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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