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53화 (53/200)

53화. 불완전한 존재 (1)

“자, 당장 덤벼라! 나이트워커 가문의 시엔!”

겁 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나, 샤를의 에릭! 왕자이기 이전에 명예로운 기사이며, 기사이기 이전에 남자로서! 나이트워커 가문의 시엔에게 당당하게 내 사랑 ‘레이디 마린’을 걸고 결투를 신청하겠노라!”

“……실로 송구합니다, 왕자 저하.”

남자의 말에 그림자 기사단장 하이드 경이 정중히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유감스럽게도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와 돈 시엔께서는 지금 부재중이십니다.”

느닷없는 방문객의 등장에도 당황하지 않고 담담히.

“흥, 이 몸이 겁나서 꼬리를 말고 도망쳤나!”

3왕자 에릭이 씩 웃으며 소리쳤다. 늠름한 사각턱 위로 새하얗게 빛나는 치아를 과시하며.

“그래서,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 * *

그날 새벽.

“며칠 내로 샤를마뉴 왕국 3왕자가 수도 베네토에 행차할 예정입니다.”

“의전(儀典)의 수준은 어느 정도죠?”

“높지 않습니다. 의전 서열로는 15위 정도입니다.”

“15위라고요?”

그녀의 눈과 귀, 그림자 기사의 보고를 들은 라일라가 다소 의외란 듯 눈을 끔벅거렸다.

공식적으로 왕자의 의전 서열은 3위. 사실상 움직이는 시점에서 대륙이 떠들썩할 정도의 소란을 몰고 일으켜야 정상이다. 그런데 서열 15위 수준의 의전이란 것은 사실상 일개 중소 귀족의 행차나 다를 바 없는 규모다.

“아무래도 3왕자가 왕실의 뜻을 무시하고 멋대로 일을 벌였다는 듯합니다. 듣자 하니, 시엔 공에게 대전사조차 없이 직접 결투를 신청하겠다고─”

“대전사조차 없이 직접?”

“차라리 잘됐네요.”

그 말에 침묵하고 있던 시엔이 입을 열었다.

“성대하게 왕자님을 맞이하고, 결투에 응하도록 하지요.”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었으니까.

“이 나라 사람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 * *

이 대륙의 귀족들은 대접받는 데 익숙하다. 하물며 왕족쯤 되는 자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에게 있어 대접이란 사실상 엎드려 절받기나 다름없는 의례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베네토 공화국의 대접은 그렇지 않았다.

온갖 호사를 누릴 대로 누렸다고 생각하는 이들조차 입을 쩍 벌리고 경이를 감추지 못할 부와 사치, 그게 바로 이 나라의 힘이다.

“경애하는 샤를마뉴 왕국의 3왕자, 에릭 샤를 저하를 뵙습니다!”

공식적으로 이 나라를 지배하는 총독과 대평의회의 이들이 금나팔 의장대와 함께 예를 갖추고 남자를 맞이했다.

“오, 오오……. 설마 이 몸을 이렇게까지 환대해줄 줄이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돈 에릭.”

차례대로 왕자를 맞이하는 행렬 속에서 시엔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시엔입니다.”

“시엔 나이트워커!”

그 모습을 보자마자 그렇지 않아도 각이 진 에릭의 사각턱이 베일 것처럼 시퍼런 서슬을 내뿜었다.

“저에게 용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베네토 공화국의 심장, 수도 베네토의 대광장(La Gran Piazza). 도무지 일개 왕자를 맞이하는 규모라 생각할 수 없는, 사실상 도시 사람들 모두가 지켜보는 바로 그곳에서 시엔이 말했다.

“암, 그렇고말고!”

아무리 서열이 높지 않은 의전이라 해도 어쨌든 왕자의 행차다. 왕자를 수행하는 마스터급 왕실 기사들이 시엔을 보자마자 칼자루 위에 손을 올린다.

그들 앞에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후계자, 그 이름과 악명을 모를 리가 없던 까닭에.

“뭣들 하느냐! 당장 칼집에 올린 손을 내려라!”

“!”

“그리고 들으라!”

바로 그때였다.

“─이 몸, 에릭 샤를은 긍지 높은 샤를마뉴 왕국의 3왕자이니라!”

경계하는 기사들 사이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샤를마뉴 왕국의 3왕자, 에릭 샤를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그러나 왕자이기 이전에, 이 몸은 진실로 명예와 고결함을 추구하는 기사지!”

“아, 그렇군요.”

누가 기사도의 나라 출신 왕족 아니랄까 봐, 시엔이 황당해하며 적당히 맞장구를 친다.

“그러나 기사이기 이전에!”

“이전에?”

“사랑에 빠진 남자다!”

사랑에 빠진 남자, 에릭이 새하얗게 빛나는 치아를 과시하며 말했다.

“이 비열하기 짝이 없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악당 놈아!”

동시에 이 나라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일대에 소름이 끼칠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는다. 그러나 에릭은 개의치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진실로 명예와 고결함을 좇는 기사이고 남자였으니까.

“네놈이 비겁하게 내 사랑 레이디 마린에게 ‘수작’을 부린 것쯤은 진즉에 알고 있다!”

“수작이라니, 무슨 수작 말입니까?”

시엔이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레이디 마린은 날 사랑하고 서로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그런 내 사랑이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꿨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

“나는 누구보다도 그녀의 진실한 사랑을 알고 있다! 내 사랑, 레이디 마린의 사랑을 말이지!”

시엔이 황당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네놈은 내게서 레이디 마린을 빼앗아갔다!”

‘특히 그 버터처럼 느끼하고 구역질 나는 왕자랑 맺어질 바에야, 차라리 물거품이 되는 게 나아.’

딱히 마린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눈앞의 왕자를 위해서라도 기억하는 그 말을 애써 가슴속에 묻으며.

“그렇기에 나는 긍지 높은 왕자이자 명예로운 기사로서! 끝으로 진정한 남자로서! 네놈, 나이트워커 가문의 악당을 심판하러 기꺼이 이곳까지 왔노라!”

“어, 음. 아무래도 오해가 있으신 듯하네요.”

“오해라고? 무슨 오해지?”

“그녀, 레이디 마린은 절 사랑합니다.”

시엔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막상 입으로 내뱉고 나니 다소 부끄러운 그 말을.

“진심으로 말이죠.”

“그럼 어째서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지?”

“그녀는 땅 위에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시엔이 악당처럼 비열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적어도 에릭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내 사랑, 레이디 마린의 입을 통해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네놈의 말을 믿을 수 없다!”

“뭐, 믿고 말고는 왕자님의 자유지요.”

시엔 역시 물러서지 않고 미소 짓는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이디 마린의 입으로 직접 대답을 들을 것이다.”

에릭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전에 가로막는 네놈, 나이트워커 가문의 악당을 쓰러뜨릴 것이다!”

“아하.”

손에 끼고 있는 흑색의 가죽 장갑을 벗더니, 시엔을 향해 투척하며.

귀족들의 세계에서 그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하나였다.

결투 신청.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말입니까?”

“지금 바로, 이 자리가 아니어야 할 이유가 있느냐?”

에릭이 되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스릉.

심지어 왕자 곁을 지키는 기사들이 제지할 틈조차 없이, 왕자가 시엔의 눈앞에서 검을 뽑았다.

“이 몸의 결투 신청 앞에서 비겁하게 꼬리를 말고 도망칠 셈이냐?”

“아니, 딱히 도망칠 생각은 없는데…….”

“그럼 결투다!”

시엔이 뭐라 대답할 틈조차 없었다. 그저 이쪽에서 제대로 된 도발을 하기도 전에, 설마 이렇게나 손쉽게 응해줄 줄 몰랐던 까닭에 당황했을 뿐.

왕자가 소리를 높였다.

“내 사랑, 레이디 마린을 걸고 남자답게 대결해라!”

“…….”

레이디의 사랑을 놓고 펼치는 두 기사(?)의 결투.

그럼에도 광장 일대에서는 처음부터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자리가 준비되기 시작했다.

“흠, 그나저나.”

콜로세움처럼 물러나 있는 사람들의 물결을 뒤로하고, 그곳에 세워진 결투의 장(場) 위에서 시엔이 말했다.

“왕실 가문의 지체 높은 왕자님으로 태어나, 평생을 온실 속 화초로 애지중지하며 살아온 에릭 왕자님께서─”

바보라도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정도의 도발을.

“정말로 목숨을 걸고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와 싸울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훗.”

그 말에 에릭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온실 속의 화초라, 맞는 말이로다.”

웃고 나서는 달리 부정하지도 않고 말을 잇는다.

“이 몸, 에릭 샤를은 온실 속 화초다.”

“…….”

“네 말처럼 세상의 풍파를 알지 못하고, 굶주림을 알지 못하며, 평생을 고개를 조아리는 이들 속에서 애지중지, 오냐오냐하며 자라왔지!”

뜻밖의 말에 시엔이 당황해서 눈동자를 끔벅거린다.

“그래서 그것이 어쨌다는 말이냐?”

“……예?”

“이 몸이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랐다는 이유 하나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와는 싸우지 못하리란 법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니 뭐, 딱히 하지 말란 법은 없죠.”

그저 개죽음이 될 뿐이지.

“그렇도다!”

뒷말을 삼키는 시엔에 아랑곳하지 않고 에릭이 말을 잇는다. 그의 늠름하기 이를 데 없는 사각턱과 치아를 씩 빛내며.

“그깟 출신 따위, 나와 레이디 마린의 사랑 앞에서 아무런 장애조차 될 수 없다!”

‘아니, 보통 거꾸로잖아…….’

“자, 냉큼 검을 뽑아라!”

에릭이 소리쳤다. 그렇기에 시엔 역시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스릉.

마찬가지로 소맷자락 속에 숨겨진 칠흑의 칼날을 드러낼 뿐.

“품속에서 칼날을 드러내다니!”

“달리 문제라도 있으신지.”

“아니! 실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악당다운 비열함에 놀랐을 뿐이다!”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에릭 왕자님.”

시엔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악당처럼 비열하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 적어도 에릭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미소였다.

그대로 거리가 좁혀졌다.

스릉.

이윽고 시엔의 칼끝이 왕자의 머리를 향해 겨누어지고 나서도, 눈앞의 상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눈동자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훗.”

심지어 칼끝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여유롭게 웃을 뿐이다.

‘……뭐지?’

믿기 힘들 정도로 대범하다.

‘앞서 보여준 여유가 마냥 허세가 아니었나?’

첫 공격에 숨통을 끊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던 것일까.

“네놈의 패배다, 시엔 나이트워커.”

“……?”

“그리고 내 승리지!”

“?”

이어지는 말에 시엔이 황당해서 눈을 끔벅거린다.

“레이디의 사랑을 놓고 벌이는 정정당당한 결투에서 비겁하게 기습을 벌이다니, 기사도의 정신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더냐!”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

“이의는 내 법무관(法務官)에게 주장하라! 법무관!”

“예, 왕자님!”

왕자가 말을 마치자마자 불쑥 그를 보좌하고 있던 수행원 하나가 끼어들었다.

“왕국 법전과 대륙 관습법에 따라 결투 재판에 관해 합의된 바, 양측의 동의로 결투가 시작하고 ‘기습’을 가하는 것은 결투법과 기사도 정신에 심대하게 위배되는 실격 행위로서! 기습의 정의는 상대가 대응할 수 없는 속도의 공격이 급소에 비겁하게 이르는 치명 행위를 말하며─!”

“…….”

“아울러 해당 결투법이 왕국뿐 아니라 대륙 전역에 걸쳐 널리 성문(成文)화된 관습법이란 점! 에릭 저하께서는 샤를마뉴 왕국의 왕자로 외교적 협정에 따라 타국 영토에서 치외법이 적용되는 지위를 가졌다는 점!”

시엔이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법무관이 당당하게 말을 잇는다.

“……이하의 법령과 논증에 의거, 본 결투의 승리자는 에릭 샤를 저하임을 엄숙히 공표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귀하의 개소리…… 아니, 까다로운 법리적 해석에 대해서는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냉기 어린 조소를 담아 말을 잇는다.

“마침 저도 법을 좀 알죠.”

담담하게 손에 들린 칼자루를 고쳐 잡으며.

“좋다!”

그 말에 에릭이 기다렸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그럼 정정당당하게 ‘결투’를 통해 어느 쪽의 법적 주장이 옳은지, 하느님 앞에서 가리도록 하지!”

돌고 돌아 또다시 결투다.

그러나 결투의 양상 자체는 그렇지 않았다.

다시 싸우는 것은 왕자의 몫이 아니었다.

“나는 내 충성스러운 신하, 법무관을 위해 기꺼이 친히 그에게 ‘대전사’를 붙여주도록 하겠다!”

대전사, 결투에서 직접 싸울 수 없는 약자를 위해 대신해 결투를 수행하는 자.

“오오, 왕자님의 자비에 감복할 뿐입니다!”

“……제가 나서지요, 왕자님.”

왕자를 수행하는 이들 속에서, 홀로 로브를 두르며 정체를 숨기고 있던 그림자가 앞으로 나섰다.

로브 밑으로 슬쩍 엿보이는 얼굴이 낯이 익다.

인간과 뱀파이어의 하프, 시체처럼 희고 창백한 피부의 여기사였다.

샤를마뉴의 12기사…… 「창백한 백합」 테레지아 경.

씨익.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는 동시에 에릭 왕자가 비열하게 미소 짓는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그 낯짝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 우스꽝스러운 무대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왕자의 독단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눈앞의 왕자는 그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처음부터 머릿속이 기사도와 꽃밭으로 가득 찬 멍청이를 조종하는 자는 달리 있었으니까.

‘로젤리아 샤를.’

백성을 사랑하는 착하고 마음씨 고운 공주님이자,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야심가.

‘과연, 그런 거였나.’

오히려 그렇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우스꽝스러운 무대에서 그녀가 무엇을 바라는지, 또 시엔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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