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54화 (54/200)

54화. 불완전한 존재 (2)

샤를마뉴의 12기사 중 하나이자 인간과 뱀파이어의 하프.

‘얼마 전에는 내 손으로 롤랑 경을 죽여달라더니, 나와의 결투에 자기 기사를 대전사로 내보내?’

로젤리아 샤를과 마찬가지로 테레지아 경은 알기 쉬운 기사가 아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기사도도 없고 꽃밭도 펼쳐져 있지 않다.

그와 동시에 12기사 내에서도 롤랑에 이어 2위, 3위의 서열을 다투는 최상위급 강자.

그것이 바로 「창백한 백합」 테레지아 경이다.

‘결투를 명분 삼아 날 죽이러 왔나?’

오히려 그녀의 정체성은 로젤리아의 말처럼 암살자에 가깝다.

상상해 보세요. 왕국 최강의 기사들이, 기사가 아니라 암살자가 되어 활약하는 이 나라의 모습을.

생각하고 나서 고개를 젓는다.

‘과연, 그런 거였나.’

젓고 나서 시엔이 대답했다.

“결투를 받아들이죠, 테레지아 경.”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즉답이었다.

심지어 상대는 대륙에서 손꼽는 최강의 기사 전력 중 하나. 아무리 지금의 시엔이라도 순순히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다.

“…….”

그럼에도 순순히 결투를 수락하는 시엔의 대답에, 테레지아 경이 일순 당황해서 눈동자를 끔벅였다. 물론 당황은 길지 않았다.

“「혈식(Blood Eclipse)」.”

테레지아가 읊조렸다. 동시에 머리 위로 쏟아지던 햇빛이 스러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수군거리는 군중들의 모습도 목소리도 보이지 않았다.

‘결계 마법…….’

마법을 쓰는 기사, 이 역시 보통의 기사와는 거리가 멀다.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녀는 보통의 기사도 아니고 하물며 보통의 인간조차 아니므로.

사람과 흡혈귀의 혼혈, 하프 뱀파이어.

“동요하지 않으시네요.”

“내가 왜 동요해야 하지?”

결계 속에서 시엔이 태평하게 되물었다.

“그 말대로입니다.”

테레지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이 결투에서 패배하기 위해 왔으니까요.”

“3왕자를 정치적으로 사망시킬 생각이겠지.”

시엔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이렇게 온갖 억지를 부릴 대로 부려놓고 결투에서 잇달아 패배하는 것. 특히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도의 나라에 있어 그게 얼마나 추하고 수치스러운 행위일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된 이상 왕위 다툼에서 제외되는 것 역시 피할 수 없다.

그렇게 경쟁자가 하나 줄어드는 시점에서, 로젤리아 샤를의 ‘왕위 계승’ 역시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왕자님께서는 제 승리를 의심하지 않고 계시니까요.”

“설마 천하의 12기사가 나 같은 애송이에게 패배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겠지.”

테레지아가 차갑게 미소 짓는다.

“처음부터 3왕자는 로젤리아의 꼬드김에 속아 억지를 부린 거였나.”

“뭐,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럼?”

“저는 당신을 가르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으니까요.”

“……날 가르친다고?”

이어지는 말에 시엔이 황당해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시엔 나이트워커.”

창백한 백합, 테레지아 경이 대답했다.

“로젤리아 공주님과의 약속을 잊지는 않으셨죠.”

롤랑 경을 죽여주세요.

기사도의 나라에 종말을 고하고, 암살자의 나라로 거듭나길 바라는 로젤리아의 음모.

“글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딱히 모르셔도 됩니다.”

시엔이 시치미를 뗐고, 테레지아 역시 그 이상 캐묻지 않고 말을 잇는다.

“그저 저는, 그대의 칼끝이 조금이나마 그에게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드릴 뿐.”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정의로운 기사, 검성 롤랑.

“물론 지금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요.”

“그래, 잘 알고 있네.”

시엔이 말했다.

“그런데 왜 하필 나지?”

그녀의 말마따나 지금의 시엔과 롤랑 경의 사이에는, 조금 과장을 보태 시엔과 라일라 수준의 격차가 있다. 그 격차는 결코 하루아침에 메워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신이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로젤리아 샤를은 누구도 아니고 ‘시엔 나이트워커’의 손에 그가 죽기를 바라고 있다.

“공주님께서는 믿어 의심치 않고 계십니다.”

“뭘 말이지?”

“장차 당신의 손에, 새로운 시대정신이 태어날 거란 사실을.”

“…….”

“시엔 나이트워커가 이 세계에 가지고 올 새로운 가능성을.”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소름 끼치는 통찰에 경외를 느낄 뿐이다.

그리고 그때가 됐을 때, 기사도의 시대가 종지부를 찍고 암살자가 새로운 시대정신의 좌를 대체하게 되었을 때,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존재가 될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엔의 손끝으로 열어버린 새로운 시대가, 정작 그들 가문의 종말을 불러왔으니까.

‘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거다.’

그렇기에 배에 칼을 숨기고 시엔이 입에 꿀을 발라 웃었다.

“흠, 그것참. 황송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네.”

“감사는 나중에 하셔도 됩니다.”

시엔의 말에 칼자루를 고쳐 잡으며 테레지아가 말했다.

“말했듯이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칼끝을 따라 핏빛의 서슬을 덧씌우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그 가능성에 종지부를 찍는 것도 제 역할이니까요.”

샤를마뉴의 12기사, 창백한 백합이 말했다. 거짓도 무엇도 없는 섬뜩한 살기와 함께.

칼끝을 따라 덧씌워진 금빛의 서슬, 오직 인간밖에 사용할 수 없는 인간찬가의 의지…… 오러를 덧씌우며.

“피지 못하는 꽃은 꺾일 뿐입니다.”

“성격 참 비뚤어졌네.”

금색의 오러 블레이드.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간의 증거다.

“죽일 각오로 덤비시죠.”

“죽어도 책임 못 진다.”

그렇기에 시엔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망령의 자세」.”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를 암살자로 있게 해주는 그들의 정체성.

그곳에 있다고 생각했던 시엔의 모습이, 호수 위의 달처럼 흐릿해지며 잔상이 되어 사라졌다.

카앙!

그러나 등 뒤에서 휘둘러지는 일격을, 테레지아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등 뒤로 검을 휘둘러 쳐냈다.

‘강하다.’

샤를마뉴의 12기사(팔라딘).

원탁의 기사단, 철십자 기사단과 함께 대륙 최강의 기사 전력으로 손꼽히는 조직. 하물며 지금 시엔의 눈앞에 있는 여기사는, 바로 그 열두 명 중에서도 롤랑에 이어 두 손가락에 꼽히는 최강자였다.

“「순수의 자세(Innocent Stance)」.”

시엔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카앙!

시엔이 땅을 박차고 검을 휘두를 때마다, 테레지아는 그 자리에 서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검을 쳐내고 있었다.

심지어 두 눈을 완전히 감고서.

“이 자세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글쎄.”

카앙!

“샤를마뉴 왕국에서 어린아이가 기사 수업을 시작할 때 처음 배우는 기초 검식입니다.”

1식의 마스터를 자처하는 시엔의 암살검을, 눈조차 뜨지 않고 쳐내며 담담히 말을 잇는다.

“엄밀히 말해 자세라고 부를 수도 없죠. 베기 · 찌르기 · 막기─ 딱 세 개의 동작밖에 없는, 문자 그대로 검술의 기초를 알려주기 위한 교육용 자세입니다.”

시엔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애초에 베기, 찌르기, 막기로 이루어진 세 동작은 검술을 구성하는 기초이자 최소 단위로서, 부르는 명칭은 달라도 대륙의 어디를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장 시조 카산이 온 동방 대륙에서조차 삼재검법(三才劍法)이란 이름으로 전승이 남아 있으니까.

“그렇게 몇 년 정도, 아침부터 밤까지 찌르고 베고 막는 동작에 숙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검술’을 가르치기 시작하죠.”

카앙!

또다시 사각에서 휘둘러지는 시엔의 칼날이 튕겨 나갔다.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펼치는 동작은 딱 세 가지였다.

정확하게 수직과 수평을 그리는 가로 · 세로베기와 찌르기.

“그런데 롤랑 경께서는…….”

바로 그때였다.

촤악!

오직 세 개의 동작을 이용해 시엔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던 테레지아 경의 등 뒤로, 살이 찢어지고 뼈가 드러날 정도의 커다란 상처가 새겨졌다.

천하의 12기사조차 피할 수 없는 시엔의 일격.

“오직 「순수의 자세」 하나로 왕국 최강의 기사가 됐지.”

“……바로 그겁니다.”

보통 사람은 당장에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치명상이다. 그러나 눈앞의 여기사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란 거지?”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적을 알아야 하니까요.”

뚝, 뚝.

등 뒤로 흐르는 피와 상처를 뒤로하고 테레지아가 대답했다.

“─.”

순간, 공기가 일전했다. 시엔조차 노골적으로 깨달을 수 있을 정도의 박력과 함께.

“인간에게 인간의 방식이 있고, 괴물에게는 괴물의 방식이 있지요.”

동시에 그녀의 칼끝에 휘감겨 있던 금색이, 핏빛을 머금으며 새롭게 서슬을 빛냈다.

핏빛의 오러 블레이드─.

그러나 조금 이상했다.

직전에 보여준 오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하고 불완전하다. 왕국 최강의 기사 조직에 속해 있는 자가 펼치는 오러 블레이드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럼 ‘우리’의 방식은 무엇이죠?”

“우리라고?”

시엔이 대답을 기다릴 틈도 없이, 불완전한 핏빛의 칼날을 고쳐 잡고 테레지아가 쇄도했다.

타앗!

동시에 그 불완전함을 메꾸는 또 하나의 불완전함이 있었다.

하프 뱀파이어.

어릴 적 상대했던 레서 뱀파이어를 떠올렸다. 다 죽어가는 노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괴력.

괴물에게 육체는 애초에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불완전한 뱀파이어의 육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혼과 새벽의 자세(Dusk Till Dawn Stance)」.”

그렇기에 불완전한 인간이자 불완전한 뱀파이어─ 「창백한 백합」 테레지아 경이 읊조렸다.

카앙!

읊조림과 함께 핏빛 서슬이 덧씌워진 혈검이 쇄도했다.

핏빛의 오러 블레이드.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간의 증거였다.

동시에 그녀의 육체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흡혈귀의 괴력이 뿜어져 나왔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세례를 마친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저나 당신이나, 롤랑처럼 순수하고 완전한 인간과는 피차 거리가 멀죠.”

“멀쩡한 사람까지 괴물 취급하네.”

“그게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니까요.”

인간과 뱀파이어의 혼혈, 테레지아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불완전한 존재들의 방식이자…….”

마찬가지로 인간과 괴물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존재를 향해서.

“우리의 불완전함이 갖는 아름다움입니다.”

읊조린 그 문답이, 테레지아의 깨달음이자 검결이란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비기 · 《제비반전술(Turning Swallow)》.”

그리고 그 깨달음이 오롯이 깃든 ‘비기’가 시엔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게 대체─”

시엔조차 경악을 금치 못하는 광경.

인간의 육체를 극복하려는 의지, 오러가 그곳에 있었다.

동시에 그 육체에 뱀파이어의 축복이라 할 수 있는 고유 혈마법─ 「혈기폭주」가 뿜어져 나왔다.

오러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마의 힘.

공존하는 오러와 마력은 테레지아의 육체에 더하기가 아니라 제곱의 힘을 주고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블러드 스피어」.”

촤아악!

그녀의 손에 들린 핏빛의 오러 블레이드에서 핏빛의 투창(投槍)이 뿜어져 나왔다. 그 자체는 그다지 대수로운 것 없는 중하위 혈마법이다.

문제는 그것이 양립할 수 없고 공존할 수 없는 상극의 힘, 오러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오러 블레이드에서 마법이 뿜어져 나오고, 뱀파이어의 마력으로 강화된 육체가 또다시 오러의 폭발력을 내뿜는다.

양립할 수 없는 두 힘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론상 불가능했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눈앞에 실체화시키고 있었다.

덧셈이 아니라 제곱의 형태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