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불완전한 존재 (4)
그로부터 얼마 후, 나이트워커 공작령 저택의 지하.
나락의 방.
사방이 어둠에 파묻혀 있는 그곳에서 시엔이 의식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날, 수도 베네토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라일라 나이트워커는 괴물 따위가 아니다. 그러나 존재의 완성이란 점에서 그녀의 말이 아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검마 오스왈드 그란델, 원탁왕 아서 펜드래곤, 검성 롤랑 같은 규격 외의 강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훗날 ‘암살자들의 아버지’가 된 시엔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완성된 강자.
그 시점에서는 영겁의 삶을 살며 수련하는 불사의 존재들이 수백 년의 삶을 쏟아부어도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그들 역시 거기서 끝이다.
아무리 갈고닦아도 더 강해지지도 않고 성장하지도 않는다. 새로 무엇을 배워도 제대로 배워지지 않고, 이미 배운 것을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다.
완벽이란 그 무엇도 더하거나 뺄 수 없기에 완벽이니까.
과거로 돌아온 시엔이 성장할 수 있는 것도 역설적으로 지금의 자신이 불완전해진 까닭이다.
‘불완전함이 갖는 아름다움.’
제비반전술에 앞서 테레지아 경이 가르쳐준 검결을 떠올린다.
이미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고 완성된 존재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
오직 불완전한 시엔이기에 손에 넣을 수 있는 힘.
“「황혼과 새벽의 자세」.”
그 깨달음을 되새기며 시엔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물론 비기라고 불릴 정도의 터무니없는 기술, 심지어 테레지아 자신조차 완성하지 못한 기술을 눈동냥과 몇 마디 검결을 들은 정도로 흉내 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날, 핏빛의 결계 속에서 테레지아가 보여준 것은 그 이상이었다. 노골적일 정도로 기술을 감추지 않고 그 이치와 밑천을 낱낱이 보여줬으니까. 애초에 비밀스러운 기술 이름을 친절하게 입 밖으로 내뱉는 시점부터 그렇다.
“비기 · 제비반전술(Turning Swallow).”
체내를 따라 흐르고 있던 오러의 움직임이 멎는다.
동시에 그 자리에서 전신의 오러가 불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손바닥을 뒤집듯 반전(反轉)된다.
오러에서 마력으로, 마력에서 오러로.
양립할 수 없는 두 성질이 찰나 속에서 공존하고 다시 흩어졌다.
“커헉!”
동시에 시엔이 참고 있던 호흡을 토해내며 비명을 내질렀다.
말 그대로 발끝을 따라가는 정도에 불과하다.
‘뭐, 그래도 발끝은 따라갔네.’
일부러 시엔이 보고 따라 할 수 있도록 노골적으로 보여준 그 기술을 따라 했고, 성공했다. 아마 테레지아조차 이렇게 빨리 카피할 줄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겠지.
아니, 정말 그럴까?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시엔에게 이 기술을 가르쳐줬는지도 미궁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믿을 수 없는 자의 호의에 끙끙 앓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목숨을 다해서 이 불완전함이 가진 가능성을 끌어낼 뿐.
자신의 존재가 완성되고 그 가능성이 모조리 고갈되기 전에, 훗날의 완성된 시엔조차 쓰러뜨릴 수 없었던 ‘완전한 괴물’들을 꺾기 위해서.
* * *
그 시각.
샤를마뉴 왕국 북서부의 어느 평화로운 도시.
도시가 쑥대밭이 되어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죄라고는 그저 때마침 왕의 진격로(進擊路)를 가로막고 있었다는 점이다.
원탁왕 아서의 길을.
“어째, 서…….”
잿더미가 된 도시를 짓밟으며 왕이 행차하고 있었다.
포로를 잡지도 않고 살려두지 않는다. 항복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도망치게 놔두지도 않는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모두를 빼앗고 부수고 짓밟을 뿐이다.
“이, 이 앞을 지나가게 두지 않는다…….”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알고도, 바닥에 쓰러진 노병 하나가 왕의 발목을 붙잡기 위해 떨리는 팔을 뻗었다.
콰직!
동시에 왕의 곰처럼 커다란 발이 병사의 두개골을 짓밟는다.
“왕의 앞을 막지 마라.”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는 두개골 조각과 뇌수를 뒤로하고 아서왕이 말했다.
자신의 패도(霸道)를 가로막는 그 무엇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 * *
시엔이 열아홉 살이 된 이듬해.
대륙의 정세는 가파르게 바뀌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시엔이 상정하고 있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샤를마뉴 왕국을 침략했던 칠왕국 아서왕의 군대는, 왕국 북서부 일대를 쑥대밭으로 짓밟으며 약탈품을 챙기고 나서 겨울이 오기 전에 1차 원정을 마치고 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샤를마뉴 왕국과 서로의 충돌이 있었으나, 12기사나 원탁의 기사급 강자가 사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피를 흘리는 것은 항상 어중간하고 힘없는 백성과 병사들의 몫이다.
아울러 칠왕국이 나이트워커 가문에 빌린 대금이 약속대로 치러졌고, 샤를마뉴 왕국 역시 나이트워커 가문에 빌린 전쟁 자금을 상환했다.
물론 전쟁은 이걸로 끝이 아니다. 다음 해에도 칠왕국의 함대는 다시 샤를마뉴 왕국을 짓밟을 것이고, 다다음 해에도 마찬가지다. 그때마다 공화국 역시 새로운 비즈니스를 거듭하게 되겠지.
그렇게 수십 년 가까이 끝없는 전투와 휴식을 거듭할 때까지 「마지막 기사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나이트워커 가문에는 몇 명의 새로운 밤의 아이들이 들어왔고, 세례를 통과했으며, 그중에서 시엔의 대녀 티아 나이트워커는 어느새 뼈를 만드는 시험을 통과하고 가문의 메이드맨이 됐다.
시엔의 형 비고 역시 7식의 마스터가 되었다.
하나둘씩 훗날의 시엔과 시대를 함께할 가족들이 태어나고 성장해갔다.
더 이상 시엔은 잃을 것 없는 가문의 철부지 막내가 아니었다.
수도 베네토에서 라일라의 이름으로 서신이 도착한 것도 그즈음의 일이었다.
* * *
수도 베네토, 총독궁 내의 어느 비밀스러운 일실.
대낮에도 어둠이 가득 차 있는 방. 삭막하고 살풍경하기 이를 데 없는 잿빛 풍경에, 대리석 테이블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방이었다.
「10인 위원회의 방」.
어둠 속에서 이 나라의 외교 및 첩보 활동, 전쟁을 비롯해 국가의 명운이 달린 핵심 정책을 결정하는 비밀 조직.
“어서 오십시오, 경애하는 위원장 각하.”
“돈 시엔께서도.”
이 나라의 진짜 지배자들, 그리고 그 지배자들 위의 지배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아들, 시엔 나이트워커와 함께.
이 시점에서 시엔은 더 이상 10인 위원회의 외부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라일라의 뒤를 이어 장차 이 나라의 진짜 지배자가 될 제왕의 후계자였으니까.
“라파엘로 제독의 모습이 보이지 않네요.”
“제독께서는 불참이란 듯합니다.”
“뭐, 바다 위에서 바쁠 사람이니까 말이죠.”
라일라는 개의치 않고 착석했다.
“그래서, 급히 위원회를 소집하신 이유를 여쭈어도 될까요?”
라일라의 말에 위원 하나가 입을 열었다.
“몇 주 전, 제국령 내의 비공식 외교 채널을 통해 제국의 고위 귀족 하나가 망명 의사를 타진했습니다.”
“고위 귀족의 망명?”
뜻밖의 말에 라일라가 눈동자를 끔벅거린다.
“제국령 북부 영지의 베르나르트 후작입니다.”
“《검은 달의 베르나르트》…….”
이어지는 이름에 당황하며 숨을 삼키는 것은 시엔이었다.
“그 이름을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를 모르는 게 이상하죠.”
“베르나르트 후작이라니, 정말 그 흑마법사를 말하는 겁니까?”
“제국 국교회가 그의 흑마법에 내부적으로 「특급 이단」의 결론을 내렸다는 듯합니다.”
“확실히 그의 흑마법이, 신성 제국이나 교회 입장에서 썩 달가운 내용은 아니지요.”
라일라가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 말대로다. 신성 제국 북부에 떡하니 자리 잡은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 세상 사람들에게 그 사실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들릴지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으나, 모종의 경로로 교회 내부 정보를 입수하고 우리나라의 외교 채널에 접촉을 시도했다는 듯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라일라가 흥미로운 듯 미소 지었다.
“확실히 흥미로운 내용이기는 하네요.”
“망명을 거절해야 합니다.”
라일라의 말에 침묵하고 있던 위원이 입을 열었다.
“그 남자를 받아들였다가는 신성 제국과의 대규모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장 제국령 내의 거류지에 있는 우리 상회의 타격은 물론…….”
이 나라의 공식적인 지도자, 총독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 나라의 정책을 정하는 의사결정기구 대평의회 또한 마찬가지다.
결정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열 명의 지배자들이니까.
“어째서 거부해야 하죠?”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나이트워커 가문의 입지는 능히 나머지 아홉 명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제게는 썩 나쁘지 않은 제안 같아 보이는데요.”
“나이트워커 공작!”
“듣자 하니 검은 달의 베르나르트, 그 남자가 부리는 사령술 학파는…….”
“죽은 자들을 일으켜 군세를 이루고, 전쟁의 향방을 뒤바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죠.”
시엔의 대답에 라일라가 미소 짓는다.
“전술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무척 흥미로운 잠재력이 느껴지네요.”
“신앙의 영역에서 제국과 교회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그들의 벌집을 들쑤시는 것과 다름없소.”
신성 로마누스 제국 국교회(國敎會).
그러나 ‘나라의 교회’란 명칭과는 달리, 신성 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대륙 전체의 교회를 떠받치는 신앙의 총본산.
나라마다 결코 넘어갈 수 없는 가치들이 있다.
가령 샤를마뉴 왕국에게는 기사도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다.
그리고 양보할 수 없는 가치는 곧 그들의 역린(逆鱗)이 된다.
예를 들어 베네토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을 상대로 ‘신뢰’를 저버리고 깨트리는 행위라거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신성 제국의 입장에서는, 바로 교회와 교회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공작 각하께서는 누구보다 잘 알지 않소. 그들의 신앙, 특히나 이단의 문제에 함부로 끼어들었다가는…….”
“어떻게 되는데요?”
바로 그때, 시엔이 되물었다. 너무나 당돌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이 나라의 평화가 위협받을 겁니다.”
그 말에 시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라일라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평화죠?”
“예?”
라일라가 되물었다. 그 말에 위원이 당황해서 숨을 삼켰다.
무엇이 평화냐니.
“그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바보가 아니다. 전쟁과 평화, 그사이의 택일을 믿을 정도로 어리석은 자는 결코 ‘이 나라의 지배자’가 될 수 없다.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이 나라의 이익이지요.”
“바로 그거랍니다.”
“결국 득이냐 실이냐, 냉정하게 이득을 따져 ‘최후의 이익’이 되는 것이야말로 평화니까요.”
“그렇기에 더더욱 베르나르트 후작의 망명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않소.”
바로 그때였다.
“아니……. 위원장 각하와 돈 시엔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오.”
세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의 이름을 가진 남자가 입을 열었다.
“메디치 공!”
“평화는 곧 이익이지.”
공화국 국영은행장 샤일록 디 메디치.
“그렇기에 그 남자가 우리에게 가져올 ‘잠재적 평화’를 조금 더 냉정하게 계산해볼 필요가 있소.”
“아뇨, 계산해볼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샤일록의 말을 받아 시엔이 대답했다.
“베르나르트 후작의 망명을 받아들이세요.”
훗날의 그가 가져올 가능성. 그 잠재적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시엔이기에.
“설령 얼마의 피를 흘리고 전쟁을 치르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 남자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초위계 광역섬멸형 흑마법 · 아바돈(阿鼻沌)」.
그저 성능의 뛰어남을 초월해 마법 자체로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하는 게 가능한, 일명 결전마법(決戰魔法)이란 개념의 창시자.
그것이 바로 ‘검은 달의 베르나르트’란 남자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