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가족이 전부다 (3)
“가족이 전부다.”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아퀴나스가 즐거운 듯 말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은 늘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지.”
“…….”
“정작 핏방울 하나 이어져 있지 않은 주제에 말이야. 참 우스꽝스러운 가족 놀이지.”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가 대답했다.
“시시한 잡담을 하려거든 나중에 내 영지로 찾아오렴, 빌헬미나.”
남의 일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미소 지으며.
“그때는 차를 마시며 온종일이라도 떠들어줄 수 있단다.”
“당신의 진짜 가족은 나뿐이야.”
베일 속에서 빌헬미나가 말했다.
“─라일라 아퀴나스 언니.”
아퀴나스 가문. 대대로 신성 제국의 이단심문관장(Inquisitor Lord)을 배출해온 유서 깊은 명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걸.”
라일라 나이트워커가 대답했다. 타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무심하고 차가운 눈빛을 하고서.
“너는 나의 아무것도 아니란다.”
“…….”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고, 가족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까닭에.
* * *
“「루시퍼의 자세」─.”
최강의 치천사 미카엘의 대척점에 있는 ‘떨어지는 샛별’ 루시퍼.
신성 제국에서는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금기의 검식.
어느새 오스카의 등 뒤로 펼쳐진 검고 어두운 12장의 흑익(黑翼)을 보며, 시엔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검이 부서지고 망가졌다고 들었는데, 의외로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네.”
“어머니께서 날 구원해주셨지.”
오스카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어머니’가 생물학적 의미의 친모가 아니란 사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오스카 이스카리옷, 그게 내 이름이야.”
이스카리옷(Iscariot), 고대 제국어로 ‘거짓의 아들’이란 의미를 갖는 세례명. 그 이름에 시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일찍이 시엔의 앞을 가로막았던 검성이란 이명도, 미카엘의 자세도, 심지어 그란델이란 이름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 과거 오스카의 차지였을 대륙 제일의 검술 천재란 명성조차 그의 것이 아니다. 그 전부를 시엔이 빼앗았으니까. 참으로 얄궂은 타락의 운명이다.
“그날의 패배를 하루도 잊은 적이 없어.”
오스카가 말했다.
“너를 쓰러뜨리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가 됐지.”
“그때도 못 이겨놓고 지금이라고 다를 것 같나?”
“그래, 맞아.”
시엔의 대답에 오스카가 웃었다.
“나는 널 못 이겨. 이길 수도 없지.”
“그걸 알고도 개죽음을 자처하려고?”
“내가 이기는 게 아니야.”
그저 순순하게 시엔의 말을 받아들이며.
“─그가 이기는 거지.”
오스카 이스카리옷이 읊조린다.
“「배교자의 자세」.”
일찍이 샤를마뉴 왕국에서 싸운 이단심문관이 그랬던 것처럼 무형의 소용돌이가 오스카를 휘감고, 그 속에서 담담히 말을 잇는다.
“칠죄종의 1죄, 오만(Superbia)의 루시퍼 강림.”
알기 쉬운 천사의 이름이 아니었다.
신을 섬기는 이들이 순교자의 자세를 통해 천사의 힘을 불러오듯, 악마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그것이 교회에서 말하는 천사나 악마처럼 알기 쉬운 이름을 통해 규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맞는지 회의적일 뿐.
‘……!’
이윽고 펼쳐지는 풍경 속에서 시엔이 숨을 삼켰다.
악마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존재가 그곳에 있었으니까.
일곱 마왕과 칠죄종의 수장, 루시퍼.
어둠도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샛별처럼 눈부시고 성스러운 휘광 속의 귀공자가 있었다. 등 뒤로 펼쳐진 열두 장의 흑익 역시 찬란히 빛나는 백색의 날개로 뒤바뀌어서.
그의 손에 들린 칼날 역시 샛별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추락하는 샛별이자 빛나는 별, 여명의 아들.
일찍이 사도라 불리는 규격 외의 강자들이 상품천사를 강림시켰을 때와 비슷하다.
샛별의 귀공자, 루시퍼가 감정 없는 눈동자로 시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벌레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차가운 눈빛.
보자마자 깨달았다. 저것을 불러내는 대가는 절대로 가볍지 않다. 아니, 가볍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그것을 알고도 오스카는 기꺼이 자신의 목숨, 존재를 걸고 저것을 불러냈다.
“시시하네.”
그렇기에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날 이겨서, 무슨 이득이 있지?’
아직 되돌릴 수 있다. 교회에서는 천사나 악마의 강림을 무슨 거창하기 그지없는 대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도, 정작 헤아릴 수 없는 천사와 악마를 두 손으로 쓰러뜨린 시엔이기에 알 수 있다.
저것은 그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힘’을 잠시 빌려오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세상이 천국이니 지옥이니, 교회가 말하는 십계명 따위를 지키는 따분하고 알기 쉬운 곳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여전히 저 초월자의 마음속에는 오스카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그 영혼을 향해서 설득하고 되돌릴 수 있다.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
그저 그렇게 할 이유가 없을 뿐.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고, 가족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스카 그란델─ 아니, 오스카 이스카리옷이 시엔에게 패배하고 검이 부러져 무슨 일을 겪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따위는 시엔에게 있어 아무래도 좋았다.
오스카에게 시엔이 어떨지는 몰라도, 시엔에게 있어 오스카는 아무것도 아니다.
구해줄 이유도 손을 뻗어줄 이유도 없다.
그렇기에 그저 칼자루를 고쳐 잡는다.
가족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용납하지 않는다. 뿌리부터 싹까지 철저하게 짓밟는다.
그게 바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방식이었다.
공기가 무겁다. 호흡하는 것조차 벅차다. 터무니없는 존재를 앞에 둔 압박감에 심장이 아프다.
그럼에도 직감할 수 있었다.
시엔이 기억하고 있던 완전한 형태의 루시퍼는 고작 이 정도 따위가 아님을.
‘그릇이 미숙해서 100% 출력을 끌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오히려 저 나이에 이 정도까지 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 딱 그 정도였다.
일찍이 치품천사의 좌에 앉아 있었던 샛별의 귀공자가 쇄도했다. 손에 들린 순백의 검을 휘두르며.
좁혀지는 거리 속에서 검이 휘둘러졌다.
카앙!
루시퍼의 검이 시엔의 왕 시해자와 맞부딪친다.
서로의 칼날이 맞부딪치고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
칼끝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시엔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이 검의 움직임…….’
천사의 아리아도, 악마의 유혹도 울려 퍼지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나도 고결하고 성스럽다. 훗날의 시엔이 알고 있는 그 남자의 검처럼─.
검성(Sword Saint) 오스카 그란델.
눈앞에 강림한 샛별의 귀공자, 루시퍼가 어째서 시엔이 기억하고 있는 훗날의 검성의 검을 펼치고 있는가. 알 수 없었다.
카앙!
더없이 인간적인 싸움의 방식. 거기에 천사니 악마니, 인간을 내려다보는 초월자의 모습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검 하나를 쥐고 그 길의 끝을 추구하는 기사가 있을 뿐.
그러나 시엔 나이트워커는 기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훗날 대륙 최강의 기사이자 불패의 검사, 검성 오스카를 쓰러뜨린 것도 바로 그 암살자의 검이다.
“「나락의 자세(Naraka Stance)」.”
나이트워커 가문의 6식, 훗날의 시엔이 그랜드마스터로 극의에 이르렀던 세 개의 검식 중 하나.
지옥의 밑바닥, 그 이름처럼 나락의 이름을 빌린 검술이 샛별의 귀공자를 향해 휘둘러졌다.
‘《나락베기》.’
칼날이 맞부딪친다. 칼날이 맞부딪친 시점에서 이론상 나락의 자세를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끝없는 밑바닥을 향해 추락할 뿐.
집요할 정도의 파상공세를 통해 눈앞의 상대를 압박하고 발밑을 무너뜨린다. 벗어날 틈도 여유도 주지 않는 극공의 묘리.
게다가 나락의 자세는 그저 위력이나 완력을 통해 찍어누르는 ‘무식한 검술’이 아니다. 오히려 가문의 그 어느 검식보다도 정교하고 계산적으로 상대의 발목을 잡고 무력화하는 검이니까.
하늘 위의 그 어떤 존재도 떨어뜨릴 수 있는 추락의 검.
“……떨어지지 않는다.”
바로 그때, 일검(一劍)이 휘둘러졌다.
위에서 아래로 상대를 철저히 떨어뜨리려는 시엔의 나락의 자세에 맞서, 아래에서 위로.
“비검 · 폭포오르기.”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각오와 결의가 담겨 있는 비상의 검.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던 오스카의 칼끝이 폭포를 거스르듯 솟아올랐다.
동시에 시엔이 펼치고 있던 나락의 자세가 덧없이 무너져 내렸다.
시엔 역시 그 기술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너는…… 누구지?”
시엔이 되물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폭포오르기.
훗날 대륙 최강의 암살자,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 나이트워커가 펼친 6식 나락의 자세를 파훼하기 위해 검성 그란델이 손에 넣은 회심의 기술.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나락의 자세를 무너뜨릴 수 있는 비상의 검.
아직 존재할 리 없고 존재할 수도 없는 그 기술이 눈앞에 있는 샛별의 귀공자, 루시퍼의 칼끝에서 펼쳐졌다.
바로 그때였다.
“……나는 검을 통해 하늘로 오르리라.”
침묵하고 있던 샛별의 귀공자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하느님의 별들 위로 나의 왕좌를 세우고, 북녘 끝 신들의 모임이 있는 산 위에 좌정하리라.”
섬뜩하고 기품 어린 목소리. 일찍이 유일신에게 대항하고 맞서다 떨어진 타락천사가 말했다.
등 뒤로 펼쳐진 열두 장의 날개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휘광을 머금는다.
“그쯤 하렴, 오스카.”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싸늘하고 기품 어린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귀공자의 움직임이 멎는다.
“아직은 때가 아니란다.”
기척조차 없이 귀공자의 곁에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의 베일을 써서 얼굴을 가린 여성이었다.
직후, 샛별의 귀공자를 휘감고 있던 순백의 성광이 덧없이 스러졌다.
칠죄종의 1죄, 떨어지는 샛별 루시퍼의 껍질이 벗겨지고 그 속에 비로소 오스카의 모습이 드러나 무릎을 꿇었다.
“커헉……!”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전신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겁게 불타올라, 살가죽이 벗겨진 정도가 아니라 표피 밑의 진피(眞皮)까지 진물을 흘리며 녹아내리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아직……!”
고통을 뒤로하고 오스카가 소리쳤다. 그 말에 베일을 쓴 여성이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머니의 말을 거역할 셈이니?”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 오스카가 고통 속에서 입을 다물었다. 아니, 그 모습에 오스카의 얼굴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숯검정이 되어 불타버린 사람의 형상이 존재할 뿐.
“돌아가자꾸나, 오스카.”
베일을 쓴 여성이 말했다. 그 말에 시엔이 움직이려 했으나, 이내 깨달았다.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했다가는 자신의 목이 잘릴 것이란 사실을.
이 시대는 아직 시엔의 시대가 아니다. 이 시대에는 아직 이 시대의 강자들이 남아 있다. 검마 오스왈드, 검성 롤랑, 원탁왕 아서, 그리고…….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아퀴나스.’
물러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시엔이 고개를 돌린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를 풍미하는 또 하나의 강자가 그곳에 있었다.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였다.
* * *
조금 전.
“너는 나의 아무것도 아니란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라일라의 말에 빌헬미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가족이 전부다(Familie ist alles).”
웃고 나서 대답했다.
“언니는 나의 전부야.”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언을 입에 담으며.
“언니 이외의 존재들이야말로,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
가족 이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것은 설령 그녀를 어머니라 믿고 따르며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된 대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빌헬미나 아퀴나스 역시 오직 가족이 전부였고, 가족 이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까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