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대탈출
라일라, 루치아노, 린 나이트워커.
암살자들의 어머니와 두 명의 하이마스터가 남아서 어린 가족들을 위해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 시엔 역시 비고와 합류해 제국의 땅을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지옥 끝까지 그들을 따라오는 추격자들을 뿌리치며.
며칠 뒤.
베르나르트 후작령에서 500킬로미터 거리의 제국 자유도시 암스테르담(Amsterdam).
암스텔강 하구에 둑을 쌓아 올린 항구도시이자 북해로 뻗어나갈 수 있는 신성 제국의 주요 무역 거점.
바로 그 도시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야산의 절벽 위.
워낙 자살 명소로 악명 높은 탓에 그 절벽에는 우습게도 ‘천국의 사다리’란 별명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집요하기 이를 데 없는 추격전 끝에, 기어코 천국의 사다리에서 구석에 몰린 시엔이 비고와 함께 등을 맞댔다. 높이를 알 수 없는 절벽 밑의 바다를 등지고.
“허억, 헉…….”
두 사람 모두 호흡이 거칠다.
“쥐새끼처럼 도망치는 것도 여기까지다.”
“흠, 누가 누구보고 쥐새끼라는지 모르겠네.”
시엔이 대답하며 흘끗 뒤를 돌아봤다.
등 뒤에는 깎아지를 듯 까마득한 높이에, 밑바닥을 알 수 없는 검고 어두운 북해의 밤바다가 출렁이고 있다. 여기서 떨어졌다가는 제아무리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라 해도 문자 그대로 천국행이겠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린다.
두 형제 앞에는 제국 제2기사단, 장미십자 기사단의 기사들이 물 샐 틈 없는 밀집 대형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윽고 대형을 갖춘 기사들 사이에서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매끄러운 가죽 재질의 검정 트렌치코트 위로, 핏빛 바탕에 칠흑의 갈고리 십자가를 완장으로 찬 자들이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이 그들의 영토 내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지 않듯, 그들도 마찬가지다.
제국 공안, 이단심문관(인퀴지터)을 상징하는 칠흑의 제복.
“숫자가 너무 많아, 시엔.”
시엔의 등 뒤에 새겨진 출혈을 살피며 형 비고가 말했다.
“아니, 아직이야.”
그 말에 시엔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젓는다.
“아직─”
타들어 갈 것처럼 초조해지는 마음을 뒤로하고.
어느새 제복 차림의 남자들이 기사들 사이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일제히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읊조리기 시작했다.
“중품의 제6품, 능천사 강림.”
“중품의 제5품, 역천사 강림.”
상대는 다섯 명.
세 명의 능천사와 두 명의 역천사. 지금의 시엔과 비고가 전력을 다하면 이기지 못할 정도의 전력은 아니다.
그러나 500킬로미터가량 지옥 같은 추격전과 싸움을 거듭하며 지칠 대로 지친 이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나도 강림.”
느닷없이 들려오는 그 밉상스러운 소리가, 그토록 기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촤아악!
두 형제를 포위하고 있던 장미십자 기사단의 대형 속에서 섬뜩한 서슬이 빛났다. 빛났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매끄러운 강철 갑주가, 마치 종잇장처럼 덧없이 잘려나갔다.
죽음의 거미줄, 가문의 7식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
“흠,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이쯤에 있다고 들었는데─.”
“미하일 대부님!”
“오냐, 나다.”
그 움직임과 동시에 제국 공안들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그게 다가 아니었다.
화르륵!
칠흑의 불꽃이 피어오르며 일대를 집어삼켰다.
“기다리게 했구나, 비고. 그리고 시엔.”
숲의 어둠 속에서 ‘블랙파이어’의 별명을 가진 가족, 이자벨 나이트워커가 말했다.
그들이 무사히 살려 공화국까지 데려가야 할 칠흑의 미남자, 베르나르트 후작과 함께.
“……실례를 끼쳤소.”
바로 그 남자, 베르나르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기다려준 시엔과 비고를 향해.
“「묘지기의 자세(Graveguard Stance)─」”
대륙 제일의 흑마법사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허무의 폭풍」.”
마치 무덤가를 거니는 것처럼 섬뜩하고 창백하며 귀기 어린 목소리였다.
후우웅!
직후 남자의 발밑에서 휘몰아치는 칠흑의 마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시엔과 비고 앞에 있는 천사들을 집어삼켰다.
검고 어둡고 불길하기 이를 데 없는, 동시에 소름이 끼칠 정도의 공허함이 깃들어 있는 바람이 내달린다.
비명을 지를 틈도 저항할 틈도 없었다.
죽음의 바람이 휘몰아치고 나서 그 자리에는 뼛가루도 잿더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죽음조차 아니다.
허무다.
일소(一掃).
‘저게 검은 달의 베르나르트…….’
심지어 그조차 저 남자가 보여줄 수 있는 전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전력마저 저 남자가 훗날에 가져오게 될 것 앞에서는 새 발의 피다.
알고 있었으나 다시 봐도 경이로운 마법이다. 어째서 제국이 그의 흑마법에 그토록 커다란 가능성을 느끼는지, 굳이 미래의 기억을 끄집어낼 필요조차 없었다.
“구해주러 오셨군요, 미하일 대부님!”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 비고가 말했다. 그 말에 미하일이 무슨 소리를 하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나도 잡혔어.”
“…….”
몇 발자국 앞서 왔을 뿐, 이곳에 있는 것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등 뒤로 좀 많이 성가신 걸 달고 왔거든.”
이윽고 미하일의 말처럼 ‘좀 많이 성가신’ 추격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여기 있었구나.”
중성적이고 앳된 외모의 어린 남자아이였다.
갈고리 십자가가 새겨진 핏빛 완장에, 홀로 유일하게 칠흑이 아니라 순백의 제복을 걸친─.
“술래잡기는 이제 끝이야?”
남자아이의 뒤로 잇달아 제국의 공안들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를 합쳐도 그들 앞에 있는 남자아이의 기백에 비할 바는 아니다.
보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저 남자아이가 보통의 존재가 아니란 것을.
‘사도…….’
상품천사 이상을 강림시킬 수 있는 제국 국교회의 최고 전력.
앞서 오스카가 강림시켰던 칠죄종의 1죄 루시퍼가 격 자체는 상품의 1품 ‘치천사’와 동격의 존재라 해도, 그것을 감당하는 그릇의 레벨이 다르다.
뒤는 없다. 처음부터 없었다. 아무리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라 해도, 설령 대륙 최강의 흑마법사가 함께 있다 해도 저들 전체를 상대로 승산 따위는 없다. 애초에 검은 달의 베르나르트는 이런 식의 싸움에 적합하지 않으니까.
“그래, 끝이지.”
시엔의 말을 받아 미하일이 대답했다.
“우린 다 같이 사이좋게 천국으로 갈 예정이거든.”
그럼에도 그곳에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 누구도 당황하지 않았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이 빌어먹을 스토커 꼬맹아.”
욕지거리와 함께 미하일이 가운뎃손가락을 올렸고─ 그들 중 누구랄 것도 없이 전부 절벽 밑을 향해 뛰어내린다.
비고와 미하일이 거미줄을 이용해 가족들의 몸을 묶고 고정하며 절벽의 밑바닥을 향해서.
“바다에서 도망칠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
뛰어내리는 그들을 보며 남자아이가 말했다. 아니,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육중하게 출렁이는 밤바다 위로, 매끄러운 금속성의 광택을 빛내며 방추형의 함체를 드러냈으니까.
“……!”
그 모습을 보자마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좁쌀처럼 작고 비좁은 베네토 공화국이, 유일하게 규모와 물량에 있어서 대륙 최대의 우위를 점하는 해군력. 그들 공화국이 자랑하는 무적함대의 정점이자 대양의 패자를 상징하는 최강의 배.
「대양을 가르는 검(Sword of the Ocean)」.
“노틸러스호……!”
* * *
“흠, 오늘은 바닷물 수온이 좀 차갑네요.”
물에 잠기기 직전까지 가라앉은 갑판 위에, 바다처럼 새파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있었다.
“딱 맞춰 왔군요, 라파엘로 제독.”
“레이디 이자벨을 위해 최고로 멋지게 등장할 타이밍을 좀 재고 있었죠. 흠, 레이디 린에게도 이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제독도 참 여전하시네요.”
서펀트 가문의 젊은 가주, 라파엘로가 제독 모자를 벗으며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자, 어서들 들어오시죠. 다들 고래밥이 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
그들이 뛰어내린 배는 보통의 배가 아니었다. 돛을 달아서 풍력을 이용하는 범선도 아니고 노와 돛을 함께 쓰는 갤리선조차 아니다.
이 배는 바닷속에서 움직이니까.
전장(全長) 90미터에 1,500톤가량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를 가지고도 바닷속을 고래처럼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아직 이 시대의 어느 기술자들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기술의 결정체─ 잠수함.
“세금 먹는 고래, 노틸러스호에 타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 *
특수 크리스털 소재로 된 30cm 두께의 창문 너머,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바닷속의 어둠을 비춰주는 노틸러스호 내의 응접실.
귀족의 저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사치스러운 장식과 가구, 온갖 예술품과 조명이 은은히 빛을 내고 있다.
“아이고, 삭신이야.”
금색의 탁자 위에 보란 듯 두 다리를 걸치고 앉아 미하일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놈의 빌어먹을 스토커 꼬맹이가 없으니, 이제야 좀 두 발 뻗고 살 것 같네.”
“시도 때도 없이 다리 걸치는 그놈의 버릇 좀 어떻게 못 하겠니, 미하일?”
그 모습에 이자벨이 잔소리를 쏘아붙였다. 미하일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니 뭐, 누님이 왕국에서 걸친 다리에 비할 바겠습니까.”
그 말에 이자벨이 묵묵히 미소 짓는다. 두 다리를 걸치고 있던 미하일이 그제야 비로소 정좌하며 시치미를 뗐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남매의 모습이었다.
* * *
그 시각, 응접실을 나와 복도를 걷고 있는 시엔의 앞에 뜻밖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엔.”
바다처럼 새파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숙녀였다.
“……마린?”
평소처럼 알기 쉬운 드레스 차림이 아니다. 라파엘로 제독을 비롯해 이곳 노틸러스호의 승조원과 같은 정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그 모습을 보며 시엔이 미소 짓는다.
“설마 오빠를 따라 공화국 해군이 됐을 줄이야.”
“왜,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야?”
시엔의 말에 마린이 대답했다.
“약속했잖아, 바다의 여왕이 되어주겠다고.”
“그랬지.”
“그러기 위해서는 이 ‘대양을 가르는 검’부터 손에 넣어야지.”
마린이 즐거운 듯 대답했다.
서펀트 가문이 공식적으로 샤를마뉴 3왕자 에릭과의 혼담을 파기하고 나서, 여전히 두 사람은 약혼자 상태로 머물러 있다. 피차 서로의 저택에서 느긋이 노닥거리는 할 짓 없는 귀족 자제와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그럼에도 그들이 맺고 있는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 게다가 모처럼 보는 시엔의 얼굴이 무척이나 기쁘기도 했다.
“돌아갈 때까지 느긋이 쉬고 있어.”
“고마워, 마린.”
“모처럼이니 둘이서 불장난도 좀 하고 말이지.”
“오, 오라버니……!”
바로 그때, 마린과 같은 머리색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둘이 같이 객실이라도 잡아드릴까요?”
그 말에 마린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졌다.
“아니, 볼 장 다 봐놓고 뭘 새삼스럽게 그래? 설마 아직도…… 아차차.”
말하다가 말고 라파엘로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라파엘로 제독.”
침묵하고 있던 시엔 역시 부드럽게, 그러나 그 이상의 무례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시 봐서 기쁘네요, 돈 시엔.”
라파엘로 역시 제독 모자를 벗고 재차 예를 표했다.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고 푹 쉬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것참 감사한 말씀이네요.”
“아니 뭐, 감사랄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서펀트 가문의 젊고 야망 넘치는 가주이자, 이제는 아홉 머리 뱀(히드라)의 수괴가 된 남자가 태평하게 대답했다.
“이 나라 세금이 여기서 다 터지고 있는데.”
* * *
“오래고 고된 여행길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베르나르트 후작 각하.”
나이트워커 공작령의 저택.
창백하고 시린 달빛을 역광으로 등진 채,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미소 짓는다. 여성의 곁에는 그녀의 대자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경애하는 암살자들의 어머니를 뵙겠소.”
이윽고 공화국의 예법에 따라 베르나르트 후작이 무릎을 꿇고 여성의 손등에 입맞춤했다.
“자유와 평화의 나라, 베네토 공화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