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61화 (61/200)

61화. 검은 달의 베르나르트 (1)

“우리는 후작 각하의 흑마법 연구에 대해 조건 없는 금전적 지원과 후원을 약속드릴 겁니다.”

창백한 달빛을 역광으로 등진 채,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말했다.

“아울러 각하께서 마도의 탐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공작령 내의 일부 영지를 분봉해드리도록 하지요. ─마침 후작 각하를 위해 지하에 짓고 있던 마도 공방의 공사도 곧 끝마칠 예정이고요.”

“그렇게까지…….”

공화국이 베르나르트의 망명을 받아준 게 아니다. 눈앞의 그녀가 망명을 받아준 것이다.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의지가 곧 공화국의 의지란 것을.

“아울러 제국의 추적이 잠잠해지는 대로, 후작 각하의 신변 안전에 위협이 없는 선에서 수도 베네토에 자유롭게 체류하실 수 있는 별장 저택을 준비해 드릴 겁니다.”

“실로 더할 나위 없는 빚을 졌소.”

“빚이라니요, 우리는 정당한 거래를 했을 뿐이랍니다.”

라일라가 미소 짓는다.

물론 그녀 역시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어준 게 아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그 정도 사실을 모를 정도로 후작 역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럼 내가 지불해야 할 대가는 무엇인지?”

“두 가지가 있답니다.”

라일라가 말을 잇는다.

“하나. 우리 가문은 각하의 연구 성과에 대해 완전하고 숨김없는 정보의 공유를 바랍니다.”

“……그렇겠지.”

“물론 각하께서 충분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우리 가문 역시 전폭적 후원을 아끼지 않을 거라 약속드리지요.”

“그럼 또 하나는 뭐지?”

거기까지는 처음부터 예상하던 바다. 그러나 이어지는 라일라의 말은 그렇지 않았다.

“시엔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세요.”

* * *

“흑마법은 천시되는 마법이지.”

제국에서는 그가 흑마법사란 이유 하나로 마탑을 세우지 못하게 하고, 학파의 제자를 받는 것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설령 운 좋게 받았다 쳐도 그의 기준에서 발끝도 미치지 못하는 어중이떠중이가 대다수다.

애초에 재능 있고 앞길이 창창한 마법사가 마탑도 없는 학계의 이단아, 베르나르트 밑에서 수학할 이유도 없다. 그게 마법의 세계였던 까닭에.

“암살자의 검이 그렇듯이 말이죠.”

시엔의 대답에 베르나르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보통의 암살자는 그렇겠지.”

그러나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는 그렇지 않다.

시엔과 나란히 걷고 있는 공작 저택의 광장, 거기에 뒷골목을 살아가는 알기 쉬운 암살자의 이미지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조각상…….”

솟구치는 분수 줄기 너머, 흑색의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장엄한 기마상 앞에서 베르나르트가 조용히 숨을 삼켰다.

“무명 시절에 가문의 후원을 받았던 어느 예술가의 작품입니다.”

흔히 상상할 수 있는 고결하고 용맹 넘치는 기사가 아니다.

훗날 이 세상의 종말이 찾아왔을 때, 재앙을 이끌고 나타날 거라 불리는 묵시록의 4기사 중 하나.

죽음의 청기사, 창백한 말의 기수.

“설마 ‘거장 마젤란’의 작품이 이곳에 있을 줄이야.”

“알아보시는 겁니까?”

“나름대로 심미(審美)에는 조예가 있다네.”

베르나르트가 말을 잇는다.

“그런데 설마 그가 창백한 말의 기수를 소재로 삼을 줄은…….”

“공개적으로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어디까지 우리 가문의 후원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익명으로 기증했지요.”

“……이 정도의 걸작을 아무런 대가 없이, 심지어 익명으로?”

아니, 오히려 익명을 자처한 것은 납득할 수 있었다.

제국 황도의 시스티나 대성당에 장식된 마젤란의 조각상, 비탄의 성모상(피에타)은 대륙 역사를 통틀어서 최고의 걸작으로 칭송받는 작품이다.

그런데 바로 그 성모상을 조각한 자가 정작 신성 제국 최악의 적수라 할 수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에, 그것도 하필 묵시록의 4기사 중 ‘죽음의 청기사’를 소재로 작품을 기증했다는 것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자칫 이단의 혐의가 씌워지고도 남을 행위.

그런데 그런 리스크조차 감수하고 기꺼이 이 작품을 기증했다는 것은, 그가 나이트워커 가문을 보통의 후원자로 여기는 게 아니란 증거다.

‘심지어 이 작품이야말로 마젤란의 궁극의 미학과 예술적 성취를 담고 있다.’

공개적으로 그의 이름을 걸고 작품을 발표할 경우, 비탄의 성모상조차 뛰어넘는 역사의 걸작이 될 수도 있다. 아니, 확실히 그럴 것이다. 그런데 마젤란은 일체의 명성이나 성취를 거부하고 이름조차 없이 그들 가문에 이 작품을 바쳤다.

베르나르트는 무심코 소름이 돋았다.

그들 가문이 쌓아 올린 별과 단검의 명성은 결코 알기 쉬운 공포나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우아한 성질의 무엇이었다.

“본격적으로 자네를 가르치게 될 날이 기대돼서 참을 수가 없군.”

시엔 나이트워커의 마법 스승이 되어줄 것.

달리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두 팔을 벌려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학문의 유전자를 남기는 것은 학자에게 있어 자손을 남기는 것보다 중요하다. 기사도 마법사도 마찬가지다. 베르나르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애초에 검은 달의 베르나르트는 순수한 마법사의 경지 자체로 대륙에서 손에 꼽는 8위계 마법사다. 적어도 인간 중에서 그보다 위라고 칭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 바르무어 후작 가문의 가주 마도왕(魔道王)뿐이니까.

그런 주제에 자신의 ‘유전자’를 계승하고 대를 이어줄 핏줄은커녕 제대로 된 제자조차 두지 못했던 베르나르트였다.

그 점에 있어 시엔 나이트워커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베르나르트 정도의 경지를 가진 마법사가 못 알아볼 리 없다.

이 아이는 제국 마탑의 엘리트 코스를 밟는 얼빠진 헛똑똑이들과 비교를 불허하는 진짜다.

생각하고 나서 깨달았다.

어느덧 베르나르트 자신 역시, 이제는 그들 가문의 우아함에 매혹된 이들 중 하나란 것을.

* * *

그 시각.

신성 로마누스 제국의 수도, 시스티나 대성당.

일찍이 대륙 제일의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마젤란의 ‘비탄의 성모상(Pietà)’을 필두로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는 하느님’과 ‘유혹당하는 신의 아들’ 등, 내로라하는 거장들의 프레스코화들이 장식된 모자이크 복도 끝의 비밀스러운 일실.

「열쇠를 걸어 잠글 수 있는 방」이란 뜻에서 콘클라베(Conclave)라 불리는 그 방은, 오로지 제국 국교회의 추기경밖에 출입할 수 없는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베르나르트 후작을 놓쳤다지요, 친애하는 빌헬미나 자매님.”

그리고 그 방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의 미숙함을 통감할 뿐이랍니다, 형제자매님들.”

질책하는 목소리에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아퀴나스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올려보는 것으로도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높다란 기둥 위에 앉은 추기경들 사이에서, 홀로 재판을 받는 피고처럼 낮은 곳에 앉아.

“아무리 자매님이라 해도 이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항입니다.”

“확실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빌헬미나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마그데부르크 형제님.”

“뭘 말이지?”

“그 남자에게 ‘특급 이단’의 혐의를 씌우는 시점에서, 공화국에게 그 남자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가졌는지 홍보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

빌헬미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직접 움직였답니다.”

“!”

“저로서는 그녀 하나를 제지하는 것이 고작이었지요.”

빌헬미나가 말했다. 그 말에 곳곳에서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애초에 제 충고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해놓고, 그 책임을 애꿎은 실무자에게 떠넘기는 행위야말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니요, 빌헬미나 자매님의 말이 맞습니다.”

침묵 속에서 그녀의 말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엄숙히 울려 퍼졌다.

“마그데부르크 형제님, 이것은 당신이 물어야 할 책임이지요.”

얼굴을 찌푸릴 정도로 고약하게 악취를 풍기는 그에게는 《시궁쥐 추기경》이란 이름이 있었다.

“자매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잇달아 콘클라베의 추기경들이 일제히 입을 모았다.

발성(發聲)을 통하는 의결, 이곳 콘클라베가 의사를 결정하고 뜻을 모으는 전통의 방식.

당사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가 그녀의 주장에 찬동했고, 마그데부르크 추기경의 표정이 하얗게 질린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죠.”

죽음의 성모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아, 아아……!”

콰직!

피가 튀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머리가 깨지고 피와 뇌수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그럼에도 그곳에 있는 추기경 중 누구도 당황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으므로.

“……이걸로 마그데부르크파의 세력도 조금 잠잠해지겠지요.”

사람이 사는 세계는 어디를 가나 똑같다.

정치와 음모가 있고, 책략이 있고, 술수가 있다. 그것은 설령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자들이 모여 있는 밀실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 * *

얼마 후, 나이트워커 공작의 집무실.

“시엔입니다.”

“들어오렴.”

노크 끝에 시엔이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내자, 기다렸다는 듯 라일라가 미소 짓는다.

“베르나르트 후작과의 이야기는 잘 마무리되었니?”

“예.”

시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가 마젤란의 조각을 알아보더군요.”

“흠, 보는 눈이 제법이구나.”

라일라가 의외란 듯이 미소 짓는다.

“제국과의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란다.”

미소 짓고 나서 라일라가 말했다. 그 말대로다.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이제부터였다.

“그 남자, 베르나르트가 우리의 기대에 부응할 가치를 가졌길 바라야지.”

제아무리 나이트워커 가문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제국의 영토에서 저지른 행위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니까.

뺨을 맞고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오히려 뺨을 맞아준 시점에서 두 대, 세 대를 정당하게 때려도 할 말이 없다. 그것이 바로 명분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명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침 그들이 움직일 때가 머지않아 다가올 듯하구나.”

“사육제가 곧 시작되죠.”

“그래.”

베네토 사육제(Carnevale di Veneto), 일명 카니발.

공화국 수도 베네토에서 1달 가까이 열리는 대륙 최대 규모의 축제이자 가장무도회.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나라의 축제는 결코 그들 나라 내부의 일로 그치지 않는다.

전 대륙에 공화국의 부와 명예, 향락과 사치를 과시하며 온갖 암투가 펼쳐지는 소리 없는 전장.

뺨을 맞은 제국이 이 기회를 그냥 내버려 둘 리 없다. 설령 뺨을 맞지 않았다고 쳐도, 신성 제국은 물론 샤를마뉴 왕국과 칠왕국을 비롯해 대륙 각지에서 저마다의 모략을 품고 모이는 것이 베네토 사육제다.

“평화를 바라는 자…….”

그렇기에 평화를 바라는 나이트워커 가문이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였다.

“전쟁을 준비하라(Para Bell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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