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64화 (64/200)

64화. 베네토 카니발 (1)

저물녘 어둠과 함께 축제의 날이 밝았다.

밤하늘의 어둠을 밝히는 폭죽의 불꽃 속에서, 공작새처럼 요란한 복장의 남녀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옷 이상으로 거추장스러운 깃털과 금박, 보석 장식들이 주렁주렁 달린 마스크를 쓴 채.

얼굴을 감추고 정체를 가린 뒤, 축제의 광란 속에서 영혼을 해방하는 가장무도회(마스커레이드).

공화국의 자유와 넘치는 부귀영화를 모두의 앞에서 과시하는 장.

시엔 역시 그곳에 있었다.

산 마르코 광장의 총독궁 앞에서, 이 나라의 지배자들을 대리해 대륙 각국의 고위 사절들을 맞이하며.

“어서 오십시오, 오스왈드 그란델 대공 각하.”

“……시엔 나이트워커.”

비록 공화국 카니발의 전통에 따라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으나, 남자의 금빛 코트에 새겨진 신수 그리폰의 문장(紋章)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제국의 가장 충성스러운 칼날, 그란델 대공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

그것은 가문의 문장을 드러내며 암묵적으로 자신이 귀족임을 나타내고, 축제에 어울리길 거부하는 의사 표시였다.

“소란스럽고 천박해서 귀가 따가울 지경이군.”

그란델 대공의 뒤를 이어, 마찬가지로 제국 출신의 대귀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빛 코트에 ‘묵시록의 붉은 용’을 문장으로 새겨넣은 남자였다.

“어서 오십시오, 바르무어 후작 각하.”

대륙 최고 8개 명문 마탑 《에인션트 리그》의 정점에 서는 제1마탑의 수장이자, 황제 앞에서 유일하게 ‘왕’의 이명을 쓸 수 있는 제국 귀족.

“─베르나르트는 어디에 있지?”

마도왕 바르무어가 싸늘하게 되물었고, 시엔이 시치미를 뗐다.

“글쎄요, 무슨 말씀을 하는지.”

“…….”

침묵 끝에 마도왕이 멈춘 걸음을 마저 옮겼다.

제국에서 초청받은 귀족들은 이 나라의 전통에 어울리길 거부하며, 저마다 눈에 띄는 황금빛 옷감이나 자수에 문장을 과시하는 식으로 구별 짓는다.

마치 자기들은 이런 천박한 축제에 어울릴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듯이.

뒤이어 행차가 시작된 샤를마뉴 왕국 역시 다르지 않았다.

“참으로 떠들썩하고 멋진 풍경이네요.”

오직 하나, 그녀를 제외하고.

눈 주위를 가리는 흑금(黑金)의 나비 마스크와 주름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핏빛의 드레스. 거기에 그녀의 정체를 짐작할 상징은 보이지 않는다.

“로젤리아 샤를 공주 저하.”

그러나 샤를마뉴 왕가의 상징, 백합 문장을 새겨넣은 왕자와 공주들 사이에서 그녀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가끔은 이런 식으로 ‘가면을 벗고’ 사람들과 춤추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네요.”

“안전에 주의해 주십시오, 공주님.”

“모처럼 이런 축제를 즐기지 못하다니, 무척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축제는 오늘이 끝이 아닙니다.”

신성 제국에 이어 샤를마뉴 왕국, 끝으로 곧 당도할 칠왕국에 이르기까지.

하나둘씩 모여드는 대륙 유수의 귀족들을 뒤로하고 시엔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제 시작일 뿐이지요.”

* * *

총독궁 내 3층의 커다란 일실.

천장과 실내 전체가 거장들의 예술품 따위로 사치스럽게 장식된 그 방에는 ‘대 평의회실’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성년이 된 귀족 모두가 평등하고 공화주의적으로 이 나라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 모두를(실질적으로 2,000명 남짓을) 수용할 수 있게 설계된 대규모 회의실.

“영광스럽게도 모두의 앞에서 오늘의 사육제 진행을 맡게 될…… 《얼굴 없는 자》라고 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마스크 너머로 능청스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아직 ‘칠왕국의 손님’들께서 도착하지 않으신 바, 부디 이 광대가 재롱을 부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지요.”

얼굴 없는 자의 말에 그란델 대공이 싸늘하게 내뱉었다.

“시시하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 동시에 그 깊숙한 데서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이글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쉽게 평정을 무너뜨리는 일이 없는 ‘얼굴 없는 자’조차 압도되어 숨을 삼킬 정도의 위압감.

이러니저러니 해도 검마 오스왈드는 대륙 최강의 강자, 그 속에서도 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강자다. 동시에 그는 라일라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강자의 여유를 알지 못했다.

당장 그 곁을 수행하는 제국 최강의 기사 조직, 철십자 기사단의 강자들이 그러하듯.

제국을 수호하는 강철의 검.

교회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니다. 아무 까닭 없이 명분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 검을 쥐는 그란델 대공 가문이 제국과 황제의 대리를 자처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흠, 뭐가 시시하죠?”

그 순간, 침묵 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공께서는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기다림을 달리 해결할 방법이라도 있으신지요?”

흑금의 나비 마스크를 쓰고 정체를 가린 로젤리아 샤를의 목소리였다.

“로젤리아, 그란델 대공 각하 앞이다. 말씀에 조심하거라.”

이윽고 백합 문장을 과시하듯 새겨넣은 코트 차림의 남자가 대답했다.

“왕국을 이끌어갈 자는 무릇 매사의 말과 행동에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그렇지 않니?”

마치 그녀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샤를마뉴 왕국의 후계자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목소리로.

“유의하지요, 오라버니.”

로젤리아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바로 그때였다.

“왜들 그렇게 심각해?”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광대 서커스 좋아하는데.”

“아, 그것참 힘이 되는 말씀이네요.”

너무 어리지도 않고 많지도 않다. 높게 봐야 열다섯 살 정도의 목소리.

갈색 곱슬머리에 주근깨투성이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뒤를 따라 ‘신사도의 나라’라 알려진 칠왕국의 명가들이 잇달아 문장을 과시하며 나타났다.

“그런데 이걸 어쩌죠, 이미 손님이 다 와버린 것 같군요.”

“그럼 뭐 짧은 거라도 없어?”

칠왕국의 행차를 대표하는 소년이 물었다. 주위의 눈빛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짓궂고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수수께끼가 하나 있지요.”

“해봐.”

“그렇게까지 듣고 싶으시다니 기꺼이─”

흠, 흠, 하고 몇 차례 헛기침하며 얼굴 없는 자가 말했다.

“평화를 얻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뭐지?”

“정답은 ‘전쟁’입니다.”

얼굴 없는 자가 소리 높여서 대답했다.

“평화를 바라는 자, 전쟁을 준비하라! 어때요, 세상에 이렇게 웃기는 농담이 또 있을까요? 으히, 으히힉.”

자기가 말해놓고도 그 대답이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홀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낄낄거렸다. 우스꽝스러운 농담에 그야말로 숨이 넘어갈 것처럼.

“…….”

덧붙여 그 이외의 웃음이 들리는 일은 일절 없었다.

“그게 다야?”

“웃기지 않으신가요?”

“웃겨?”

“어, 아니……, 그…….”

“전쟁이 웃기냐고.”

“아니요…….”

그렇지 않아도 얼음장 같았던 분위기가 더더욱 싸늘해졌다.

“시시하네.”

소년이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시엔이 앞을 가로막은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그쯤 하시지요, 멀린 경(Lord Merlin).”

요정왕 멀린.

칠왕국의 일곱 왕 중 하나이자, 원탁의 이름 아래 결속된 기사 조직의 유일한 마법사.

멀린의 손가락에 휘감겨 있는, 가느다란 마력의 살기를 눈치채고 시엔이 말했다.

“저 친구가 유머 감각이 좀 뒤틀려서 그렇습니다.”

“그래? 저 친구랑 사이가 좋은 모양이네.”

“이 나라에 우리랑 사이가 나쁜데 살아 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아하.”

새하얀 망령의 가면을 쓴 시엔이 대답했다. 손가락에 휘감겨 있던 마력을 되돌리며 멀린이 비웃는다.

“그럼 쓸데없는 짓거리는 그쯤하고, 내 걸음이 헛걸음이 되지 않을 상품을 보여야 할걸.”

“아, 그야 기꺼이 보여드려야죠.”

그제야 비로소 침묵하고 있던 얼굴 없는 자가 입을 열었다.

“마침 사육제 경매의 첫 상품이 무려! 아발론의 황금나무 뿌리 지팡이네요! 경매 시작 가격은─”

“그 지팡이는 내 거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멀린이 즉답하고 ‘입찰’을 희망했다.

“그리고 내 지팡이에 상회 입찰하는 새끼는 죽여버린다.”

신사도의 나라 출신이라고 생각될 수 없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나도 입찰하지.”

바로 그때, 침묵하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방금 내 말 못 들었냐?”

“경매의 규칙에 따라 세 배의 가격을 부르겠소.”

제국 최고 명문이라 불리는 8개 마탑, 에인션트 리그의 정점에 서는 대륙 제일의 인간 마법사.

마도왕 바르무어.

“바르무어, 이 대가리에 피도 덜 마른 핏덩어리 새끼가…….”

동시에 이 세계에서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천박하고 상스러운 비속어가 흘러나왔다.

“듣기로 아발론의 사과나무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정순한 마력을 가진 황금사과가 열린다지. 하물며 그 나무의 뿌리로 이루어진 지팡이라니─ 이 정도 출혈은 충분히 감내할 가치가 있어 보이는데.”

“이야,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시네.”

‘신사도의 나라’에서 온 예의 바른 소년이 비웃었다.

이 자리에서 취급되는 것은 보통의 아티팩트가 아니다. 대륙 전체에 명성을 떨칠 정도로 이름이 알려진 최고위 아티팩트…… 신기다.

애초에 대륙에 명성을 떨쳤다는 것은, 가령 아서왕의 엑스칼리버나 롤랑의 뒤랑달처럼 ‘그것을 쥐는 소유자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는 것을 뜻했다.

무기가 자기 혼자 걸어 다니며 무명을 떨칠 리 없으니까.

멀린의 전설을 상징하는 아발론의 황금나무 지팡이 역시 예외가 아니다.

소유자들이 목숨처럼 아끼는 자신의 일부. 그럼에도 역사에 기록될 패배나 협상 속에서 내장을 뱉어내는 심정으로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들.

“공께서 내 부친에게 패배하고 이 지팡이를 잃어버린 게 벌써 20년 전 일이지.”

“그래, 그럼 더 잘 알겠네.”

멀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조소했다.

“네 애비는 몰라도, 네놈은 절대로 그 지팡이를 못 써.”

“…….”

앳된 소년의 얼굴로 20년 전의 일을 마치 어제처럼 생생히 되새기며.

“그 잘나신 애비 손에 있어야 할 내 지팡이가, 구르고 굴러 이 동네 집구석까지 굴러들어온 게 그 증거지.”

대륙 역사 속에서 족적을 남길 정도로 강력한 전승(傳承)을 가진 신기는 별개의 의지를 가진 생물이나 다름없다. 허락 없이 명마의 등에 탈 수 없듯, 신기 역시 마찬가지다. 어쩌다 운 좋게 손에 들어왔다고 해서 멋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쓸모없는 애물단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차라리 비싸게 팔아먹는 게 낫다고 생각했겠지.”

그렇기에 이 자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일찍이 역사 속으로 가라앉았다 떠오른 ‘임자 있는 전설의 무기’를, 나이트워커 가문의 신뢰를 빌려 저마다의 이해득실 속에서 처분하는 자리.

그것이 바로 이 기이하고 수상쩍은 경매의 정체성이었다.

일명 《얼굴 있는 자들의 경매회》.

“좋아, 다시 3배로 부르지.”

“멀린 경, 시작 가격의 9배로 입찰.”

“이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 아니, 못 해.”

멀린이 결코 타협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을 잇는다.

“여기서 내 지팡이에 상회 입찰하는 새끼는, 요정왕의 이름을 걸고 지금 당장 죽여버릴 테니까.”

그 말대로다. 자신의 신기를 잃어버린 자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무슨 출혈이라도 감수할 것이다.

“흠, 아무래도 나 역시 그 이상 상회해 입찰할 여력은 없군.”

바르무어가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 이상의 바가지를 씌우기에는 너무했다고 생각했는지, 혹은 그저 순순히 요정왕의 위협에 겁먹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정당하게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 자, 그리고 그것을 처분하려는 자, 그들 모두를 불러 모아 나이트워커 가문의 신뢰를 통해 뒤끝 없는 거래를 마치는 것.

그것이 바로 별과 단검의 이름이 쌓아 올린 절대적 신뢰의 상징이었다.

* * *

그 뒤로 다섯 개의 신기들이 차례대로 낙찰되었다.

유독 치열했던 멀린의 황금나무 지팡이를 제외하고, 경매 자체는 생각보다 맥없이 이루어졌다.

“자, 그럼 이걸로 경매의 종료를…….”

경매의 끝에 이르러 얼굴 없는 자가 고개를 숙였다.

바로 그때였다.

“누구 멋대로 경매를 끝내지?”

기척조차 없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곳에 있는,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생각하는 강자들조차 마스크 너머로 당혹을 감추지 못할 정도의 낯선 기백.

순백의 모피 코트를 걸친 흑발의 귀공자가 그곳에 있었다.

유일하게 이 자리에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자기 얼굴을 드러내며.

“로드 체사레.”

대륙 전체를 통틀어 그 수가 손에 꼽히는 최고위 뱀파이어─. 그 정도 괴물을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를 리가 없다.

“제가 듣기로, 얼마 전 대륙 역사상 유례없이 커다란 규모의 ‘운명의 창’ 파편이 발굴됐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운명의 창이라고─?”

“마침 그 정도의 신기를 상품으로 다룰 데를 생각하니, 아무래도 이곳밖에 생각이 나지 않더군요.”

뜻밖의 말에 장내에 동요가 깃들었다.

“그나저나 참 이상하네요.”

체사레가 말을 잇는다.

“나이트워커 가문은 그 무엇보다 신뢰를 중요시하는 가문이라 들었는데…….”

뱀이 기어가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미소와 함께 흘끗 그의 송곳니를 드러내며.

“그 정도 신기를 상품으로 손에 넣고도 어째서 경매에 올리지 않고 침묵하는지,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와, 나도 꼭 들어보고 싶네.”

요정왕 멀린이 즉답했다.

“살다 살다 저 노친네가 맞는 말을 할 줄이야. 이래서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

눈앞의 존재, 천 년 가까이 살아온 뱀파이어의 존재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드는 일 없이.

“정말 운명의 창을 손에 넣고도 침묵했나?”

침묵 끝에 검마 그란델 대공이 입을 열었다.

“그렇답니다.”

뒤이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흑색의 벨벳으로 된 모레타(Moretta) 가면과 싸구려 로브로 정체를 감춘 채, 그곳에 있는 이들의 시중을 들고 있던 하녀의 목소리였다.

“히, 히이이익!”

가까이 있던 제국 측의 귀족 하나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실로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추태. 그러나 그들 누구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어째서지?”

그란델 대공이 되물었다.

“그야 그 창은 ‘상품’ 따위가 아니니까요.”

하녀─ 아니,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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