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베네토 카니발 (2)
“운명의 창은 상품 따위가 아니랍니다.”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규칙에 따라 이곳 얼굴 있는 자들의 경매에서 취급되는 것은 오직 ‘전승의 당사자’가 살아서 존재하는 신기─.”
“운명의 창은 아니지요.”
그녀의 말을 받아 시엔이 대답했다.
“누가 이 창의 소유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아들을 찔러 죽였다고 일컬어지는 어느 병사의 창. 손에 쥐는 것으로 세상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일컬어지는 신기 중의 신기.
“틀린 말씀은 아니네요.”
로젤리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동의했다. 적어도 그들이 사는 세계에서 나이트워커 가문의 명분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흠, 정말 그럴까요?”
체사레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유감스럽게도 제가 가진 ‘운명의 창’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지 않아서 말이죠.”
신기의 소유 자격은 왕위 계승 서열과 같다.
쉬울 때는 무척이나 알기 쉽다. 왕이 죽고 1왕자가 왕위를 물려받는 경우처럼.
역으로, 꼬일 때는 끝도 없는 개족보가 돼서 꼬일 수 있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다.
“저는 신의 아들이 창에 찔려 죽는 역사의 순간을 이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것참 영광스럽기도 하셔라.”
바로 지금 같은 경우처럼.
“그 순간, 부서진 창날 조각을 손에 넣은 그날부터 저는 이 신기의 가장 커다란 지분을 차지했고─ 천 년의 삶을 바쳐 이 창을 좇아왔지요.”
“천 년을 바쳤는데도 그것밖에 되지 않은 걸 보니, 아무래도 체사레 공이야말로 신기의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닐지.”
라일라가 태평하게 되물었다.
“설령 그렇다 쳐도, 공께서 천 년 전에 정말 신의 아들이 죽는 모습을 봤다는 걸─ 무슨 수로 믿을 수 있죠?”
“나이트워커 가문이 좋아하는 말이 있지요.”
그 말에 체사레가 두 팔을 뻗으며 미소 짓는다.
“진실은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후우웅!
딛고 있는 그의 발밑으로, 그 무슨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이형의 힘이 휘몰아쳤다.
오러도 마력도 아니고, 에너지도 아니다. 좀 더 형이상학적이고 형용할 수 없는 궁극의 힘이었다.
「운명을 조작하는 힘」.
패색이 너무나 짙어 도무지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전쟁터의 운명, 일류 암살자의 표적이 되어서 꼼짝없이 죽는 날을 기다려야 할 운명.
심지어 ‘불사의 존재는 인간처럼 성장할 수 없다’는 저주 같은 운명도 극복할 수 있는 기적의 이능.
“그 창은 나의 것이다, 어린 소녀야.”
바로 그 전능감을 휘감고 체사레가 차갑게 내뱉었다. 까마득할 정도의 삶을 살아온 괴물로서, 눈앞에 있는 필멸자의 삶을 조롱하며.
무엇이라도 할 수 있고 무엇이라도 바꿀 수 있을 듯한 능력, 주위에서 바람처럼 불고 있는 ‘운명의 기류’를 몸에 휘감고서.
스릉.
기사들이 칼자루 위에 손을 얹는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섣불리 검을 뽑지 못했다.
특히나 신성 제국에서는 더더욱.
역설적으로 ‘신의 나라’라 일컬어지는 신성 제국이기에, 저 운명의 창에 깃든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던 것이다. 설령 그게 얼마나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헛소문이라 할지라도.
“정확히는 저의 것이 될 운명이지요,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
체사레가 말했다.
“신의 뜻이 깃든 운명을 가로막지 마십시오.”
“그게 정말 신의 뜻이기는 합니까?”
바로 그때, 시엔이 되물었다.
“체사레,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 자리에서 우리 가문을 적으로 돌리고 살아남는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아, 그야 확실히 그렇겠죠.”
흑발의 귀공자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는 뒷배도 세력도 아무것도 없는 늙은 괴물에 불과하니까요. 밤을 걷는 자는 물론, 이곳에 있는 어느 세력을 적으로 돌려도 살아남지 못할 외롭고 가엾은 늙은이랍니다.”
“그럼 뭘 믿고 여기까지 와서 다짜고짜 그것을 내놓으란 겁니까?”
모두가 알고 있다. 눈앞의 존재는 괴물이다. 동시에 괴물이기에 인간과 같은 조직의 결속력이 없다.
그렇기에 아무리 강력한 괴물이라도 국가를 적으로 돌리고 살아남을 수는 없다.
“듣고 보니 체사레 공의 주장이 합리적으로 들리는군.”
─그것이 바로 체사레가 믿는 구석이었다.
존재 자체로 국가 사이의 저울추를 뒤흔들 신기를, 하물며 운명의 창쯤 되는 신기를 누구도 아니고 나이트워커 가문이 손에 넣는다는 것을 그들이 달갑게 여길 리 없던 까닭에.
그럴 바에야 차라리 뒷배도 아무것도 없는 괴물이 손에 넣는 쪽이 낫다. 눈앞의 괴물은 절대로 국가의 위협이 될 수 없을 테니.
“그에게는 ‘운명의 창’의 소유주를 자청할 자격이 있소.”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그란델 대공과 바르무어 후작, 심지어 믿고 있었던 로젤리아 샤를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 말에 시엔이 웃음을 터뜨린다. 라일라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더할 나위 없이 공화주의적이기 이를 데 없는 풍경에 조소하며.
“좋습니다. 그럼 ‘경매’를 하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것은 알기 쉬운 자선사업이 아니다. 돈을 내고서 그에 걸맞은 가치의 상품을 사고파는 경매장이다.
하물며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나이트워커 가문이 절대로 그 상품을 놓칠 의지가 없었다.
“경매라니, 누구랑 경매를 하려고?”
그 순간, 침묵하고 있던 요정왕이 입을 열었다.
“댁들 전부, 아까 저 새끼가 내 지팡이 상회 입찰한 거 봤지? 자기가 내놓은 상품을 자기가 얼마나 높은 가격에 불러봐야 의미가 없지. 다 쇼라고.”
그저 상품을 더 비싼 값에 부풀리기 위한 위장일 뿐.
“하물며 이 거래의 수수료는 오롯이 나이트워커 가문의 것, 설령 억금(億金)을 불러도 자기가 자신에게 지불하는 걸로 끝이지.”
“그 말대로 경매가 성립하지 않겠군.”
자기 수중에 있는 상품을 자기가 아무리 비싼 값에 부르고 사봐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짓이다.
“동감이네요.”
신성 제국, 칠왕국, 샤를마뉴 왕국 모두가 입을 모아 체사레 쪽의 명분에 손을 들었다.
“그럴 것 같았답니다.”
그들의 대답을 듣고 라일라가 미소 짓는다.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시엔.”
“알겠습니다, 가주님.”
그녀의 말에 따라 시엔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을 준비해라.”
시엔의 명령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 시종들이 자루를 가지고 와서 내용물을 가득 쏟아부었다.
총독궁 3층의 대 평의회실.
이 나라의 모두가 공화주의적 이념에 따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400평 남짓의 터무니없는 크기로 설계된…… 그 방 전체를 가득 채우려는 듯이.
보석과 재화였다.
앞서 요정왕과 바르무어가 나누었던 금액 따위는 그야말로 푼돈조차 되지 않는, 터무니없는 분량의 금과 보석들.
끝도 없는 금은보화의 자루가 쏟아져 그곳에 내용물을 붓고 사라지고, 마치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를 집어삼킬 것처럼 황금과 보석이 가득 차올랐다.
“이게 우리 가문의 입찰 가격이랍니다.”
금과 보석의 바다를 두 발로 딛고 라일라가 말했다.
“누구에게 지불하겠다는 거죠?”
체사레가 조소하며 되물었다. 그깟 눈속임 따위로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냐는 듯이.
“별과 단검의 신뢰에.”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리고 이 세계에.”
“─.”
그녀가 보란 듯 두 팔을 벌린다.
이어지는 그 동작에, 최고위 뱀파이어 체사레가 느닷없이 끼어들어 ‘운명의 창’의 힘을 행사할 때조차 꿈쩍하지 않은 강자들이 움직였다.
“!”
검마 그란델 오스왈드가 칼자루 위에 손을 얹었다. 검성 롤랑 드 뒤랑달이 당장이라도 칼끝을 발검할 수 있도록 엄지손가락을 걸었다.
그들이 거느린 휘하의 기사들은 물론, 마도왕 바르무어나 요정왕 멀린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 어느 때조차 쉽사리 평정을 잃지 않는 대륙 제일의 괴물들이 동요하고 경계 태세를 갖춘다.
바로 그곳에서 펼쳐지는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의 「자세」 앞에서.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
나이트워커 가문의 그랜드마스터, 당대 최강의 암살자, 그녀의 정수가 응축된 하나의 동작에.
“아무도 검을 뽑지 마라! 자리를 지켜라!”
검마 그란델이 평정을 깨트리고 소리쳤다.
그의 곁을 지키는, 그 누구도 아니고 대륙 최강의 기사 조직 중 하나라 일컬어지는 제국 제1기사단─ 철십자 기사단을 향해서.
그들 역시 바보가 아니다. 이런 뜻밖의 사태 앞에 당황할 정도로 어리숙한 자는, 애초에 이런 장소에 올 수조차 없다.
그러나 세상에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스릉.
본능적으로 검을 뽑는 자가 있었다.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것도 울려 퍼지지 않는 세계 속에서, 홀로 아스라하게.
“……아.”
철십자 기사단의 가장 어린 막내, 촉망받는 엘리트, 그렇기에 이 자리에 기꺼이 검마 그란델 대공을 보좌하며 수행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그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괴물 앞에서 자신의 실수를 깨닫는 순간, 그 전부가 무의미해졌다.
‘죽었다.’
그게 그의 감상이었다. 그랬어야 했다.
카앙!
─동시에 부하의 앞을 가로막고 등을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제국 최강의 기사, 검마 오스왈드 그란델.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그가 눈앞의 명예와 사욕에 눈이 멀어 앞길을 구분할 줄 모르는 멍청이라고 부른다.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다. 적어도 그 남자에게 충성하는 제국 제1기사단의 이들 중 그 사실을 모르는 바보는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제국 제1기사단 역시, 아무 이유 없이 바보에게 충성과 목숨을 바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자신을 죽였어야 할 암살자의 칼날이 가로막혔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칼끝에 가로막혀서.
“라일라 나이트워커……!”
“엄살도 심하셔라.”
남자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앞에 있는 여자가 말했다.
“저는 딱히 아무도 죽일 생각이 없었답니다.”
“……!”
검성 그란델이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쩌적, 쩍.
어디서 거북이 등딱지가 갈라지는 것처럼, 곳곳을 따라 무엇이 찢어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사람을 향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주제넘게 검을 뽑았던 어린 기사가 죽음을 자초했을 뿐.
“내 부하는 죽게 놔두지 않는다.”
“아, 그러신가요.”
그 죽음을 내버려 둘 제국 최강의 기사가 아니었다.
“쓸데없는 수고를 덜어주셨네요.”
라일라가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동시에 그곳을 가득 메우고 있던 황금과 보석들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마치 이 세계가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은 파쇄와 참격.
황금을 두 조각 내봐야 두 조각이 되어버린 황금이 있을 뿐이다. 두 쪽이 된 보석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녀의 참격 앞에 부서져 흩날리는 황금과 보석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사람이 불타서 뼛가루가 남고, 뼛가루조차 불타 잿더미가 되어 흩날리는 것처럼─.
400평 남짓의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던 황금과 보석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