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베네토 카니발 (3)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던 황금과 보석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말 그대로 소멸했다.
마치 사람들에게 부(富)와 재물이 얼마나 허무하고 덧없는지 교훈을 주려는 동화처럼─.
“이것이 우리 나이트워커 가문의 ‘입찰가’랍니다.”
일일이 그곳에 쌓은 금화를 세고 보석의 개수를 헤아릴 필요조차 없었다. 그저 압도될 뿐이다.
대륙 제일의 부를 자랑하는 베네토 공화국, 그리고 그 공화국의 정점에 서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위세에.
“자, 달리 입찰을 희망하시는 분?”
규칙에 따라 이 경매에서 상회 입찰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 3배 이상의 값을 불러야 한다.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3배는커녕 그들이 방금 치른 재화의 발끝을 따라가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다들 보셨다시피,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형태로 값을 치렀지요. 그렇지 않나요?”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 피를 흘린 이상 기어코 끝을 볼 수밖에 없으니까. 그 의미를 헤아린 체사레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동요의 감정이 깃들었다.
“이 어린 계집이…….”
동요 끝에 체사레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송곳니를 드러내려는 찰나였다.
스릉.
“거기까지다.”
깨달을 틈도 없이 체사레의 주위를 둘러싸고 칼끝을 겨눈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이 있었다.
웃는 남자, 밴시, 늙은 암살자, 마녀 사냥꾼…….
“초대받지 않은 손님께서는 이쯤에서 물러나 주시길.”
“응, 소란은 딱 질색이거든.”
《웃는 남자》 요한의 말에 그레텔이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 년을 살아온 최고위 뱀파이어, 체사레는 괴물 중의 괴물이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하이마스터들 역시 결코 그에 뒤지지 않을 괴물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체사레와 달리 혼자가 아니었다.
“네놈들이 뭐라고 지껄여도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겨누어진 칼날 사이에서 체사레가 증오를 벼리며 말했다. 그 말에 라일라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말씀, 그대로 돌려드리지요.”
* * *
나이트워커 가문은 값을 지불했다. 별과 단검의 신뢰가 어쩌고 세계가 어쩌니 하는 추상적이고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라일라가 없애버린 재화는 그들 가문조차 우습게 넘길 규모의 지출이 아니다. 나이트워커 가문과 공화국의 힘은 돈에서 비롯되고, 당장 가문의 재정에 천문학적 타격을 입었다는 뜻이다.
그게 그들 가문이 치른 대가였다.
장기적으로 ‘운명의 창’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그들이 치른 지출은 가문과 공화국에 즉각적인 손실과 전력 약화로 이어질 것이다. 그것도 그 자리에 있는 이들, 심지어 나이트워커 가문을 적으로 여기는 이들조차 모두가 납득할 정도로─.
“미래를 위한 투자는 얼마라도 아깝지 않지.”
경매가 끝나고 축제의 이튿날 새벽. 수도의 별장 저택으로 돌아온 라일라가 미소 지었다.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녀의 가족들을 뒤로하고.
“터무니없는 지출이었어, 라일라.”
“세상에 공짜로 바뀌는 운명은 없는 법이니까요, 오라버니.”
“바꿀 가치가 있는 운명이길 빌어야겠구나.”
“분명 있을 거야.”
그레텔이 의심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아니고 시엔이니까.”
“맞아, 멍청이 그레텔한테 투자했다가는 지금쯤 다 같이 바닷물 수온이나 재고 있을걸?”
“그러는 오빠야말로 얼마 전에 라파엘로한테 속아서 용돈 다 까먹었잖아!”
“그 생선대가리 자식…….”
그레텔이 뾰로통해서 소리쳤고, 헨젤이 다시 기억하기도 싫은 악몽에 얼굴을 찌푸렸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
여느 때처럼 티격태격하는 남매를 뒤로하고 시엔이 말했다. 그저 알기 쉬운 자신감이나 확신에 찬 목소리가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그렇겠지.”
라일라 역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설령 진실을 확신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너를 믿을 거란다.”
“그게 가족이니까 말이야!”
그레텔이 미소 지으며 맞장구쳤다. 설령 그녀처럼 직설적이고 낯간지럽게 말하지는 않아도,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각오를 다진 시엔이 팔을 뻗었다. 시엔의 손에 들리기 전까지는 그저 부서진 창날 파편에 불과했던 그것을.
운명의 창.
그것도 유례없을 정도로 커다란 파편이자 가장 뾰족하게 솟은 창날 끄트머리 일부.
게다가 더욱 공교롭게도, 그것은 마침 시엔이 손에 넣고 있던 조각의 윗부분과 퍼즐처럼 정확히 맞물리며 하나의 형태를 자아냈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처럼.
후우웅!
동시에 창날의 조각이 맞물리는 순간, 처음 운명의 창을 쥐었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화감이 시엔을 집어삼켰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아홉 가지 검식, 테레지아 경의 제비반전술, 베르나르트 후작의 암흑물질 학파, 염동 학파를 비롯한 마법, 지금의 시엔을 있게 해주는 그 어떤 힘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형의 힘이.
“─.”
새삼스럽게 신기 앞에서 자격을 증명하는 일 따위는 불필요했다. 이미 증명했으니까.
“그래, 뭐가 좀 달라진 게 느껴지니?”
요한이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 나머지 가족들 역시 조심스럽게 그 대답을 기다리며 시엔을 주목했고, 시엔이 짐짓 담담하게 대답했다.
“……돈값은 하는 것 같네요.”
* * *
수도 베네토. 도시 상류층이 거주하는 업타운 주택가 끝자락의 어느 저택.
새 부리 가면과 검은 코트를 두른 수상쩍은 남자들이, 흘끗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저택의 외벽(外壁)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대리석에 부딪혀야 할 남자들의 몸이 그대로 녹아들며 아무렇지도 않게 벽을 통과했다.
저택 내부는 밤하늘의 어둠을 밝히는 폭죽의 불꽃도 없고 조명도 없다. 오히려 축제가 무르익은 거리보다 훨씬 어둡고 불길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베르나르트.”
어둠 속에서 새 부리 마스크를 쓴 남자들이 잇달아 입을 열었다.
“순순히 투항할 경우, 폐하께서는 기꺼이 공의 안전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폐하께서는 마법사로서 각하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고 계십니다. 마도의 탐구 역시 지속할 수 있을 겁니다.”
“제국이라 해도 폐하의 ‘왕국’에서는 쉽사리 손을 쓸 수 없을 테지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회유하는 듯한 남자들의 말이 이어졌고, 침묵 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말로 약속할 수 있나?”
베르나르트의 머뭇거리는 듯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남자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놈이 이곳에 있다.”
직전까지 그를 달래고 어르려는 듯한 말투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마치 덫에 걸린 사냥감을 취급하는 것처럼 감정 없는 말투.
그들의 손끝에서 일제히 저택의 어둠을 걷는 불빛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그 불빛이 주위의 그림자를 거두고, 그곳에 있던 남자의 정체를 비추었다.
새하얀 망령의 가면을 쓴 실루엣이 그곳에 있었다.
“─!”
깨닫고 보니 어느새 거리가 좁혀졌다.
섬광처럼 휘몰아치는 쇄도 끝에 칼날이 휘둘러졌다.
후웅!
그러나 실루엣의 손에 휘둘러진 칼날이 남자들의 몸에 닿는 순간, 칼날은 아무것도 베지 못하고 그대로 그들의 육체를 통과했다. 마치 실체 없는 허깨비를 베는 것처럼 덧없이.
앞서 저택의 외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했던 것과 같다.
물질 조작 학파의 6위계 마법, 투과(透過).
겉으로 보기에 그리 특별해 보일 것 없는 기초 마법처럼 보여도, 실제로 이 조촐하고 별것 없는 행위를 일으키는 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도의 연산과 이해가 필요하다. 하물며 그것을 실전에서 자유자재로 응용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칼날이 그들의 몸을 투과하는 동시에, 다시금 그들의 손끝에서 마력이 일렁였다.
“!”
그 움직임을 깨닫고 실루엣이 재빨리 땅을 박찼다.
뛰어오르듯 땅을 박차는 순간, 실루엣이 있던 발밑에서 돌로 된 기둥이 솟아났다.
그저 발밑에서 기둥을 세워 올리는 게 다가 아니다.
실루엣의 로브 끝자락이 나부끼며 솟아나는 기둥에 닿고 스치자마자, 기둥 속에 강제로 빨려 들어가며 고정됐다.
「강제 결합」 내지는 「삼키는 기둥」이라 불리는 물질 조작 마법.
흩날린 로브가 기둥에 끼이고 그대로 삼켜졌다. 동시에 로브가 벗겨지고 그 밑에 숨겨진 복장이 드러나자, 새 부리 마스크의 남자들 사이에서 숨길 수 없는 당혹이 흘러나왔다.
“살짝 정보를 흘렸다고 덥석 미끼를 물어버릴 줄이야.”
검게 옻칠이 된 가죽 코트였다. 코트 자락 위로 별과 단검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마법사란 참 알다가도 모를 족속들이지.”
“시엔 나이트워커…….”
시엔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누구보다 지혜롭고 총명해야 할 지식의 탐구자들이, 실전에서는 하지 말란 짓만 골라서 저지르니 말이야.”
“─.”
시엔의 발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류가 불길하게 요동쳤다. 동시에 그 정체를 모를 그들이 아니다.
촤악!
재차 시엔의 칼끝이 휘둘러졌다. 그러나 아까처럼 육체를 투과시켜 피해야 할 그들의 몸이, 마치 갈퀴에 걸린 잡초처럼 얽히며 찢어지고 피를 뿜어냈다.
마치 절대 도망칠 수 없는 ‘어떤 힘’에 강제로 붙들린 것처럼.
“아아아악!”
새 부리 마스크의 남자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그 모습에 자포자기하듯 중얼거렸다.
“운명의 창…….”
물론 그들은 마법사들이다. 운명 같은 비과학적 개념 따위는 믿지 않는다. 사실대로 말해서 그들은 신조차 믿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신성 제국이라는 신의 나라 속에 마법사들의 왕국이 세워진 이유였으니까.
동시에 그들조차 거기에 깃든 힘, 가능성과 인과(因果)를 조작하는 초월적 에너지에 대해서는 그 존재를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란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그리고 그 힘 앞에서 그들이 살아남을 방법 따위는 없다는 사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우, 우린 다 죽었어…….”
무슨 수를 써도 바꿀 수 없고 바뀌지 않는 예정된 미래. 운명이란 극복할 수 없기에 운명이다.
바로 그때였다.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
“─.”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있던 마법사들의 머리 위로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고리가 내려앉는다.
“오, 하느님……!”
그 빛을 보자마자 마법사 하나가 무릎 꿇고 흐느꼈다.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금빛의 고리가 신이 내려준 구제의 빛이라도 되는 것처럼.
“저의 믿음이 부족했나이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법사는 신을 믿지 않는다. 신이란 나약한 인간이 의지하기 위해 빚은 허상에 불과하니까.
바로 이곳에 있는 인간들처럼.
콰직!
그들의 머리를 후광처럼 둘러싼 빛의 고리, 헤일로가 꿈틀거렸다.
툭, 후두둑.
깨닫고 보니 그곳에 있는 이들의 목 위쪽이 사라졌다. 죽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잘린 머리가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잘린 목 위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요즘 어린 것들은 말이야. 낭만이 없어요, 낭만이.”
그들의 머리 위에 드리운 빛의 고리─ 헤일로(Halo)는 알기 쉬운 구제의 손길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나 시엔의 손에 죽었어야 할 그들의 ‘운명’을 바꾸는 데는 충분했다.
“확률이 어쩌니 데이터가 어쩌니, 그깟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숫자놀음을 마법이랍시고 붙들고 있으니 말이야.”
금색 지팡이를 쥐고 있는 주근깨 소년이 말했다.
“멀린 경이 이곳에는 무슨 일입니까?”
요정왕 멀린.
바르무어 가문이 지평을 열었다 일컬어지는 대륙 마법 학계의 주류…… 일명 ‘분석주의 마법’의 대극에 있는 구시대 마법의 상징, 원시(原始) 마법을 구사하는 구닥다리 마법사가 말했다.
“너네끼리 놀지 말고 나도 좀 끼워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