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베네토 카니발 (4)
“나도 모처럼 되찾은 지팡이를 시험해 보고 싶어서 좀이 쑤시거든.”
요정왕 멀린이 말했다.
그의 마법을 마지막 순간까지 신이 내려준 광륜(光輪)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나약한 인간들의 목 없는 시체를 뒤로하고.
“왜, 나랑은 못 놀아 주겠냐?”
“……잠시 놀아 드리는 것 정도는 괜찮지요.”
눈앞의 상대로는 성에 찰 리 없는 시엔 역시 마다할 게 없는 싸움이었다.
“그래, 나도 바쁘다는 놈 오래 붙들고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곱슬머리의 주근깨 소년, 멀린이 입가를 비틀며 미소 짓는다. 앳된 소년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자조를 머금으며.
“늙은이 푸념이나 들어주는 셈 치자고.”
“그 정도야 어려운 것 없죠.”
“어린놈이 보기보다 싹수가 있네.”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금빛 지팡이가 찬란하게 빛을 뿜었다.
아발론의 황금나무 뿌리 지팡이.
소유자와 함께 대륙의 역사에 족적을 남기고 이름을 떨친 최고위 아티팩트, 신기 중 하나. 그 지팡이를 손에 쥐고 멀린이 입을 열었다.
“□□■■■□■──.”
시엔이 이해할 수 없는 이형의 읊조림. 그게 요정의 언어로 속삭이는 마법의 주문이란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앞서 제국 제1마탑의 마법사들을 집어삼켰던 빛의 고리가 어느새 시엔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거기에 깃든 살기를 못 알아보고 목이나 씻고 기다릴 시엔이 아니었다.
사람의 목뼈를 종잇장처럼 찢어버릴 수 있는 광륜(헤일로)이 고속으로 회전하는 원형 톱날처럼 쇄도했다. 사방에서.
재빨리 몸을 뒤틀어 피하기 무섭게, 시엔을 지나친 헤일로들이 멀린의 주위로 모여들며 그의 팔다리에 걸린다. 팔찌나 발찌 같은 액세서리처럼.
“재미있는 힘이네.”
동시에 그의 광륜이 시엔을 노릴 때, 강제로 광륜의 궤도를 뒤틀었던 ‘이형의 힘’을 놓치지 않았다.
“신의 아들을 죽이고 운명을 조작하는 힘이라.”
“운명의 창에 대해 아는 게 있습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내가 무슨 힘을 쓰는지도 제대로 모르는데.”
시엔의 물음에 멀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법이란 이해할 수 없으니까 마법이거든.”
동시에 멀린의 팔다리에 걸려 있던 광륜이 입자의 형태로 스러지며 흩날리더니, 일대를 금빛의 세계로 집어삼켰다.
“신비를 경외하고 예의를 갖춰라.”
어느덧 금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세계를 덧씌우며 멀린이 말을 잇는다.
“□■□■■──.”
또다시 시엔이 이해할 수 없는 이형의 주문을 입에 담으며.
마법 학계의 주류, 분석주의 마법사는 지금에 와서 마법사의 주문이 그저 정식을 고양하고 집중하기 위한 의식적 암시에 불과하다고 결론 지었다.
그리고 보다 효율적으로 정신을 고양하고 의식을 가다듬기 위해 제국의 마법사들은 최적의 압운과 율격─ 운율(韻律)을 앞다투어 개발해냈다.
내재율, 외형률, 음수율, 음보율……. 어떻게 문장을 수식하고 발음하며, 어디에 어떻게 악센트를 줘야 최고로 의식을 고양하는 주문으로 작용하는지.
그것은 주문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마법의 실체를 남김없이 해체하고 이치와 체계 속에 재조립했다.
“요즘에는 말이야, 낭만이란 게 없는 시대가 됐어.”
그렇게 낱낱이 분석되고 해체된 마법은 더 이상 신비라 부를 수 있는 영역을 떠나버린 무엇이었다.
“이 시대에 마법을 신비하게 생각하는 놈 따위는 없거든.”
그러나 그 이전 시대의 마법사들은 마법을 그 자체로 하나의 신비로 여기며 경외했다.
당장 시엔의 눈앞에 있는 마법사가 그렇듯이.
“나는 놈들이 싫다.”
이제는 아니었다.
“자기들이 세상의 진리를 통달하고 깨우친 것처럼 구는 꼴이 아니꼽고 속이 뒤틀려 참을 수가 없지. 놈들은 예의란 걸 모르니까.”
“좀 많이 밉상스럽기는 하죠.”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애초에 멀린은 시엔에게 용무가 있던 게 아니었다. 그저 겸사겸사 마침 이곳에 시엔이 있었던 것뿐이다.
‘처음부터 저들이 목표였나.’
그저 눈엣가시처럼 밟히는 이 시대의 마법사 놈들을 용납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들로서는 그저 운(運)이 나빴다. 그렇게밖에 부를 수 없으리라.
“그런데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말이지, 도무지 이 시대란 놈은 거역할 수가 없더라고.”
신사도의 나라에서 온 소년이자 구시대 최후의 마법사가 자조했다.
“나도 퇴물이 다 됐지.”
그 말처럼 당장 요정왕 멀린은 20년 전, 바르무어 후작의 부친에게 패배해 그의 황금나무 지팡이까지 빼앗겼다.
“낡은 것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오지. 누구도 이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어.”
지금의 시엔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으나, 당시 그들의 승부는 분석주의와 신비주의 마법 사이에서 새로운 시대의 경계를 구별 짓는 하나의 역사적 분기점 그 자체였다.
“기사들에게 있어 네놈의 존재가 그런 것처럼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멀린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는다.
“멀린 경께서는 개의치 않는 겁니까?”
“글쎄다, 나는 마법사라 잘 모르겠네.”
멀린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검을 쥐어본 적도 없는데 기사들의 시대가 망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
콰직!
동시에 두 사람이 발을 딛고 있는 세계의 대지가 뒤틀리며 땅을 찢고 시엔을 향해 솟아올랐다.
“내 시대는 존나 예전에 끝났거든.”
황금으로 된 나무뿌리였다.
대지 밑에서 헤아릴 수 없는 뿌리들이 솟아나 시엔을 향해 촉수처럼 내리꽂혔다.
“…….”
그리고 자신의 공격을 피해서 움직이는 시엔을 보며, 아까 느꼈던 것과 같은 위화감을 되새겼다.
‘뭐지?’
처음에는 그저 운명의 창에 깃든 힘이라고 생각했다. 의도적으로 공격 방향을 뒤틀거나 해서 맞지 않게, 소유자를 보호해주는 알기 쉬운 행운의 가호(加護) 같은 것들.
그런데 저것은 그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무엇이었다.
예지의 힘을 가진 멀린에게 있어 운명이란 읽고 해독할 수 있는 문자에 가깝다. 설령 그게 신기의 힘으로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이든, 역사의 조류 속에서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의지 그 자체든.
그러나 지금 시엔을 휘감고 있는 저것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조차 해독할 수 없는 신비가 그곳에 있었다.
“마음에 드네, 너.”
그렇기에 멀린이 입꼬리를 뒤틀며 웃었다.
“뭐가 말이죠?”
“신기해서 말이야.”
“……?”
“요즘 같은 시대에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덕목이지.”
더 이상 아무것도 신기하지 않고 신비하지 않은 시대.
그날의 뼈저린 패배 이후, 자기 같은 구닥다리 존재가 있을 곳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일찍이 경외했고 존중했던 시대의 신비를, 이제 이 세상에서는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뭐, 그래도 네놈을 보니까 이 늙은이가 힘이 나네.”
“딱히 뭘 해드린 기억은 없는데요.”
“아니, 그걸로 충분하다.”
눈앞의 아이를 휘감고 있는 불가해의 힘. 굳이 그것의 정체를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 시대에도, 천하의 요정왕조차 이해하지 못할 신비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 경외하는 걸로 족했다.
“답례로 이 늙은이가 예지(叡智)를 하나 알려주마.”
그렇기에 일찍이 아서왕의 운명을 점치고 원탁의 고문으로 소속된 마법사가 말했다.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지평 너머의 풍경을 엿보는 눈동자를 하고서.
“네가 가지고 올 시대가 너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멀린이 말했다. 장난기 어린 주근깨 소년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더없이 엄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바로 그때였다.
웃음소리가 들린다. 시엔의 웃음소리였다.
“뭐야, 내 말을 못 믿는 거냐?”
“아뇨, 믿어요.”
그 말대로다. 그 목소리는 알기 쉬운 조롱이나 불신의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웃음이었으니까.
“이해할 수가 없네. 그럼 뭐가 그렇게 웃겨?”
“알려드릴까요?”
“…….”
시엔이 짓궂게 되물었다.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니, 별로 알고 싶지 않다.”
정적 끝에 곱슬머리의 주근깨 소년이 대답했다. 어느덧 일대를 덧씌운 황금의 결계를 무너뜨리며.
“호기심은 호기심으로 남겨두는 게 좋을 때도 있는 법이거든.”
* * *
사육제가 벌어지는 이 시기에는 ‘공식적으로’ 귀족이나 농노 모두가 격식 없이 어울릴 수 있다. 심지어 모두의 앞에서 소리 높여 그들을 조롱하는 일마저 허락된다.
“바르디 상회의 프란체스코 회장님께서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자기 머리카락 하나 살 수 없다네!”
그렇기에 도시 사람들 모두가 이 나라의 지배자들을 마음껏 조롱하고 비웃으며, 평소 그들을 억죄는 계급의 굴레를 벗고 소리를 높였다.
“메디치 가문의 샤일록은 돈에 미친 늙은이다!”
“은화 30냥에 지 애미애비도 팔아먹을 고리대금업자 놈!”
“옳소!”
심지어 이 나라의 진짜 지배자라 일컬어지는 최고 유력 가문의 이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오직 하나의 가문을 제외하고서.
“이 시기에 도시의 인간들은 딱 두 부류란다.”
바로 그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 입을 열었다.
“가면을 쓰고 있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지.”
흑색 벨벳으로 된 모레타 가면을 쓰고, 곁에서 망령을 상징하는 순백의 라르바 가면과 망토를 걸친 그녀의 아들에게.
“멀린 경이 너에게 흥미를 보였다고 들었단다.”
“그를 잘 아시나요?”
“그럼 알다마다.”
라일라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체사레와 더불어 신의 아들이 죽기 전부터 살아온, 몇 없는 ‘고대의 괴물’들이지.”
고대의 괴물. 실제로 맞는 말이었다. 그는 요정이지 인간이 아니니까. 그 호칭에 시엔이 쓴웃음을 짓는다.
“체사레 역시 모습을 감췄다는 듯하더구나.”
라일가가 요정과 함께 이 시대에 남겨진 또 하나의 괴물을 입에 담았다.
“그 정도 소란을 피우고도 공화국에 남아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겠죠.”
“그래도 그는 네 앞에 다시 나타날 거란다.”
라일라가 말했다.
“네가 운명의 창을 가지고 있는 이상 말이지.”
“포기를 모르는 괴물이니까요.”
시엔이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니 그때까지 충분히 강해져야 해.”
“명심할게요.”
어느 시기에나 어느 때나, 시엔이 해야 할 것은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당장은 아니지.”
각오를 다지는 시엔에게 라일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정도는 가면을 벗고 축제를 즐기렴.”
“─.”
깨닫고 보니 어느새 라일라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그 대신 기다렸다는 듯 시엔의 앞에 또 하나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렸어?”
콜롬비나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처럼 새파란 그녀의 머리카락을 못 알아볼 시엔이 아니었다.
“아니, 나도 지금 막 왔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시엔이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 앞에서 공화국의 예법에 따라 무릎 꿇고 손등에 입을 맞추며.
입맞춤하는 시엔을 내려다보며 마린이 말했다.
“혹시 오해할까 봐 말해두는데, 착각은 금물이야.”
“무슨 착각?”
가면 너머로 얼굴을 감춘 마린이 대답했다.
“나, 나라고 딱히 좋아서 정체를 숨기고 너랑 춤추는 게 아니니까.”
“뭐야, 싫은데 억지로 추는 거였어?”
“아니, 진짜 싫어서 억지로 추는 것까지는 아니고─”
시엔의 말에 마린이 멋쩍은 듯 대답했다.
“어차피 일부러 소문내려고 추는 거잖아. 그, 도둑 길드 마스터가 퍼뜨리는 소문이 ‘진짜’가 되도록…….”
“오늘 하루 정도는 비밀로 할 수 있어.”
시엔이 말했다. 그 말에 마린이 더더욱 황당해서 대답했다.
“그럼 왜 불렀는데, 진짜!”
“그야 춤추려고 불렀지.”
라일라의 말처럼 이 시기 베네토 사람들은 두 부류다.
축제를 즐기며 가면 속에서 해방되거나, 여전히 가면 속에 얼굴을 숨기고 있는 자들.
문득 시엔은 눈앞에 있는 마린이 어느 쪽일지 궁금해졌다. 마찬가지로 그녀와 함께 사람들 속에 섞여서 춤을 추는 자신 역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