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숙청
그로부터 얼마 후, 라일라가 자리를 비우고 공석이 된 가주의 집무실.
“경애하는 돈 시엔.”
“어서 오세요, 하이드 경.”
바로 그 자리에 앉는 것이 유일하게 허락된 라일라의 대자 앞에서, 그림자 기사단장 하이드 경이 정중하게 무릎 꿇고 손등 위에 입맞춤했다.
“지금 막 《집행자(Enforcer)》들이 임무를 마치고 영지로 돌아왔습니다.”
“잘해주었습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그림자 기사들은 크게 세 가지의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나이트워커 공작 저택에 상주하며 밤의 아이를 교육하고 저택을 지키는, 알기 쉬운 형태의 가신 기사(Household Knight).
나이트워커 가문의 눈과 귀를 자처하며 대륙 각지에서 암약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염탐꾼(스파이).
끝으로 가문의 명령에 따라 직접 칼날이 되어 움직이는 집행자(인포서).
“집사장, 돌아온 집행자들에게 부족함 없는 대우와 포상, 식사를 준비해 주세요.”
“그리 전하겠습니다.”
시엔의 말에 하이드 경과 함께 동석하고 있던 초로의 집사장이 예를 표하며 물러났다.
저물녘 어스름을 등진 채, 그곳에 앉아 있는 시엔은 더 이상 과거의 미숙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어느덧 스무 살의 성년을 눈앞에 둔, 라일라에 이어 나이트워커 가문을 이끌어갈 어엿한 후계자.
시엔의 테이블 위에는 하나의 명단이 놓여 있었다.
“자유도시 실렌체의 8대 시의장, 루치오 풀치 남작.”
동시에 기사단장 하이드 경의 입에서 차례대로 이름이 흘러나온다.
“캄파니아 백작령의 집사장 조나단 월츠 자작.”
이름이 흘러나올 때마다 시엔의 손에 들린 깃펜이 움직이며 줄을 그었다.
빛바랜 양피지 위에 이름과 직업, 거주지 등의 신상명세 등이 흑색 잉크로 나열된 명단 위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블랙리스트.
이 나라는 하나의 거대한 정원이고, 그들은 대대로 이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들이다. 그리고 거기에 적혀 있는 크고 작은 권력자들은 잘라 내야 할 가지이자 뿌리 뽑아야 할 잡초였다.
물론 가지를 자르고 잡초를 뽑는 것은 더 이상 시엔의 몫이 아니다. 그저 이곳에서 명령을 내리고 지켜볼 뿐이다.
움직이는 것은 나이트워커 가문의 사냥개, 그중에서 집행자라 불리는 그림자 기사들의 몫이었으니까.
저마다의 어리석음에 의해 죽어야 할 자들의 목록이 하나둘씩 줄어들었다. 어느새 명단의 끝자락에 이르러, 몇 명의 이름들이 남는다. 그러나 하이드 경의 입에서는 더 이상 누구의 이름도 호명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손님들의 저녁 식사는 준비되었습니까?”
“예.”
하이드 경이 고개를 숙였고, 시엔이 몸을 일으켰다.
* * *
나이트워커 공작 저택의 다이닝 룸.
시종들이 은으로 된 촛대에 촛불을 밝혔고, 정찬에 앞서 입맛을 돋우는 전채 요리(Antipasto)가 포도주와 함께 테이블에 세팅되었다.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친애하는 평의회 의원님들.”
식탁 끄트머리에 앉은 시엔이 입을 열었다.
“겨, 경애하는 돈 시엔을 뵙습니다…….”
“기다리는 사이 많이 시장하셨겠지요.”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착석해 있던 의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예를 표했고, 시엔이 됐다는 듯 손을 젓는다.
“쓸데없는 허례는 생략하고, 어서 식사부터 드시죠.”
그렇게 말하며 치즈와 토마토, 바질을 올린 샐러드를 입에 넣는다. 정적 속에서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채 요리에 이어 온갖 코스 요리들이 준비되는 와중에도 누구 하나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느덧 제2의 접시(Secondo Piatto)─ 육류 요리들이 나온다.
온갖 진기한 이국의 향신료와 허브, 포도주로 잡내를 제거하고 추린 정성스러운 육질의 고기들. 쇠고기와 송아지, 닭, 돼지, 염소, 양, 온갖 동물 요리가 테이블을 가득 메우는 와중에도 마찬가지였다.
“왜들 말이 없으시죠?”
뼈째로 구운 양고기 다리를 나이프로 썰며 시엔이 입을 열었다. 레어로 구워진 살점 속에서 핏빛의 육즙이 터져 나왔다.
“그, 그것이…….”
“좀 더 식사를 즐기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말하고 나서 음미하듯 양고기 스테이크를 입에 넣는다. 얼어붙을 것 같은 정적 속에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의원 하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뭘 말입니까?”
머뭇거리는 의원을 향해 시엔이 시치미를 떼며 되묻는다.
“말해보세요. 뭘 용서해달라는 겁니까?”
“그, 그것이…….”
시엔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정말로 순수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들키지 않을 줄 알았습니까?”
시엔의 말에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이가 딱딱 부딪치고 팔다리가 덜덜 떨리는 소리와 함께.
“몇몇 관세청 소속 의원님들이 합심해 신성 제국과의 무역 기록과 복식부기를 위조하고, 일부 관세(關稅)와 귀금속, 향신료를 빼돌리는 밀무역에 가담했다지요.”
“아, 아…….”
“이 나라가 향신료 무역을 완전 독점하고, 모피와 귀금속을 거래하는 28개의 무역 루트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우리 가문의 형제자매들이 희생되었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이 나라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피를 먹고 자랐다.
그들이 흘린 피가, 소금과 절임 생선 말고는 제대로 된 수출품 하나 없는 소국을 대륙 제일의 부국으로 탈바꿈시켰다.
“사, 살려 주십시오!”
바로 그때,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들 중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
“친애하는 아브루치 의원님.”
그 모습을 보며 시엔이 차갑게 되물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부디 제게 속죄의 기회를 주십시오!”
“모, 모든 수익금을 되돌려드리겠습니다! 아, 아니, 가진 것들을 전부 다 바치겠습니다! 남은 평생을 공화국에 헌신하며 살겠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돈 시엔!”
그를 시작으로 평의회 및 관세청 소속의 부패 의원들이 잇달아 일어나서 시엔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왜 용서해야 하죠?”
그런 그들을 향해 시엔이 되물었다.
“제가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합니까?”
“그, 그것이……!”
“그러니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식사를 좀 더 즐기시는 게 좋을 거라고.”
일말의 감정도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이 식사가 당신들의 마지막 만찬(晩餐)이 될 테니까.”
“!”
어느새 몇몇 의원들이 앉아 있는 등 뒤에서, 기척조차 없이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의 목을 향해 일제히 칼날을 내리그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그림자 기사들.
촤악!
목이 잘리고 피가 튀었다. 비명조차 울려 퍼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부패에 가담했던 의원들의 몸이 무너져 내린다.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적셨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의원들이 동요하거나 패닉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찔리는 구석이 없는 이상 나이트워커 가문은 결코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죽을 짓을 하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다. 저 멍청이들이 죽는 이유는 딱 하나, 죽을 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포로 떨리는 손마저 어찌할 수는 없었다.
어느덧 그림자 기사들이 쓰러진 시체를 정리하고, 시종들이 신속하게 바닥에 떨어진 핏물을 닦는다. 그와 함께 멈춰 있던 시엔이 다시금 나이프를 움직여 테이블 위의 송아지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 * *
이튿날 아침.
“암살자가 가져야 할 가장 커다란 덕목이 뭐라고 생각하니?”
공작 저택 내의 광장을 걸으며 시엔이 말했다.
“신뢰요!”
“신뢰입니다.”
“그렇지.”
시엔의 곁을 따르는 두 명의 어린 가족들을 향해서.
“신뢰야말로 우리 가문이 쌓아 올린 그 무엇보다 커다란 자산이란다.”
일찍이 라일라가 시엔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엔 역시 그곳에 있는 소년과 소녀를 향해 속삭였다.
“명심할게요, 시엔 삼촌.”
“그래.”
소년의 말에 시엔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잭과 클레어. 14살 나이에 둘이서 함께 세례를 받고 새롭게 가족이 된 가문의 막내이자 동갑내기 남매.
물론 시엔은 그들 남매의 대부가 아니다. 그들의 대부와 대모는 각각 가문의 하이마스터, 헨젤과 그레텔 남매였으니까.
그리고 가문의 임무로 바쁜 헨젤과 그레텔이 없는 사이, 대신해서 어린 남매를 가르치는 것은 시엔의 역할이었다.
그게 가족이니까.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에게는 가족이 전부이며 가족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린치 경, 잭과 클레어에게 명부를 넘겨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기에 라일라가 그랬던 것처럼 시엔이 말했다. 어느 틈에 검게 옻칠된 가죽 코트 차림의 남자가 정중히 모습을 드러내며, 품에서 조심스럽게 무엇을 꺼내 들었다. 밀랍으로 봉해진 양피지 두루마리였다. 봉랍 표면에 나이트워커 공작 가문을 상징하는 별과 단검의 문장(紋章)이 새겨져 있는.
“이게 뭐예요, 시엔 삼촌?”
조심스레 양피지를 펼치며 클레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리석은 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명부란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멈춰 있던 전쟁이 재개되었다. 이제는 무엇을 명분으로 벌어졌는지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전쟁을 위해 존재하는 전쟁이었다.
칠왕국과 샤를마뉴 왕국 사이에 벌어진 마지막 기사들의 전쟁─.
그렇기에 라일라를 대신해 공작 저택을 지키고 있던 시엔의 침묵 역시 끝을 고했다.
더 이상 시엔이 있어야 할 곳은 책상 위가 아니었던 까닭에.
물론 시엔에게 있어 그들 왕국의 전쟁은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자 비즈니스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하는 제국의 쥐새끼들…… 신성 제국의 이단심문관이자 공안(公安)들은 그렇지 않았다.
시엔이 움직여야 할 역사의 분기점.
그렇기에 나이트워커 가문의 블랙리스트에, 새로운 이름 하나가 갱신되었다.
《시궁쥐 추기경》 로드리고 보르자(Rodrigo Borgia)─.
당장 나이트워커 가문이 가진 정보력으로도 여전히 그 남자의 정체는 많은 것들이 베일에 싸여 있다.
알려진 것이라고는 ‘세상에서 가장 고약하게 악취를 풍기고 있다.’란 것과 ‘어디서든 아무리 거리가 떨어져 있든, 대륙에 흩어진 제국의 쥐새끼들에게 속삭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라는 것.
지금의 시엔조차 진실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강적.
이 세계에는 아직도 시엔이 올려다볼 수 없는 강자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당대의 강자들을, 평생 올려다볼 수 없는 나무라 생각하며 고개를 돌릴 생각 따위는 없었다. 얌전히 숨을 죽이며 자신의 시대가 오기를 느긋이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이제는 나무를 오를 때였다.
기약 없는 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대, 당대(當代)란 이름의 나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