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이쪽을 주목하세요 (1)
《시궁쥐 추기경》 로드리고 보르자.
대륙 각지에 퍼져 있는 제국의 쥐새끼들에게 속삭일 수 있는 남자이자, 신성 제국이 가진 첩보망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존재.
그는 당대의 강자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파멸하는 와중에도 홀로 악착같이 살아남아 훗날 시엔의 시대까지 생존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의 손에 쓰러졌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훗날의 시엔을 상대로는 제대로 된 전투조차 성립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지금의 시엔조차 어느 정도 걸어볼 승산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시엔은 그 누구보다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남자는 강하다. 그러나 강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살아남은 까닭에 강한 것이다.
이 시대의 온갖 강자들이 쓰러지는 와중에도 홀로 죽지 않고 쥐새끼처럼 목숨을 부지하는 능력.
그것이 그의 진짜 강함이었다.
과거의 시엔으로서는 그것을 ‘강함’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제는 아니었다.
‘아무리 추하고 비참해도 살아남는 것이 곧 강함이다.’
생각하고 나서 시엔이 고개를 들었다. 일찍이 그에게 똑같은 가르침을 준 은사(恩師) 앞에서.
“야, 나하고 일 하나 같이 하자.”
“싫은데요.”
시엔의 말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이 돌아왔다.
“그래, 좋다고? 역시 그럴 것 같더라.”
“…….”
수도 베네토의 어느 호화로운 대저택.
베네토 도둑 길드의 13대 시프 마스터, 모니카 써틴이 황당하다는 듯 침묵했다.
“……뭐, 일단 들어나 보죠.”
“엄청나게 거창한 일은 아니니 너무 겁먹지 말고.”
시엔이 아무것도 아니란 듯 담담히 말을 잇는다.
“나랑 같이 제국에 있는 《에인션트 리그》의 제5마탑에 들어가서, 거기 있는 비급(祕笈) 하나 훔치자.”
“……?”
모니카가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렸다.
제국 제5마탑, 벌레 학파란 멸칭과 함께 제국의 여덟 마탑 중에서도 독보적일 정도의 기괴함과 혐오스러움을 자랑하는 학파.
“감히 경애하는 밤을 걷는 분 앞에서 참으로 실례되는 것은 알고 있으나, 혹시 뭐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해봐.”
시엔이 태평하게 대답했고, 모니카가 말을 잇는다.
“혹시 제정신이신지.”
“애초에 네가 날 제정신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기는 했냐?”
“…….”
시엔의 되물음에 모니카가 입을 다물었다. 처음부터 시엔이 그녀 앞에서 보여준 막무가내에 가까운 행동들, 다짜고짜 얼굴 없는 자세를 배우겠다며 금괴 100킬로그램을 내놓는 행위는 솔직히 말해 제정신과 거리가 멀었으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비급이 필요해.”
시엔의 블랙리스트에 적혀 있는 남자, 시궁쥐 추기경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이 필요하다.
“꼭 비급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럼, 아주 잘 알지.”
시엔이 대답했다.
“그런데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로서 빼앗는 게 아니야.”
시엔이 말했다.
“훔치는 거지.”
시엔이 암살자이기는 해도 도둑은 아니다.
“길드 마스터가 되고 감투 좀 썼다고 해서, 소싯적 대륙 제일의 괴도(怪盜)로 이름 떨친 그 실력이 녹슬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시엔의 눈앞에 있는 것은, 그저 일개 도둑 길드의 마스터가 아니라 당대 제일의 괴도로 이름을 떨친 도둑이었다.
“딱 잘라 말씀드리죠.”
그리고 당대 제일의 도둑이 대답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목소리로.
“아무리 돈 시엔이라 하여도, 밤을 걷는 자의 부탁이라 해도 불가능합니다.”
지금까지와 달리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목소리로 딱 잘라 고개를 저으며.
“오히려 나이트워커 가문의 분들이 더 잘 아시겠죠. 《에인션트 리그》의 마탑에 잠입하는 것은 사실상 자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하물며 비급이라 불릴 정도의 값어치 있는 것은, 제가 아니라 조부님이 오셔도 무리입니다.”
베네토 도둑 길드의 13대 길드 마스터 모니카 써틴에 앞서, 11대 길드 마스터로 이름을 떨친 오션 일레븐(Ⅺ).
“내 말 아직 덜 끝났다.”
“금괴 1톤을 줘도 못 합니다. 아니,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합니다. 차라리 그냥 죽으렵니다.”
적어도 그쪽이 제5마탑의 ‘벌레 학파 마법사들’에게 잡혀 최악의 꼴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래, 돈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무리겠지.”
시엔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그럼 이거는 어때?”
품속의 종이 뭉치를 꺼내서 모니카에게 넘겨주며.
“─.”
동시에 그 서류를 받아들고 차례차례 넘기며, 담담히 포커페이스를 지키고 있던 모니카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동요가 깃들었다.
“이걸 도대체…… 어디서 손에 넣으셨습니까?”
“말해줄 수 없다.”
시엔이 대답했다.
“그러나 별과 단검의 이름으로 ‘90% 이상’은 진실이란 걸 보증할 수 있지.”
“10%는?”
“뭐, 그 정도 오차는 감당해야지.”
“대체 어디서 제5마탑의 설계도와 경비 시스템을…….”
천하의 그녀조차 희미하게 손을 떨며 말했다.
그 말대로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제5마탑의 1층부터 최상층에 이르기까지 내부 구조는 물론이고 온갖 트랩, 감시 시스템 등의 설계도가 상세히 적혀 있는 서류였다. 대체 이걸 무슨 수로 손에 넣었을까.
어디서도 손에 넣지 않았다.
그저 시엔의 머릿속에 있을 뿐.
‘대현자 바르무어 후작과 5인의 제국 마탑주.’
훗날, 제국과의 전쟁 속에서 그 손으로 제1마탑을 필두로 《에인션트 리그》의 여덟 마탑 중 여섯 마탑주를 죽였다. 제5마탑주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 과정에서 마탑에 침입해 적잖은 정보를 손에 넣었고, 그 기억은 지금에 와서도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이 지금이 아니라 훗날의 미래란 점.
“우리 둘 말고도, 네가 필요로 하는 가문의 인간이나 외부의 ‘전문가’를 얼마든지 고용해줄 수 있다. 장비나 금전적 지원 역시 아끼지 않을 거라 약속하지.”
시엔이 말했다.
“…….”
그 말에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며 딱 잘라 고개를 젓던 모니카가, 처음으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욕망과 위험의 저울질.
“아, 참고로 성공 보수는 금괴 4톤이다.”
“좋네요, 합시다.”
생각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누가 도둑놈 아니랄까 봐, 어느새 모니카의 눈동자가 황금처럼 빛나고 있었던 까닭에.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다.
* * *
제5마탑, 정식 명칭은 「사역술(使役術) 학파」.
마력으로 짐승이나 마수 등의 정신을 지배하고 복속시키는 마법.
그러나 곰이나 호랑이 따위를 부려봐야 갓 오러를 쓰는 기사 하나 제대로 상대할 수 없다.
고위 마수를 부릴 정도의 강력한 사역술사는 나름대로 가치가 없지 않으나, 그럴 바에 차라리 골렘을 제작하거나 원소 학파를 익히는 쪽이 몇 배는 효율적이다.
사실상 장래성도, 쓸모도 없어 진즉에 사장돼도 이상하지 않을 학파가, 대체 무슨 수로 여전히 제국 최고의 명문 마탑 《에인션트 리그》에 속해 있을까?
사역술사들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눈을 돌린 것은 커다란 짐승이나 마수 따위가 아니었다.
‘벌레’였다.
충술(蟲術)─.
《시궁쥐 추기경》 로드리고 보르자는 과거 제5마탑의 마탑주였다. 그리고 이제는 마법사들의 왕국을 등진 채 제국 국교회에 몸을 담고 있다.
동시에 그의 충술이 바로 대륙 전역에 흩어진 제국의 쥐새끼들에게 속삭일 수 있는 능력의 비밀이었다.
시궁쥐는 숙주(宿主)에 불과하다.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쥐가 아니라 쥐에 붙어 기생하고 있는 벼룩 따위의 외부 기생충…… 벌레니까.
그 기생충이 쥐에서 쥐로, 쥐의 포식자로, 숙주를 옮겨가며 ‘속삭임’을 전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시엔이 노리는 비급이자 마도서의 정체였다.
「꼭두각시 벌레의 서」.
절대 경솔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벌레를 통해 속삭임을 전하는 시궁쥐 추기경의 위치를 특정하고, 그를 지켜주는 벌레의 감시망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의 수단.
“여기입니다.”
상념에 잠겨 있던 시엔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어서 옵쇼!”
“갓 잡은 싱싱한 송어가 있습니다!”
곳곳에서 활기가 넘치는 그곳은, 이 나라가 처음부터 갖고 있던 몇 없는 특산품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리알토 어시장(La Pescheria).
바닷바람 냄새와 함께 생선비린내가 진동하는 그곳에서, 걸을 때마다 바닥에 널브러진 물고기의 내장이 질척거리며 들러붙는다.
갓 잡은 송어와 농어, 가리비 등의 해산물이 은빛의 비늘을 빛내고 있고, 곳곳에서 물고기의 비늘을 벗기거나 가시를 바르고 내장을 제거하는 등 손질 작업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마침 굴과 가리비를 해감하는 남자 앞에서 모니카가 걸음을 멈춘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어이쿠야.”
모니카의 얼굴을 보자마자 남자가 손질을 멈추고 눈을 끔벅거렸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아셨수?”
“길드에 몸을 담은 이상,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모니카의 말에 남자가 표정을 찌푸렸다.
“……말했잖소, 나는 이미 손 씻었다고.”
“평생 놀고먹고 살 돈을 갖고도 이런 수산시장에서 일을 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입니까?”
“하느님께서는 노동을 소중히 하라고 말씀하셨지.”
남자의 말에 시엔이 일순 황당해서 입을 다물었고, 모니카가 말했다.
“금괴 1톤.”
“뭐?”
“우리가 다시 ‘팀’을 짜서 일할 때, 당신에게 돌아갈 몫입니다.”
“팀이라니, 댁…… 길드 마스터가 되고 다 때려치운 거 아니었소?”
“나쁘지 않은 일거리가 생겼거든요.”
모니카가 말했다.
“참고로 보수는 옆에 계신 나이트워커 가문의 돈 시엔께서 지불해주실 겁니다.”
태평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그 이름에 비로소 남자가 손질하고 있던 가리비를 떨어뜨린다.
“겨, 경애하는 밤을 걷…….”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굳이 동네방네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도 않고요.”
시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시프 마스터가 말하길, 당신이 꼭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어, 그러니까 이름이─.”
“헤헤, 홀쭉이(Slender Man)라고 부르십쇼.”
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나저나 금괴 1톤이라니…….”
“별과 단검의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죠.”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드는 순간, 직전까지 어시장에서 일하고 있던 남자와 전혀 별개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셰이프시프터(Shape Shifter, 형태변환자)…….’
그 정체를 깨닫고 시엔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동시에 남자가 되물었다.
“그래서, 뭘 훔치는 거죠?”
* * *
모니카가 찾는 옛 동료는 셰이프시프터, 일명 ‘홀쭉이’ 외에도 하나가 더 있었다.
달빛이 내려앉은 베네토 거리의 뒷골목, 금발의 미남자가 버터처럼 느끼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오, 마담 엘레오노라! 당신의 눈동자는 저 달빛보다도 시린 슬픔에 젖어 있군요.”
“아아…….”
“무엇이 당신의 눈동자를 저 밤하늘의 달과 별처럼 슬프고 창백하게 했습니까?”
이 도시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불륜의 장이다.
그리고 어느덧 그들 앞에 시엔과 모니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담 엘레오노라.”
“?!”
“눈동자가 달빛처럼 시린지는 모르겠는데, 달빛처럼 빛나는 귀걸이 보석이 방금 저 남자 주머니에 들어갔네요.”
“어이쿠.”
“……!”
모니카의 말에 엘레오노라가 황급히 자신의 귓가를 살폈고, 이내 거기에 달려 있어야 할 값비싼 보석 귀걸이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짝!
“이 도둑놈 새끼!”
남자의 뺨을 후려치며 귀걸이를 돌려받고 나서, 마담 엘레오노라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이야, 살다 살다 도둑놈이 도둑질을 방해하는 꼴을 다 보네.”
“여전하시네요, 임포스터(Impostor).”
모니카가 질렸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임포스터라 불린 미남자가 품속에서 무엇을 꺼냈다.
아마도 그녀, 마담 엘레오노라의 몸에 붙어 있었을 또 하나의 보석 중 하나였다.
그 남자는 보는 것처럼 손을 씻지도 않았고, 여전히 도둑 길드의 멤버로서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스께서 무슨 일이신지?”
“맡아줄 일이 있습니다.”
모니카를 대신해 침묵하고 있던 시엔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자마자 남자의 얼굴이 비로소 차갑게 굳었다.
“돈 시엔…….”
베네토 도둑 길드는 그냥 좀도둑들의 모임이 아니다. 이 나라와 도시의 온갖 상류층을 상대로 녹아들며, 심지어 귀족 가문 출신임에도 도벽(盜癖)을 주체하지 못하고 길드에서 활동하는 자도 적지 않다.
바로 이곳에 있는 그 남자처럼.
그리고 이 나라의 귀족 중에 시엔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없었다.
‘홀쭉이와 임포스터, 그리고 얼굴 없는 자라.’
모니카와 함께 팀을 이루는 그들을 보며 시엔이 쓴웃음을 짓는다.
“돈 시엔께서 말씀하셨듯 함께 맡을 일이 있습니다. 참고로 ‘홀쭉이’ 역시 함께입니다.”
“아니, 그 친구 손 씻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또 씻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네요.”
그 말에 임포스터가 어처구니가 없어 대답했다.
“설마 그 드림팀이 다시 모일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과거에는 베네토 공화국이 아니라, 대륙 전체의 온갖 값비싼 것들을 훔친 대도(大盜) 중의 대도.
그 정체를 알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으나, 그들의 명성 역시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처럼 대륙을 풍미하며 이름을 떨쳤다.
샤를마뉴 왕국에서는 그들을 《잡을 수 없는 자들(Insaisissables)》이라 불렀고, 칠왕국에서는 그들을 《포 호스맨(Four Horsemen)》이라 불렀으며, 신성 제국에서는 《도플갱어(DoppelGänger, 이중으로 걷는 자)》라 불렀다.
“그나저나 대체 뭘 훔치려고 그러는 거죠?”
임포스터의 말에, 일찍이 홀쭉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모니카가 태평하게 대답했다.
“뭐, 그렇게 엄청나게 거창한 일은 아니니 너무 겁먹을 것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