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이쪽을 주목하세요 (2)
그로부터 얼마 후, 신성 제국 북동부.
대륙 제일의 학업적 명성을 가진 명문 마탑 《에인션트 리그》, 또는 마탑에 무성하게 자란 담쟁이덩굴의 이름을 따 ‘여덟 담쟁이덩굴의 탑(아이비 리그)’이라 불리는 유서 깊은 배움의 전당.
“이야, 옛 동료들끼리 다시 뭉치니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우리가 모여 세상에 훔치지 못할 게 뭐가 있겠수. 거기에 경애하는 밤을 걷는 분까지─.”
“크으, 실로 듬직하네요.”
말하고 나서 홀쭉이가 되물었다.
“그래서, 우리더러 뭘 훔치란 거유?”
“아 뭐, 말씀드렸듯 그렇게 별거 아닙니다.”
시엔이 담담하게 대답했고, 모니카가 그 말을 받아 대답했다.
“제5마탑에 들어가서, 거기 최상층에 있는 비급을 하나 훔치는 거죠.”
“…….”
정적이 내려앉았다.
“망했네.”
침묵 끝에 임포스터가 대답했다.
* * *
자신들이 무슨 주사위 놀음에 참여했는지도 모르는 채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로부터 3주일 뒤.
시엔이 제공해준 정보를 토대로 모니카의 설계와 사전 조사, 정보 수집에 걸쳐 비로소 작전의 날이 밝았다.
제5마탑의 1층.
젊고 아름다운 여생도 마르가리타와 고위 장로 사이의 밀회가 이루어지는 어느 비밀스러운 일실.
“기다렸다네, 마르가리타.”
“아, 벨루시 장로님…….”
금발의 여생도 마르가리타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로브를 벗었다.
“알다시피 자네의 논문이 최우수 성적으로 통과되었다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고 학구적 열정이 돋보이는 글이었지.”
벨루시가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고, 마르가리타 역시 얼굴을 붉히며 미소 지었다.
“후후, 다 장로님의 지도 덕분랍니다…….”
“암, 그렇고말고. 다 이 몸의 지도가 있었던 덕이지.”
“아아, 존경하는 장로님. 그럼 제가 어떻게 이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까요?”
“후후, 잘 알지 않나.”
그 의미를 헤아린 벨루시가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았다. 마르가리타 역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아, 물론이죠.”
파지직!
직후, 의식을 잃을 정도의 전류가 장로에게 내달린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어느덧 홍조를 띠고 있던 마르가리타의 얼굴이 사라지고, 모니카의 감정 없는 눈동자가 장로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열쇠’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그 시각.
“아, 곧 장로님을 뵈러 가봐야 하는데…….”
“오, 마르가리타.”
침대 위에서 당황하며 시각을 살피는 그녀에게, 느끼하기 짝이 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까짓 날짜 약속 하나쯤 어겼다고 별일이 있겠어?”
“그, 그래도 제 논문이…….”
“레이디 마르가리타. 약속 하나 어겼다고 널 저버리기에는, 너는 너무나도 매력이 넘쳐. 그러니 하루 정도는 상관없잖아?”
“아아……. 어쩜 이리도 다정하실까.”
마르가리타의 말에 버터가 녹는 것 같은 목소리로 남자가 대답했다.
“오늘 하루, 절대로 너를 놔주지 않겠어.”
* * *
“와, 이거 진짜 미친놈들이네.”
어느덧 손에 들린 마탑 상층의 열쇠를 보며 시엔이 어이가 없어서 생각했다.
“벨루시 장로가 눈을 뜨고 의식을 차릴 때까지, 대략 다섯 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확실하지?”
“그나마 최대로 빡빡하게 잡은 겁니다. 넉넉히 잡았을 때는 하루 정도 걸려야 일어날 겁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또 하나의 벨루시 장로가 있었다.
“그때까지 일을 끝마치고 나서 열쇠를 그에게 돌려놓을 겁니다.”
정확하게는 벨루시 장로의 모습으로 의태(擬態)하고 있는 홀쭉이가.
이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사람을 죽이지도 않고 겁박하지도 않고, 심지어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게다가 벨루시 장로가 정신을 차리고 마탑이 발칵 뒤집혔을 때, 목이 날아가고도 남을 중대 실수를 순순하게 자백할 리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저마다의 처신을 위해 조작된 알리바이 속에서 사태는 더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겠지.
그게 사람이니까.
그것이 요 3주 사이, 마탑에 속해 있는 이들의 행적과 동선, 신상 명세를 낱낱이 파악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찾은 파고들 틈이었다.
벨루시 장로로 의태하고 있는 홀쭉이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앞서 시엔이 준 설계도를 머릿속에 통째로 집어넣고 있는 까닭도 있었으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자, 장로님. 이 위층을 올라가실 때는 암호 영창을…….”
“하찮군. 네깟 놈들 따위가 내게 말대꾸하는 것이냐.”
심지어 다음 층계로 올라갈 때, 그 앞에서 결계를 치고 막아서는 경비 마법사들에게 마땅히 읊어야 할 암호문조차 말하지 않고 당당하게 소리쳤다.
“이 몸의 심기를 불쾌하게 하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장로님!”
“당장 결계를 해제하겠습니다!”
결계를 해체하고 나서 그곳에 보란 듯 ‘장로의 열쇠’를 꽂아 넣는다.
그 모습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벨루시 장로 그 자체였다.
장로밖에 소지할 수 없는 열쇠에 다중 결계, 그 앞을 지키는 문지기까지.
외부자의 침입을 경계하며 이중, 삼중으로 쌓아 올린 방벽이 너무나 덧없이 무너져 내린다.
어느덧 그곳에 벨루시 장로와 함께 있어야 할 ‘외부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망령의 자세가 자랑하는 암행의 초식, 무월(無月).
바로 그 자세를 통해 자신을 죽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까.
‘나에게 얼굴 없는 자세를 가르쳐주는 대가로, 내가 그 자세를 완성해주지.’
‘어쩌면 자세를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우리 가문의 검식이 조금쯤 섞여 들어갈지도 모르는 일이고.’
게다가 망령의 자세와 별개로 자신의 기척을 숨기는 묘리 자체는, 적어도 대륙 제일의 괴도에게 있어 새삼스러운 기술이 아니었다.
마탑 상부, 비급이 잠들어 있는 최상층 탑주의 방과 가장 가까운 일명 「장로의 층」.
그리고 여기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저는 장로의 방에서 때를 기다리다 적당히 빠져나가겠습니다유.”
“잘해줬습니다.”
어느덧 콧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우스꽝스러운 얼굴의 ‘달리 가면(Dali Mask)’을 쓴 두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손바닥처럼 탑 내부의 구조를 들여다보고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도둑들이.
‘이 전부를 계획하고 손에 넣는 데 고작 3주라.’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전부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시프 마스터의 수완이었다.
동시에 이제부터 펼쳐지는 것이 ‘그’가 보여줄 진짜 능력이기도 했다.
“어이쿠야, 이 앞에 결계가 있네요.”
얼핏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복도 앞에서 달리 가면을 쓴 《얼굴 없는 자》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시엔이 준 설계도에는 적혀 있지 않은 내용이었다.
“결계 학파의 탐지형 결계네요.”
의도적으로 경비를 배치하지 않고 방심을 유도하게 설치된 방범 결계.
그 결계를 향해 얼굴 없는 자가 능청스레 손을 뻗었다.
일개 좀도둑 따위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마력이, 천하의 시엔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이능이 되어 눈앞의 결계를 집어삼켰다.
‘얼굴 없는 자세’를 구사하며 온갖 자세들을 훔쳐 쓰는 베네토 길드의 시프 마스터가 구사하는 유일의 자기류(自己流).
「결계 해체」.
엄밀히 말해 그─ 아니, 그녀는 결계 학파 출신 정통 마법사가 아니다. 그녀의 특기는 오직 하나, 결계를 해체하는 것뿐이니까.
모니카 써틴(XIII)과 조부 오션 일레븐(Ⅺ)을 비롯해 「넘버즈 가문」에 계승되는 고유 능력.
게다가 아무리 탑 상층의 경비를 서는 이들이 고위 마법사라 해도 망령의 자세의 극의를 구사하는 시엔을 당해낼 리가 없다.
죽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암살자의 방식이지 도둑의 방식이 아니니까.
그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의식을 잃게 할 뿐.
‘마도서가 있는 곳은 탑주의 방 너머.’
계획대로 오늘 제5마탑의 마탑주는 부재중이다. 그리고 탑주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마탑주뿐.
흘끗 시각을 살피고 나서 시엔이 말했다.
“순찰대가 오기까지 5분 남았다.”
순찰대는 기절시킬 수 없다. 교대를 짜서 감시하는 그들에게 일이 생겼다는 것은 곧 일이 났다는 뜻이니까.
“충분합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방 앞에서, 모니카가 품에서 슬쩍 무엇을 꺼내 들었다.
앞서 손에 넣은 마탑주의 머리카락 두 가닥과 핏방울, 기름종이 위에 찍혀 있는 지문, 그 외에도 대륙 제일의 괴도가 결계를 해체하기 위해 애용하는 각종 아티팩트들이 있었다.
“4분 내로 결계를 해체하죠.”
지금의 시엔이 아니라, 훗날의 시엔조차 이해할 수 없는 고도의 연산(演算)과 술식이 병행되며, 대륙 최고의 명문 마탑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방의 다중 결계가 차례차례 해제되고 있다.
‘이 정도로 고도의 결계를 이렇게나 손쉽게…….’
철컥.
“됐습니다.”
담담하게 결계를 뚫고 모니카가 말했다.
“와, 이거 진짜 도둑놈이네.”
“그야 도둑 길드 마스터니까요.”
감동해서 중얼거리는 시엔 앞에서 모니카가 담담히 대답했다.
* * *
탑주의 방.
그 너머 비급이 있는 방의 결계를 추가로 해체하고 나서, 달리 가면을 벗으며 모니카가 말했다.
“그럼 저는 여기서 제 몫을 챙길 테니, 후딱 가서 가지고 오시죠.”
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오직 시엔의 몫이란 듯.
방금까지 보여준 여유롭고 능글맞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이, 더할 나위 없이 사무적이고 차가운 목소리.
‘이래서 《포 호스맨》이었나.’
그들이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으로 불리는 이유.
흘끗 고개를 돌린다. 대륙의 정점에 서는 여덟 마탑 중 하나, 그 탑의 수장이 거주하는 방은 말 그대로 보물의 산이었다.
하물며 대륙 제일의 도둑놈이 그 보물을 놓칠 리가 없다.
‘차라리 그쪽이 눈속임하기도 쉽고.’
비급 하나를 콕 찍어 털었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재산 전체를 깡그리 털어버리는 쪽이 좀 더 도둑다울 테니까.
이것은 나이트워커 가문의 방식이 아니다. 설령 심증이 있다고 쳐도 증거가 없는 이상, 명분은 명분으로 성립할 수 없다.
아니, 설령 나중에 사태의 전모가 밝혀져도 배후에 나이트워커 가문이 있다는 심증조차 쉽게 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밤을 걷는 자들의 방식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던 까닭에.
말 그대로 도둑놈들의 짓이었다.
“아, 참.”
성큼성큼 비급의 방으로 향하려던 시엔을 향해 달리 가면을 벗은 모니카 써틴이 말했다.
“왜?”
“마도서를 가지고 올 때, 그 자리에 이걸 남겨주시죠.”
그렇게 말하며 모니카가 무엇을 꺼냈다.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고 실소를 터뜨린 시엔이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끼익.
일찍이 시궁쥐 추기경, 로드리고 보르자가 마탑주였을 당시─ 쇠락해가는 5마탑의 명성을 되살리고 대륙 제일의 명문에 올려놓은 비전 마도서.
「꼭두각시 벌레의 서」.
그 비전이 금색의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대놓고 보란 듯이.
마찬가지로 보란 듯이 그 곁을 지키는 수호자(가디언)이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숫자들의 파리가 모여 사람의 형체를 이루고 있는, 일명 「파리떼 수호자(Guardian of Flies)」.
심지어 저것은 보통의 파리가 아니다. 스치는 것으로 살점이 시커멓게 썩고 부패하는 죽음의 벌레, 흑사충(黑死蟲)이니까.
제5마탑이 믿고 있는 최후의 보루이자, 지금껏 시엔과 모니카가 넘어온 전부를 합친 것보다 뚫기 어려운 장벽.
그러나 이 정도 괴물 하나 제대로 처치하지 못하는 이상, 시궁쥐 추기경의 발끝조차 닿을 수 없다.
일찍이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이라 불렸던 그 남자, 로드리고 보르자 앞에서 저것은 괴물이라 부를 수도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소맷자락 속에서 ‘왕 시해자’를 꺼내 칼자루를 빙글 돌려 역수로 고쳐 잡는다. 칠흑의 흑광이 시린 서슬을 흩뿌린다.
여기부터가 시엔의 역할이었다.
* * *
그로부터 4일 뒤.
제5마탑의 당대 수장 《로드 시니스터》가 돌아왔을 때, 마탑주의 방은 말 그대로 도둑이 드나든 것처럼 깡그리 털린 뒤였다.
끝으로 사라진 비급 마도서 「꼭두각시 벌레의 서」가 있던 자리에는, 광대가 그려진 트럼프 카드와 함께 하나의 쪽지가 놓여 있었다.
「이쪽을 주목하세요(Now you see me)!」
* * *
그 시각.
5마탑이 발칵 뒤집히고 그 소식이 퍼져나가는 것보다 몇 발자국 앞서─ 시엔은 이미 대륙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소식이 그의 귀에 들리기 전에 쓰러뜨린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9검식, 제비반전술, 마법, 운명의 창, 끝으로 시엔이 손에 넣은 비급 마도서 「꼭두각시 벌레의 서」까지 합쳐 시엔이 가진 전부를 끌어내 싸워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강자.
이 시기, 칠왕국과 샤를마뉴 왕국 사이의 전쟁 뒤에서 암약하는 또 하나의 사업 경쟁자 《시궁쥐 추기경》을 찾아 없애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