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시궁쥐 추기경 (1)
마도서는 읽을 수 있는 책 따위가 아니다.
마법사의 경지나 깨달음 자체가 「물질의 형태로 결정화(結晶化)된」 사물이자 아티팩트다.
이론상 마도서를 손에 넣는 것으로 마도서의 필자가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깨달음이나 마도의 경지를 그대로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제국 최고 명문 마탑에서 비급으로 취급될 정도의 마도서는, 말 그대로 마탑주 수준의 경지나 깨달음이란 소리다.
그런데 이론상 마도서를 통해 탑주급의 깨달음을 공유할 수 있음에도, 대다수 마법사는 비급 마도서는커녕 하급 마도서조차 함부로 열람할 수 없다.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수십, 수백 가지의 이유는 결국에 딱 하나로 귀결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
그럼에도 시엔에게 있어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미 훗날의 시엔은 마도서의 ‘대가’를 치르고 손에 넣은 경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모름지기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시엔에게 있어 이 마도서를 읽는 것은 결코 ‘처음’이 아니었다.
제5마탑의 비급 「꼭두각시 벌레의 서」와 제4마탑의 비급 「검은 파라오의 서」─.
끝으로 「공백의 서」─.
훗날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이 손에 넣은 세 개의 마도서이자 깨달음의 결정들.
그렇기에 감당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였다.
지금의 시엔은 훗날의 완전해진 시엔이 아니라, 아직 미숙하고 불완전한 존재란 사실.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느긋하게 나이트워커 가문의 공작령으로 돌아가 지하에서 수련하고 있을 여유 따위도 없었다.
‘아무리 오래 끌어도 비전급 마도서가 사라졌다는 소식은 며칠 내로 놈에게 닿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식이 닿기 전에 마도서의 힘을 오롯이 흡수하고 시궁쥐 추기경을 찾아 쓰러뜨린다.
지체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쉴 틈 없이 말을 달리며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 하룻밤 야영을 위해 멈춰선 야산의 동굴 속.
그곳에서 「꼭두각시 벌레의 서」를 손에 쥐고 시엔이 각오를 다졌다.
마도서(書)라고 해도 알기 쉽게 종이나 양장본 따위로 제본된 서적이 아니다. 심지어 책조차 아니었다.
수정 보석처럼 빛나는 초입방체 구조의 결정이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결정 내부에서 온갖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의 기하학적 문양이나 도형, 문자가 부유하듯 둥둥 떠다니고 있는.
바로 그 결정을 손에 쥐고─ 그대로 부서뜨린다.
쨍그랑!
유리 조각이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마도서에 잠들어 있던 터무니없는 마력이 휘몰아쳤다.
휘몰아치는 것은 마력이 전부가 아니었다.
깨달음이 그곳에 있었다.
마치 나이트워커 공작 가문의 금고를 가득 채운 황금과 보석처럼, 식량 창고를 가득 채운 곡식처럼.
홍수처럼 넘치는 깨달음이 시엔의 세계를 집어삼켰다. 금과 보석, 넘치는 쌀과 빵 속에 갇혀 질식하는 우화 속 어리석은 부자처럼.
그러나 고작 이 정도 보물에 질식할 정도로 시엔과 나이트워커 가문의 그릇은 작지 않았다.
방심하는 것으로 정신이 부서질 정도의 터무니없는 정보량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끝없이 흘러들어오는 지식, 깨달음, 희대의 천재(天才)라 불리는 자가 일평생의 노력과 업을 통해 쌓아 올린 그 전부를, 굶주린 아귀처럼 입 대신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이 대륙 전체의 황금과 식량을 쓸어 담는 것처럼, 지식이나 깨달음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저 탐욕스럽게 집어삼키고 손에 넣는다.
인간의 탐욕에는 끝이 없다. 밑 빠진 욕망의 항아리를 채우는 것은 설령 천금의 재물과 바다처럼 넘치는 곡식이라도 불가능할 테니까.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은 누구보다 그 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
전신에서 꿈틀거리는 마력, 그 마력을 통해 제멋대로 벌레들이 꿈틀거리며 태어나고 스러진다.
일찍이 무너져가는 제5마탑을 되살리고 당당히 대륙 제일의 명문 마탑에 올려놓은 남자의 ‘경지’가, 흡사 댐이 무너지고 흘러넘치는 강물처럼 시엔의 머리에 쏟아져 들어왔다.
꿈틀!
깨닫고 보니, 어느덧 시엔의 손끝에서 춤추는 마력이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사역마로 거듭났다.
너무나 작아서 두 눈으로는 제대로 식별조차 어려울 정도의 생물, 벌레─.
그리고 그것들이 시엔의 뜻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 * *
《시궁쥐 추기경》은 나이트워커 가문의 입장에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들 가문의 눈과 귀에 필적하는 첩보망을 갖고, 미꾸라지처럼 가문의 암살자를 피해 늘 한 발짝 빨리 도망쳐 살아남았으니까.
늘 부족했던 것은 딱 한 걸음이었다.
다시 말해 나이트워커 가문의 정보력으로 ‘한 발자국’까지는 충분히 거리를 좁힐 수 있다는 뜻이다.
샤를마뉴 왕국 동부에 있는 어느 자유도시.
이 시기에 시궁쥐 추기경은 제국령이 아니라 샤를마뉴 왕국에 머물고 있다. 나이트워커 가문과 마찬가지로 칠왕국과 샤를마뉴 왕국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 사업 때문이다.
쉽게 전쟁을 끝내지 않고, 동시에 이 전쟁의 최대 수혜자를 나이트워커 가문이 아니라 ‘신성 제국’의 몫으로 돌리려는 방해 공작.
찍, 찍찍!
바로 그 도시의 온갖 오물과 쓰레기가 모여 악취를 풍기는 하수구. 그곳에서 시엔의 손에 들린 시궁쥐가 필사적으로 바둥거렸다.
‘찾았다.’
벼룩처럼 쥐의 몸에 달라붙어 기생하고 있는 기생충, 일명 꼭두각시 벌레─.
시엔의 체내에 융합된 ‘꼭두각시 벌레의 서’가 감응하며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 그 증거다.
괴뢰충(傀儡蟲)이라 불리는 기생충을 조종해 설치류나 조류를 숙주로 삼고, 쥐에서 쥐로, 쥐의 포식자로, 숙주를 갈아타며 이동해 수백 킬로미터 거리까지 ‘속삭임’을 전할 수 있는 사역술 학파의 정수.
그들의 말마따나 쥐새끼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
수천 마리의 괴뢰충을 조종하며 각각의 숙주에게 이동 명령을 내리고, 각지에 흩어져 있는 이들에게 속삭이거나 정보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
이것은 당대 5마탑주 《로드 시니스터》조차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시궁쥐 추기경의 전매특허다.
그리고 쉽게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감히 제5마탑의 비급, 이 끔찍하고 저주받은 마도서를 설령 손에 넣었다 쳐도 그것과 망설임 없이 융합할 정도의 괴물이 있을 거라고는.
심지어 그걸 통해 ‘가짜 정보’를 흘려 자신을 속여서 끌어낼 줄은.
시궁쥐의 몸에 붙어 있는 괴뢰충을 가느다란 마력의 실로 핀셋처럼 집는다.
그리고 그 벌레의 혀가 속삭이는 것을 듣는다.
─ 나이트워커 가문의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습니다, 추기경 각하.
늘 한 발짝이었다. 한 발짝을 앞두고 나이트워커 가문의 눈과 귀는 지금까지 제국의 혀를 놓쳐왔다.
바로 저 혓바닥 때문에.
이제는 아니었다.
─ 동쪽의 하수도로 나가십시오.
제국의 혀가 아니라, 나이트워커 가문의 혀가 거짓된 정보를 속삭일 테니까.
어느덧 가느다란 마력의 극세사가, 시궁쥐 추기경이 사역하는 괴뢰충의 내부로 파고들었다.
인터셉트(Intercept).
사역마의 주종관계를 조작하고 빼앗는 마법.
그리고 시궁쥐 추기경이 사역하는 괴뢰충을 빼앗기 위해서는 그에 필적하는 마법의 경지가 필요하다.
가령 당대 5탑주 로드 시니스터 내지는, 지금처럼 「꼭두각시 벌레의 서」를 체내에 흡수하고 있는 시엔 정도의 마법사가.
혓바닥에는 눈도 귀도 없다. 보고 들을 길이 없으니, 그저 속삭이는 전부를 진실로 믿을 뿐이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눈과 귀에 맞설 수 있는 제국의 유일한 혀.
동시에 그 ‘유일함’이야말로 그가 가진 최대의 맹점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혀가 무슨 정보를 속삭이든, 그들은 그것을 ‘제국의 혀’라고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혓바닥에는 눈도 귀도 없으니까.
* * *
제국이 취할 수 있는 최속(最速)의 수단을 통해, 5탑의 마도서가 빼앗겼다는 정보가 비로소 남자의 귀에 도달했다.
딱 하루 차이로.
“…….”
그 시각, 동쪽의 지하수로.
─ 동쪽의 지하수로로 나가십시오.
나이트워커 가문의 거짓된 속삭임에 놀아나, 보기 좋게 함정에 빠져버린 남자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약하게 악취를 풍기는 남자, 시궁쥐 추기경.
“설마 마도서와 융합에 성공했을 줄이야.”
로드리고 보르자가 눈앞의 암살자를 보며 담담히 말을 잇는다.
“빌어먹을 마도왕 놈…….”
동시에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욕지거리의 당사자는, 정작 눈앞에서 비급을 훔치게 놔둔 얼빠진 5마탑이나 그것을 훔친 시엔이 아니었다.
“마법사는 탑을 떠날 때, 의무적으로 자신의 ‘비전 마법’을 마도서의 형태로 남길 필요가 있다.”
그 의미를 헤아린 시엔이 조소하며 대답했다.
일정 경지 이상의 마법사는 마탑을 떠날 때, 그가 배운 가장 높은 경지의 마법을 의무적으로 ‘물질화’시켜 그들의 왕국에 남겨둘 필요가 있다.
마법사의 위업과 업적을 치하해 영구 보존하겠다는 듣기 좋은 명분이 있으나, 실상 자신들의 전력 누수를 최소화하려는 의도다.
전대 마탑주 로드리고 보르자의 꼭두각시 벌레 사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시엔이 제국의 혀를 낚아채 속일 수 있었던 것, 그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던 것은 모두 마도왕 바르무어가 이끄는 마법사 왕국의 사익을 지키려는 철칙(鐵則) 덕분이었다.
동시에 그것이 ‘제국’이라 불리는, 세상에서 가장 강대하며 커다란 나라의 실체였다.
황제파, 귀족파, 교회파, 마법파, 기사파, 온갖 파벌들이 뒷골목 조직 폭력배처럼 사분오열로 나뉘어 끝없이 알력 다툼을 거듭하는 나라.
그것이 훗날 ‘그 남자’의 손을 통해 하나의 나라로 거듭나기 전, 제국이란 대국의 실체였다.
그리고 이제는 그렇게 놔둘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지금 이상으로 제국이란 나라를 갈가리 찢어 사분오열시킬 뿐.
눈앞의 남자, 시궁쥐 추기경을 쓰러뜨리는 것은 바로 그 시작이었다.
“자결하지 않나?”
시엔이 조롱하며 되물었다.
“내가 왜 자결해야 하지?”
시궁쥐 추기경이 대답했다. 하수도의 오물과 폐수, 동물 사체가 썩고 파리와 벌레들이 넘치는 부패의 풍경을 등진 채.
“제국의 쥐새끼들에게 절대 나랑 싸우지 말라고 그렇게 소리를 쳐놓고 자기는 모른 체하겠다고?”
시엔이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잇는다.
“너는 도망칠 수 없다.”
“그렇겠지.”
시궁쥐 추기경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럼 지금까지 네 명령에 따랐던 애꿎은 쥐새끼들처럼, 몸소 모범을 보이셔야지.”
시엔의 조롱에 시궁쥐 추기경이 차갑게 웃었다.
“나를 그깟 장기 말 따위와 비교하지 마라.”
장기 말.
지금까지 교회의 명령에 충성하며 시엔의 앞에서 자결하거나, 실패해 절망하고 좌절했던 얼굴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자기가 장기 말이란 걸 알았을까? 아니, 몰랐을 것이다.
자기들을 ‘신의 도구’라고 생각했을 수는 있어도, 일개 인간 따위가 쓰고 버리는 장기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뭐, 그래도 달라질 거야 없지.”
어느덧 소맷자락 속의 왕 시해자를 드러내며 칼끝을 고쳐 잡는다.
“자기 손으로 죽든 남의 손에 죽든, 결과는 똑같아질 테니까.”
동시에 시엔이 가진 ‘운명의 창’의 출력을 최대로 끌어내며 일대에 운명의 기류를 덧씌운다.
그 외에도 지금까지 시엔이 갈고닦은 온갖 비기와 기술, 자신이 끌어올릴 수 있는 전부를 드러내며 말했다.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진실이 깃든 피할 수 없는 언령(言靈)을 속삭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