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13계단의 시험 (1)
시엔이 하이마스터가 되고자 통달하려는 다음 자세는 가문의 3식 「명경지수의 자세」.
가문 내에서도 가장 순수하다 일컬어지는 검의 정수.
마음 같아서는 9식 「크라켄의 자세」나 네버모어를 펼칠 수 있는 4식 「갈까마귀의 자세」를 통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당장 시엔이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하이마스터’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훗날의 시엔을 그랜드마스터가 되게 해준 망령의 자세, 명경지수의 자세, 끝으로 6식 「나락의 자세」 중 하나다.
그중 1식은 이미 견진성사를 통해 마스터를 증명했고, 남은 것은 명경지수와 나락 중 하나.
그중에서 굳이 명경지수를 고른 것은 무척이나 사소한 이유였다.
시엔의 여동생이자 대자 티아 역시, 명경지수의 자세를 배우며 이 자세로 마스터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
그렇기에 그의 대부로서 미리 3식을 통달하고 가르쳐주고 싶었다.
‘명경지수의 자세를 통달하고 성품성사를 치른다.’
성품성사(Sacri Ordines).
하이마스터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성사 중 하나.
그리고 이 성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13계단의 시험’이라 불리는 통과 의례를 거칠 필요가 있다. 말 그대로 가문의 하이마스터들이 각각 내려주는 13개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저 수행하는 게 다가 아니다. 이 임무들을 얼마나 잘 수행했느냐에 따라 임무를 내려준 하이마스터의 평가가 매겨지고, 그 평가를 통해 최종적으로 성품성사를 치를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린다.
다시 말해 시엔이 서 있는 곳은 아직 출발점도 아니란 소리다.
그리고 지금, 시엔은 막 아홉 번째의 계단을 밟고 있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로서 죽여야 할 표적.
샤를마뉴 왕국 제7독립기병연대(7th Cavalry Regiment)를 지휘하는 기병연대장.
「늑대기사」 크리스토프 뒤마.
기사로 활약하며 전장에서 헤아릴 수 없는 군공을 세우고, 그 공로를 치하해 아무런 작위 없는 순수 기사 출신임에도 대검귀족(帶劍貴族)의 작위를 하사받은 역전의 용사.
그에게 죽어 마땅할 할 죄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죽어야 할 이유가 있을 뿐.
늑대기사 크리스토프가 잠들어 있는 천막의 문을 여는 순간, 시엔의 기척을 깨닫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때라도 찾아올 암살자의 위협에 대비해 갑주 차림으로 무장하고 곁에 둔 칼자루를 손에 쥐며.
“……누구냐.”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체를 드러낼 별과 단검의 문장도 없다.
그저 칠흑 같은 로브와 1위계 마법 ‘섀도우 페이스’로 얼굴을 감춘 암살자가 있을 따름이다.
“적습이다!”
스릉.
“암살자가 나타났다! 당장 경계 태세를 굳혀라!”
칼자루를 뽑으며 늑대기사가 힘껏 소리쳤다. 그러나 그 외침에 아무 대답도 울려 퍼지지 않았다.
그저 소름 끼치는 정적이 이어진다. 끝없이.
흡사 무덤가를 거니는 듯한 귀기(鬼氣)에 비로소 깨달았다.
“모두…… 죽었나?”
경악하는 그의 물음에 그림자의 얼굴을 쓴 암살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소맷자락에서 흑광의 서슬을 빛낼 뿐이다.
시린 서슬 사이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설마 기병대 전부를…….”
칠왕국의 침략자들을 후방에서 우회 기동으로 타격하기 위해 4개 대대 규모로 꾸린 소수 정예 기병대. 아무리 200명 남짓의 숫자라도 그들 하나하나가 전부 오러를 쓸 수 있는 역전의 기사들이다.
실제로도 칠왕국의 1차 침략 당시 제7독립기병연대는 과감하고 독자적인 작전 수행을 통해 그 명성을 떨쳤고, 다시 시작된 2차 침략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바로 그 역전의 용사 전부를,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하는 사이에 모조리 암살했다고?
황당해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그토록 터무니없는 짓이 가능할 리가…….
“─아.”
생각하다 말고 깨달았다.
시엔 ‘나이트워커’가 땅을 박찬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카앙!
미끄러지듯 칼날이 맞부딪친다. 눈앞에 있던 시엔의 기척이 사라졌다. 나이트워커 가문이 자랑하는 제1식, 망령의 자세.
동시에 늑대기사의 이명을 가진 크리스토프 역시 고유의 자세를 취하며 검을 맞받아쳤다.
「늑대의 자세」.
카앙!
재차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지?’
그러나 아까처럼 투박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종이 울리는 것처럼 투명하고 청아한 울림이 깃든 쇳소리였다.
늑대기사로서는 알 턱이 없을 것이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아홉 검식 중에서도 가장 순수하다 일컬어지는 검의 정수, 명경지수의 자세.
바로 그 검식이, 크리스토프가 펼친 「늑대의 자세」를 대칭이 된 거울처럼 모방하고 있음을.
똑같은 자세, 똑같은 움직임. 그것은 모방이란 수준조차 아니었다.
‘버겁다!’
자신과 똑같은 검을 쓰는 암살자. 자신이 일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늑대의 자세’를, 마치 거울처럼 비추어 보며 흉내 내고 있는 가짜.
그럼에도 그 가짜의 검이, 진짜를 압도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가짜에 패배하는 진짜를 진짜라고 부를 수는 있나?
카앙!
재차 칼날이 맞부딪치며 불똥이 튀었다.
“우리의 거짓말은 남들의 진실보다 훨씬 붉은 피를 흘리고 있다.”
그와 동시에, 침묵하고 있던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늑대기사의 표정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쨍그랑!
어느덧 거울의 대칭이 무너져 내린다. 무너진 동시에 시엔의 손에 들린 ‘왕 시해자’가 어느덧 그의 가슴팍을 꿰뚫고 있었다. 피가 흩뿌려졌다.
“커헉……!”
칼끝이 내리꽂히고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남자의 자세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 말마따나 늑대의 자세를 모방하는 시엔의 칼끝에는, 늑대기사의 피가 묻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깨닫고 보니 천막 입구에 새로운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의 붕대로 두 눈을 가린 여성이었다.
손에는 자기 키보다 커다란, 터무니없는 길이의 태도(太刀)가 들려 있다.
그 모습에 시엔 역시 놀라지 않고 ‘왕 시해자’에 묻어 있는 피를 털어냈다.
“7점. 여전히 거울이 탁하구나.”
실루엣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점수가 박하시네요, 린 누님.”
“글쎄, 13번째 계단을 오를 때까지 달라지길 바랄 수밖에.”
「밴시」 린 나이트워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문의 2식 ■■■의 자세와 더불어 3식 명경지수의 자세에 통달해 있는 하이마스터이자, 검의 경지에 있어서는 가문 최강의 검사라 불리는 강자.
“제 자세에 부족한 게 뭐죠?”
“알려준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야.”
린 나이트워커가 대답했다. 동시에 시린 밤바람과 함께 등 뒤의 천막 입구가 흩날린다.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저 잘린 팔다리와 몸통, 머리, 내장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을 뿐.
“그래도 ‘보여줄’ 필요는 있겠지.”
스릉.
그 상태에서 가문 최강의 검사, 린이 태도의 칼자루를 뽑았다. 여전히 칠흑의 붕대로 두 눈동자를 가린 채.
“「톱니바퀴의 자세」.”
일찍이 과거 시엔이 오크 전사를 상대로 쓴 자세이자 상대에게 일방적 다지선다를 강요하는 묘리.
2식 「■■■의 자세」는 결코 톱니바퀴와 거짓말쟁이의 양자택일이 아니다. 심지어 양치기 소년의 자세조차 진명(眞名)이 아니다.
오히려 2식은 자세의 이름을 외치고 상대에게 움직임과 심리전을 강요하며, 그 노림수를 읽고 패를 내놓는 ‘도박’에 가깝다.
도박사는 상대의 움직임과 눈짓, 표정, 손짓 하나에서 헤아릴 수 없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장 순수한 검을 구사하는 검사이자, 동시에 가문 제일의 도박사로 불리는 그녀가 땅을 박찬다.
그녀가 펼치는 것은 2식의 어느 묘리일까.
‘아마 톱니바퀴의 자세를 입에 담고, 실제로도 톱니바퀴의 자세를 구할 셈이겠지.’
시엔이 나름의 심리전 끝에 해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쇄도하는 그녀의 검에 맞서 자신의 해답이자 카드 패를 내놓는다.
틀렸다.
‘거짓말쟁이의 자세!’
2식 ■■■의 자세는, 철저하게 상대를 속이는 도박의 검식이다.
스릉.
‘제기랄.’
어느덧 시엔의 머리에 린의 칼끝이 겨누어졌다.
‘그래도 이걸로 정보는 손에 넣었다.’
겨누어진 칼끝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엔이 말했다.
“다시 하죠.”
“그야 얼마든지.”
그 말에 린이 미소 짓는다.
다시금 칼을 거두고 거리를 벌린 채, 그녀가 말했다.
“거짓말쟁이의 자세.”
톱니바퀴와 거짓말쟁이, 2식을 구사하는 도박사가 가장 처음 손에 넣게 되는 두 장의 카드 패.
숙련된 2식의 구사자는 이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카드 패를 손에 넣고 현란하게 구사하나, 지금의 그녀는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딱 두 장의 카드 패로 상대할 뿐.
다시 말해 시엔이 정답을 맞힐 확률 역시 50%란 뜻이다.
‘헤아리지 않는다.’
어설프게 상대의 움직임을 읽으려 들어봐야 악수(惡手)다. 상대가 딱 두 장의 카드 패를 내밀고 정답을 요구하는 이상, 쓸데없이 잔꾀를 쓸 필요조차 없다.
카앙!
다시금 린이 쇄도했고, 시엔은 오로지 찍을 생각으로 ‘거짓말쟁이’를 예상하며 카드 패를 냈다.
‘톱니바퀴?!’
또다시 시엔이 틀렸다.
“다시 해요.”
그렇기에 시엔이 고집을 부리듯 말했다. 린이 미소 지으며 재차 거리를 벌린다.
“나는 이제부터 거짓말쟁이의 자세를 취할 거란다.”
린이 말했다. 그 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엔이 50대 50의 확률 속에서, 카드 패를 냈다.
상대가 톱니바퀴의 자세를 취할 거라 예상하고.
아니었다.
거짓말쟁이였다.
시엔이 톱니바퀴의 자세에 대응하기 위해 자세를 갖추는 동시에, 린 나이트워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거짓말쟁이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도박에는 영 소질이 없어 보이는걸, 시엔.”
“……처음부터 누님이 이길 수밖에 없는 사기도박이니까요.”
“그래.”
시엔의 말에 린이 부정하지 않고 순순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이것은 50대 50의 확률 싸움이 아니다.
“그래서, 무슨 수로 나의 도박이 사기란 걸 증명할 셈이니?”
대답할 수 없었다.
일부러 훗날의 기억을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지금 의존해야 할 것은 훗날의 지식이 아니니까.
지금 시엔의 두 눈동자로 저 사기를 파훼하지 못하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파훼할 방법은 오직 하나다.
사기꾼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가장 순수하고 티끌 없는 가문의 자세를 떠올리며.
‘무릇 사람들이 자기 모습을 물에 비추어 보려고 할 때는 흐르는 물이 아니라 고요히 괴어 있는 물을 거울로 삼을 것이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제3식, 명경지수의 자세.
그중에서도 마음의 거울이라 일컬어지는 심경의 초식─.
“나는 또다시 거짓말쟁이의 자세를 취할 거란다.”
의식을 가다듬는 동시에 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엔 역시 자세를 다잡고 검을 고쳐 잡았다.
타앗!
거리가 좁혀진다. 시엔이 그녀가 ‘톱니바퀴와 거짓말쟁이’ 중 어느 패를 진짜로 쓸지 예측하고 답을 내놔야 할 찰나.
처음으로, 칼날이 맞부딪쳤다.
그리고 깨달았다.
─답을 내놓지 않는 게 정답이었음을.
“눈치채는 게 너무 늦었구나.”
그녀가 구사하는 것은 애초에 가문의 2식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녀가 쓰고 있던 자세는 상대의 움직임을 거울처럼 비춰보는 ‘명경지수의 자세’였다.
오히려 시엔이 멋대로 린의 움직임을 지레짐작하며 톱니바퀴와 거짓말쟁이 중 하나의 자세를 구사할 때마다, 거기에 맞춰 ‘카운터 카드’를 냈다.
그녀는 마음의 거울을 통해 상대의 움직임을 모방하거나 흉내 내지 않았다.
오히려 거울 속 상대의 움직임과 카드 패를 읽고서, 허를 찌르는 2식의 묘리를 합쳐 ‘거울로 비춰본 상대의 약점’을 찔렀을 뿐.
“상대의 마음의 거울로 읽었다고 해서, 굳이 그 거울의 대칭이 될 필요는 없지.”
린 나이트워커가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순수한 검술의 마스터라고 믿을 수 없는 목소리로.
─동시에 이것이 ‘하이마스터’의 무게였다.
두 개의 검식을 자유자재로 융화하며 전투에서 ‘하나의 검식’처럼 구사하는 것.
하나의 검식을 마스터하는 것과 두 개를 마스터하는 것의 무게는 그저 1과 2의 차이가 아니다.
하나의 검식을 마스터할 때는 그것이 무의식에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무의식에 확실하게 때려 박아 그 검술을 몸에 체화시키는 게 중요하니까.
아니, 오히려 그 정도 레벨이 되지 않고는 결코 마스터를 자처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검식’을 마스터할 때, 심지어 그 검식이 기존에 무의식에 녹아든 정보와 상충하는 묘리를 담고 있을 때, 충돌하는 두 가지 검식을 하나로 융합하는 것은 절대 1+1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물과 기름을 섞는 개념에 가깝다.
가령 나이트워커 가문의 검술 중 가장 순수하다 일컬어지는 3식 명경지수의 자세, 그리고 가장 교활하고 교묘하며 상대를 속이는 도박사의 묘리와 고도의 심리전을 요구하는 2식─ ■■■의 자세를 동시에 구사하는 그녀처럼.
그녀가 펼치는 것은 가문의 2식도 3식도 아니다.
오히려 두 가지 검식 모두를 합친 제3의 무엇에 가깝다.
그리고 그 ‘제3의 무엇’을 손에 넣지 못하는 이상, 결코 하이마스터가 될 수 없다.
“좀 더 ‘마음의 거울’을 보는 법에 능숙해질 필요가 있겠어.”
“어떻게요?”
“마침 내가 아는, 사람의 마음을 읽기에 최고의 수련장이 있지.”
“그게 어디죠?”
태도를 칼집에 넣으며 린이 태평하게 대답했다.
“도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