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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78화 (78/200)

78화. 13계단의 시험 (2)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지름길에는 세 가지가 있다.

술, 색욕, 도박.

아무리 국가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지 말라고 부르짖어도 기어코 손을 대게 되고,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것들. 아무리 나쁘고 해롭다는 걸 알아도 무심코 손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이며, 제 발로 불나방처럼 불구덩이 속에 뛰어들어 자기 자신을 불사른다.

그리고 그 세 가지는, 베네토 공화국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공화국이 운영하는 대륙 제일의 국영 도박장, 카지노 디 베네토(Casinò Di Veneto)─.

대륙의 온갖 나라들이 법과 교회의 이름으로 어떻게든 도박을 틀어막고 음지에 모이는 것과 달리,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도박이 ‘불법’이 아니다.

그렇기에 도박꾼들의 성지나 다름없는 이곳은 공화국의 가장 커다란 세금 수입처 중 하나였다.

밤이 깊어도 꺼지지 않는 베네토의 야경과 밤바다의 풍경을 즐기며, 아무리 새벽이 깊어도 좀처럼 끝나는 일 없는 환락가.

시엔 나이트워커는 바로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느 손님들처럼 가면과 의상으로 전신을 가린 채, 품속에 백 개의 칩을 넣고서.

이곳 카지노에는 칩의 색깔에 따라 동화나 은화의 일부 가치밖에 되지 않는 작은 푼돈부터, 칩 하나로 공화국 금화 몇 닢의 가치와 맞먹는 것까지 온갖 종류들이 준비되어 있다.

바로 그곳에서 시엔은 망설임 없이 카지노의 가장 깊고 비밀스러운 곳으로 향했다.

흰색이나 분홍색 따위의 싸구려 칩이 아니라, 공화국 금화 1/2의 가치를 갖는 블랙 칩 이상을 최소 배팅할 수 있는 곳으로.

심지어 시엔이 가진 칩은 흑색조차 아니었다.

흑색 위에 정교하게 금빛이 덧씌워진 흑금(黑金)의 색.

일명 블랙골드 토큰.

칩 하나의 가치는 무려 공화국 금화 5개의 가치와 맞먹고, 블랙 칩과 비교해서는 무려 10배에 맞먹는 가치를 갖는다.

그 증거로 보란 듯 시엔의 블랙골드 토큰 위에는 정교하게 나이트워커 가문을 상징하는 ‘별과 단검’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인간의 마음을 읽는 최고의 수련장. 그 말에 시엔이 헛웃음을 터뜨렸고, 수련장의 상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명 VVIP 테이블.

“아니, 아.”

“이딴 멍청이 생선대가리를 내가 오빠라고! 거기서 카드를 받으면 어떡해!”

가면을 쓰고 있어도 숨길 수 없는, 바다처럼 새파랗게 빛나는 머리카락의 두 남매.

“흠, 아니, 이걸 폭사하네.”

라파엘로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고, 곁에 있던 레이디 마린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쏘아붙였다.

“투자는 천운의 영역이요, 도박은 인간의 영역일지니.”

라파엘로가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하늘이 날 버려도 신조차 모독하는 이 몸의 천재적 두뇌가 날 버릴 줄은 몰랐지.”

“나야말로 오빠의 생선 대가리에 뇌가 들어 있다는 게 믿기질 않을 지경이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시엔이 황당해서 생각했다.

‘아니, 아무리 봐도 거꾸로 된 것 같은데…….’

“흠, 오늘은 바닷물이 좀 따듯하려나.”

“그냥 접싯물에 코 박고 죽지 그래!”

흘끗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블랙잭 테이블.

룰 자체는 알기 쉽다.

딜러에게 카드를 처음 2장 배부받고, 추가로 카드를 받거나 멈춰서 21에 가까운 숫자 내지는 21이 되는 쪽이 이기는 족보 게임. 덧붙여 받은 카드들의 숫자 합이 21을 초과하는 시점에서는 ‘버스트’라 불리며 플레이어의 패배가 된다.

그리고 숫자 카드 1에서 10은 그 숫자대로 점수를 세며, 왕(K)과 여왕(Q), 잭(J)은 10점으로 계산한다.

비교적 도박 중에서도 ‘플레이어의 실력’에 따라서 승리를 따낼 확률이 높다고 일컬어지는 게임.

말이 그렇지, 딜러 앞에서 탈탈 털리고 수백 개의 블랙골드 칩을 잃어버린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친애하는 동생이여, 꼭 따서 갚을 테니까 돈 좀 빌려줄래?”

“이미 다 빌려 갔잖아!”

“흠, 내 코트를 담보로 땅겨서 얼마쯤 나올 것 같니?”

이 나라, 베네토 공화국을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친애하는 라파엘로 제독, 그리고 레이디 마린.”

“어이쿠야.”

“보아하니 돈 좀 잃으신 모양이지요.”

“아 뭐, 보다시피 좀…… 많이 잃었죠.”

라르바 가면을 쓴 시엔의 정체를 의심하는 일조차 없이, 라파엘로가 어깨를 으쓱였다. 피차 이곳에 있는 이들이 얼굴 좀 가렸다고 서로를 못 알아볼 리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이것이 린 나이트워커가 시엔에게 시험이었다.

‘VVIP 테이블에서 블랙골드 칩 100개를 아침까지 373개로 불릴 것.’

그저 4배로 불리는 게 다가 아니다. 정확히 칩의 숫자, 개당 공화국 금화 5개의 가치에 해당하는 칩의 개수까지 ‘373개로 딱 맞춰서’ 불리란 것이다.

3, 7, 3. 하나같이 맞추려고 해도 쉽게 맞출 숫자가 아니다. 그냥 불리는 것도 어려운데 불려서 각각의 자리 숫자 단위까지 맞추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그곳에 있는 도박사들의 마음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고 좌지우지하지 않는 이상에야.

흘끗 고개를 돌려서, 라파엘로를 말 그대로 영혼의 밑바닥까지 털어먹은 블랙잭 딜러를 살폈다.

입이 쭉 찢어진 어릿광대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였다.

“……도둑놈이 여기서 뭐 하고 있냐?”

“어허, 도둑놈이라니요. 말씀 조심하시죠.”

아릿광대 마스크의 남자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보다시피 합법적으로 부업을 뛰는 중이랍니다.”

“…….”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란 말씀이 있잖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딜러로 열심히 일하고 있죠.”

그 말에 시엔이 헛웃음을 터뜨린다. 그 말대로 베네토 도둑 길드의 이들은 보통 도둑이 아니다.

그리고 이 카지노는 그들이 ‘합법적으로’ 돈을 훔칠 수 있는 사업 장소이기도 했다.

물론 나이트워커 가문이 눈을 뜨고 감시하는 이곳에서 알기 쉬운 도둑질이나 사기를 치는 게 아니다. 신뢰는 이 나라의 생명과 같으니까.

오히려 그들은 그 누구보다 철저하게 교육받은 프로였다.

“정정당당한 승부의 세계에 어서 오시죠.”

어릿광대 가면을 쓴 얼굴 없는 자가 웃었고, 시엔이 자리에 앉았다.

“마린.”

“어, 응?”

“나랑 같이 참여하자.”

블랙잭은 기본적으로 딜러와 플레이어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대일 게임이나, 숙련된 딜러는 혼자서 여러 명의 플레이어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 가능하다.

“난 도박 따위 질색이야.”

시엔의 말에 마린이 대답했다.

“아니, 그럼 카지노에는 뭐 하러 왔는데?”

“저 생선 대가리가 투자로 까먹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기서 털리는 게 나을 테니까 데려왔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공화국의 기둥을 자청하는 이들의 부는 결코 노름 몇 차례에 사라질 정도로 작지 않다.

……거액의 대규모 투자 사업은 모를까.

“그래도 기왕 왔으니 조금 정도는 즐기고 가야지.”

“뭐, 그럴 생각이었지.”

마린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멍청이가 내 칩까지 다 가져가서 까먹기 전까지는.”

그 말에 시엔이 품에서 무엇을 꺼냈다.

블랙골드 칩 50장.

“이야아, 뭐 이런 걸 다 주시고.”

칩을 보자마자 라파엘로가 황송하다는 듯 말을 잇는다.

“역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제독이 아니라 레이디 마린 양에게 드리는 겁니다.”

“어, 제 몫은요?”

“카지노에 기부하러 온 사람더러 돈을 빌려줄 정도로 여유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시엔이 말했다.

“어때, 마린?”

“뭐, 조금 정도는 못 즐길 것도 없지.”

마린이 대답했다.

딱히 그녀와 협력할 생각도 아니고, 애초에 블랙잭은 다수의 플레이어와 딜러가 동시에 1:1을 치르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굳이 그녀에게 칩을 빌려준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비록 지금 당장의 목적과는 별 상관이 없었으나.

시엔이 50개의 블랙골드 칩 중 3개를 배팅하고 게임을 시작했다.

마린은 5개.

“흠, 장차 공화국의 그림자와 바다를 짊어질 분들께서 배팅액이 의외로 소심하시네요.”

“시끄럽고, 카드나 내놔라.”

얼굴 없는 자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시엔에게 카드 두 장을 배부하려는 찰나였다.

“아, 잠시. 저도 다시 끼죠.”

“오빠?!”

어느새 입고 있던 화려한 모피 코트가 사라진 라파엘로 제독이 착석했다. 그 모습에 마린이 경악과 경멸의 표정을 지었고, 딜러가 담담히 세 사람에게 카드를 배부했다.

‘하트 10에 클로버 10.’

시엔의 패는 시작하자마자 20. 사실상 최고의 패라 봐도 무방하다. 카드 카운팅이고 나발이고 여기서는 멈춰야 할 때다.

그 상태로 시엔이 흘끗 고개를 들어 얼굴 없는 자를 바라보았다.

가면에 가려진 저 얼굴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헤아리며.

훗날의 시엔 나이트워커가 통달했던 세 가지 검식 중 하나, 제3식 명경지수의 자세.

가장 순수하다 일컬어지는 이 자세를 이용해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린 나이트워커는 가장 교묘하다 일컬어지는 2식과 섞어 시엔을 함정에 빠트렸다.

훗날의 시엔조차 워낙 기존에 배운 묘리와 상충하는 까닭에 가장 경지가 낮았던 제2식, ■■■의 자세.

린 나이트워커는 아니었다.

‘최악의 상성이라 불리는 2식과 3식의 하이마스터.’

역설적으로 가장 상성이 나쁘고 상충되는 두 자세를 마스터했을 때, 그녀는 가문 제일의 검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린이 지금의 시엔을 평가했을 때 준 점수는 고작 7점.

명경지수의 자세.

마음에 흐림과 혼탁함이 없이 맑고 고요하며, 절대에 가까운 평정을 유지하는 가문의 3식.

무엇이 모자라는지, 무엇을 더해야 할지는 정작 시엔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린 나이트워커는 그 이상으로 시엔에게 무엇이 부족하고, 어디서 그것을 깨달을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탁하고 마음이 흐려지기 쉬우며,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이곳 카지노야말로 마음을 갈고닦기에 최적의 장소였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라파엘로 제독이 무려 합계 19점의 카드 패를 쥐고 말했다.

“히트(Hit).”

“?!”

뒤이어 10점을 갖는 Q(여왕)이 나오며 폭사.

“아니, 와, 이게 터지네.”

“거기서 카드를 받는 멍청이가 또 어딨어!”

“흠. 보렴, 동생아. 여기 있잖니.”

마린이 어처구니가 없어 소리쳤다.

“…….”

그런데 이상했다.

“흠, 제 셔츠는 얼마쯤 할까요? 알다시피 이게 보통 고급 소재가 아니라…….”

입고 있던 코트는 물론 졸지에 셔츠까지 털리기 일보 직전의 라파엘로는, 보통의 플레이어들과 달리 마음에 일말의 흐트러짐이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수평 너머로 끝없이 펼쳐져 묵묵하게 출렁이는 망망대해처럼.

“나는 스테이.”

마린이 자신의 패를 보고 멈춘다. 딜러가 공개하고 있는 업 카드와 자기 패를 헤아리고, 6개의 덱 셔플을 기준으로 하는 블랙잭 카드 카운팅의 교과서 전법.

‘좀 치네.’

그걸로 그녀에게 칩을 빌려준 가치는 이미 충분했다. 그 모습을 보며 시엔이 입을 열었다.

“히트.”

“뭐라고?!”

그리고 20점을 가진 시엔이 입을 열자, 제 오빠처럼 생선 대가리를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마린이 경악했다.

직후, 얼굴 없는 자의 가면 너머에서 ‘물결’이 일렁였다.

“흠, 이것 참.”

그가 새로 넘겨준 카드의 숫자를 살핀다.

“……!”

클로버의 1, 합계 21점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처럼.

* * *

“와, 이거 진짜 도둑놈이 따로 없네요.”

시엔의 손에 들린 373개의 블랙골드 칩을 보며 얼굴 없는 자가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승부의 세계에 도둑놈이 어디 있어?”

“뭐, 승자와 패자가 있을 따름이죠.”

얼굴 없는 자가 말했다.

“그나저나 보통 이렇게까지 싹 털어먹는 승자를 ‘도둑놈’이라고 하지요.”

“그것참 고마운 칭찬이네.”

돈을 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승패를 위해 이곳에 온 것도 아니었다.

배우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예정된 블랙골드 칩 373개를 손에 넣고 나서는, 어느덧 어릿광대 마스크를 쓴 ‘딜러’가 그곳에 있었다.

그것도 값비싼 칩이 아니라 흰색이나 분홍색의 싸구려 저가 칩을 걸고 벌어지는 테이블에.

날이 밝을 때까지, 그들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욕망과 탐욕의 물결 하나도 놓치지 않고.

“꺄악!”

바로 그때, 느닷없이 비명이 들렸다.

“변태야!”

“꺄아악!”

어느새 알몸 차림의 라파엘로가 당당하게 카지노를 나서며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그 당당함에는 시엔조차 경악해서 시선이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수상쩍은 실루엣 하나가 라파엘로의 뒤를 밟으며 사라진다.

마린이 아니다. 아무리 제 오빠라도 알몸으로 걸어 다니는 노출광과 함께 행동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 그림자가 시엔이 올라야 할 13계단의 마지막 이름이란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히트맨(Hitman)」 로베르트.

라파엘로 제독을 노리는 암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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