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80화 (80/200)

80화. 하이마스터 서품 (1)

“마지막 계단을 올랐구나, 시엔.”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 골렘이 널브러진 그곳에, 어느덧 칠흑의 붕대로 눈동자를 가린 가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린 누님.”

“걱정 마. 레이디 마린은 라파엘로 제독과 무사히 ‘그들의 영역’으로 돌아갔으니까.”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저것에게서 무엇을 봤지?”

눈을 가린 그녀가 시엔을 향해 흘끗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마치 무엇도 그녀의 눈동자를 가리지 못하는 것처럼.

이곳 카지노에 오고 나서 시엔이 배운 모든 것들을 시험하려는 듯이.

“부재(不在).”

시엔이 대답했다. 그 말에 린의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공포의 부재, 두려움의 부재, 감정의 부재, 놈에게는 ‘없는 것들’로 넘쳐나고 있었어요.”

“멋진 대답이구나.”

바로 그때,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말의 기척조차 없이.

“……라일라 언니.”

“고생이 많았단다, 린.”

“그야 가족의 일이니까.”

린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마치 허물없는 자매처럼 미소 지으며.

“무엇보다 언니의 아들은, 내 아들이나 다름없잖아.”

“늘 고마워.”

“…….”

라일라가 미소 짓는다. 두 자매의 대화에 침묵하고 있던 시엔의 얼굴이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붉어졌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은 자신이 어리다는 사실을 실감했던 까닭에.

성년을 앞둔 시엔이 어리다고 말하는 것은 알기 쉬운 겸손이나 은유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시엔은 어렸다. 비록 불사의 삶을 살아가는 괴물은 아닐지라도, 보통 사람의 수명을 아득히 상회하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 사이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동시에 그토록 어린 시엔이, 그 후로 허락된 아주 짧은 세월 속에서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고 차기 가주의 무게를 짊어졌다는 것이다.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의 뒤를 이어 암살자들의 아버지 앞에 대륙의 온갖 강자들이 무릎 꿇고 쓰러졌다.

라일라의 손에 헤아릴 수 없는 제국의 강자들이 쓰러진 것처럼, 시엔의 손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손으로, 이제는 그 누구도 더 이상 가족을 해치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날의 지옥 같은 기억을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라일라의 아들 시엔이 린의 아들과 다름없듯, 라일라의 자매 린 역시 시엔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가족이니까.

“어쨌든 이걸로 13번째 계단을 오른 셈이구나.”

“뭐, 몇 계단 정도는 생략해도 문제없겠지. 지금의 시엔에게는 시간 낭비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하이마스터들이 내린 13개의 시험조차 시간 낭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린의 말에 라일라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엔 역시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린, 네가 보기에 시엔의 3식은 어느 정도의 경지라고 생각하니?”

“시엔에게는 충분히 하이마스터의 서품(敍品)을 받을 자격이 있어.”

라일라의 물음에 린이 대답했다.

“나 외에도 시엔에게 ‘13계단의 시험’을 내리고 입회했던 형제자매 전원이 동의했지.”

성품성사를 치르기에 앞서 13계단의 시험을 내려줄 수 있는 것은 같은 하이마스터뿐. 비록 아홉 번째 계단에 이어 곧바로 열세 번째 계단을 밟기는 했지만, 그걸로 시엔이 서품받을 자격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했다.

서품, 정확히는 성품성사를 치른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얻게 될 《암살자의 진명》.

웃는 남자, 밴시, 늙은 암살자, 마녀와 사냥꾼, 대량학살장치 등…….

하이마스터가 되는 성품성사는, 사실상 저 진명을 얻는 과정이라 봐도 과장이 아니다.

별명 자체는 미하일이나 이자벨처럼 굳이 하이마스터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얻고 불릴 수 있다. 당장 시엔은 물론 비고에게도 나름의 별명이 붙어 있기는 하니까. 그럼에도 하이마스터의 서품을 받고 얻게 될 진명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바로 그 이름을 손에 넣는 것이 성품성사의 내용이다.

정확히는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받는 거지만.

누구로부터?

─나이트워커 가문의 정점 ‘암살자들의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가문의 가장 지혜로운 자, 콘실리에리 루나 나이트워커와 함께.

가주와 콘실리에리. 오직 그 둘만이 가문의 성품성사를 집전할 자격을 가지며, 두 사람 외에는 어떤 가족도, 하이마스터나 마스터는 물론 대부모 역시 입회할 수 없다.

유일한 예외는 가주나 콘실리에리가 당사자의 직접적인 후견인일 경우, 바로 지금 같은 경우다.

“고작 열아홉 살 나이에, 하이마스터의 서품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니.”

라일라가 믿기 어려운 듯한 목소리로 쓴웃음 짓는다.

“정말로 준비가 되었니, 시엔?”

“저는 준비됐어요.”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라일라 역시 여느 때처럼 시엔의 진실한 각오를 받아들일 것이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내가 보기에는 아직 때가 이른 것 같구나.”

“─.”

아니었다.

“어머니……?”

“아직은 아니란다, 시엔.”

시엔조차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말. 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엔은 충분한 자격이 있어. 라일라 언니, 아니─.”

직전까지 라일라를 허물없는 자매처럼 대하던 린이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우리의 가주, 경애하는 암살자들의 어머니여.”

“…….”

라일라가 침묵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침묵 끝에 라일라가 말을 잇는다.

“나와 루나 님의 앞에서 성품성사를 무사히 통과하고 하이마스터의 서품을 받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거야.”

“그럼 뭘 망설이는 거야, 라일라 언니?”

“시엔의 손에 제국의 《시궁쥐 추기경》이 쓰러지고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니?”

“……?”

뜻밖의 물음에 린이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시대의 강자이자, 시엔의 손에 쓰러지고 그 칭호와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마도의 유산마저 빼앗겨버린 남자.

“고작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단다.”

라일라가 말했다.

“그사이 모습을 감춘 체사레가 신성 제국과 손을 잡고, 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운명의 창의 지분을 전부 양도받았지.”

공석이 된 로드리고 보르자의 뒤를 이어 제국의 새로운 추기경이 된 괴물, 체사레 보르자.

그 정도의 중대사를 나이트워커 가문이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건데?”

린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고, 라일라가 대답했다.

“이 상황에서 시엔이 ‘하이마스터의 서품’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그들이 지금처럼 침묵을 지키리라 생각하니?”

“……놔둘 리가 없겠지.”

그 의미를 헤아린 린이 비로소 숨을 삼켰다.

세상에는 정도란 게 있는 법이다. 당장 스물 나이에 마스터가 되는 것조차 나이트워커 가문 내에서는 손에 꼽을 재능이며, 그것도 모자라 아직 스물조차 되지 않은 19살의 시엔이 하이마스터가 된다는 것.

그것은 아무리 나이트워커 가문의 후계자라 해도 용납받을 재능의 정도를 넘어섰다.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란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이 세계에서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은 충분히 ‘모난 돌’이다.

고작 수십 명의 힘으로 대륙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힘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가문, 하물며 그 가문 내에서조차 규격 외로 취급될 정도의 성장세를 가진 시엔 나이트워커의 재능.

그 정도로 터무니없는 위협과 불확실성을 이 세계가 용납할 리 없다.

그것은 이미 모난 돌 어쩌고 하는 수준조차 아니다.

“칠왕국 연방, 샤를마뉴 왕국, 신성 로마누스 제국…… 아마 온 세계를 적으로 돌리게 되겠지.”

세계의 적.

아무리 암살자들의 어머니와 나이트워커 가문이라 해도 세계 전체를 적으로 돌리고 살아남을 수는 없다.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과 그의 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문은 지금도 천칭의 평형을 무너트리기 일보 직전이란다.”

대륙의 질서라 불리는 천칭의 저울. 그 위에서 나이트워커 가문의 무게추는 이미 위태로운 평형의 끝자락에 이르렀다.

“힘에 의한 질서와 조화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 우리 가문은 이미 낭떠러지 끝으로 몰리고 있거든.”

하물며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져 있는 천칭의 저울접시 위에 시엔이 새로 ‘하이마스터’의 무게추를 올려놓는 순간, 천평칭의 저울은 완전하게 기울어질 것이다.

그것이 라일라의 예상이었다.

‘눈치가 빠르다는 것은 좋은 미덕이지. 때로는 침묵할 줄도 알아야 하니.’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박쥐처럼 이익을 챙기며, 절묘하기 이를 데 없는 줄타기와 처신을 거듭해온 눈치야말로 나이트워커 가문과 베네토 공화국이 지금껏 살아남아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었던 이유니까.

시엔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훗날의 시엔은 물론 지금의 라일라조차 놓치고 있는 그들 가문의 가장 치명적이고 커다란 과오.

그 과오가, 나이트워커 가문을 멸문(滅門)으로 몰아넣었다.

“틀렸어요, 어머니.”

시엔이 말했다. 일말의 주저도 없는 목소리로.

뜻밖의 말에 라일라가 놀란 듯 눈을 끔벅거린다.

“틀렸다니?”

“정말 이 대륙의 질서─ 천칭의 저울이, 아직도 기울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시엔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우리 가문은 이미, 우리 손으로 천칭의 평형을 진즉에 무너뜨렸어요.”

“그럼 어째서 온 세상이 우리 가문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 거니?”

“왜 적으로 돌리지 않았다고 생각하죠?”

오히려 시엔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 물었다.

“아직 평화로우니까 그러신가요?”

“─아.”

라일라가 처음으로 숨을 삼켰다.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일찍이 그녀 자신이 ‘전쟁과 평화’ 속의 택일을 강요할 때, 서펀트 가문의 노괴 우르슬라크의 말을 떠올렸다.

전쟁과 평화, 그게 네놈들 가문의 방식이지.

“어머니께서는 이 세계와 전쟁을 벌이느니, 차라리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비위를 맞추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시나요?”

나이트워커 가문과 전쟁을 벌이느니, 차라리 자신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비위를 맞춰주는 쪽이 낫다고 말이야.

“우리는 이미 세계의 적이에요.”

그대의 적들이 그대 가문의 비위를 맞추고 요구를 들어주며─ 전쟁보다 평화가 낫다는 타협 속에서 굴복을 거듭하며 기어코 전부를 빼앗기는 모습을, 나는 이 나라의 역사와 함께 보아왔다.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린 라일라가 말없이 침묵했다.

“그럼 하나 물어보자꾸나.”

침묵 끝에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여느 때의 알기 쉬운 어머니가 아니라, 그들 가문을 짊어진 가주의 위엄이 깃든 목소리로.

“그럼 어째서 우리의 적들은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거지?”

“우리가 항복하고 있으니까요.”

“─.”

시엔이 말했다.

“지금 우리 가문이 누리고 있는 평화는, 평화란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항복에 불과해요.”

그대가 제의하는 것은, 평화란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항복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 가문이 하나둘씩 이 세계의 눈치를 보며 타협하고 평화를 택하며 물러설 때마다, 그렇게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장소까지 물러서게 됐을 때.”

세계는 나이트워커 가문에게 더 이상 평화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바란 것은 처음부터 평화가 아니었으니까.

“전쟁이 일어날 것을 겁내 제가 하이마스터의 서품을 받기를 꺼리고, 눈앞의 평화가 깨질 것이 두려워 제가 성장을 멈추고 침묵하길 바라시나요?”

“…….”

“그게 우리 나이트워커 가문의 방식이었나요?”

거짓된 평화.

오히려 나이트워커 가문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쟁과 평화는 결코 알기 쉬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님을.

그리고 나이트워커 가문이 그들의 적들에게 취해온 방식이, 역설적으로 그들 가문이 저지른 최악이자 최대의 실책이었다.

천칭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시엔이 태어나기 전부터, 심지어 라일라가 그랜드마스터가 되기도 전부터.

아니─ 그들 가문이 이 대륙에 처음으로 발을 들였을 때부터.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예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니?”

“천칭의 저울추가 아직 우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니까요.”

시엔이 말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적의 눈치를 보며 비겁하게 평화와 타협하고 굴복하는 사이, 이 세계는 지금도 힘을 기르며 때를 기다리고 있겠죠.”

훗날 암월의 베르나르트가 개발하게 될 결전마법 아바돈, 제1마탑의 혼종, 그 외의 각종 비밀병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제국의 그림자 속에 숨어 훗날을 도모하고 있는 ‘진짜 지배자’들이 움직일 것이다.

나이트워커 가문이 거짓된 평화에 취해 있는 사이에, 그들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기울어진 천칭의 저울추를 되돌리기 위해.

그 전에 쐐기를 박아야 했다. 이미 나이트워커 가문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저울추를 그 누구도 되돌리지 못하도록 사슬을 묶고 고정할 필요가 있다.

“어머니께서는 무엇을 바라시나요?”

“내가 지금껏 우리 가족과 이 나라에 바란 것은, 처음부터 오직 하나였단다.”

“그게 뭐죠?”

라일라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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