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81화 (81/200)

81화. 하이마스터 서품 (2)

6식 나락의 자세, 3식 명경지수의 자세, 끝으로 가문의 제1식 망령의 자세.

이것이 과거의 시엔이 훗날에 이르기까지 배우고 그랜드마스터가 된 검식의 순서였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지금의 시엔이 검식을 마스터하는 순서는 그 역순(逆順).

견진성사 당시 망령의 자세를 가장 처음 마스터했고, 하이마스터가 되는 성품성사에서는 3식의 마스터를 자처할 것이다.

나이트워커 공작령 북부, 공화국과 신성 제국 사이를 가로막는 국경 지대─ 밤하늘 산맥.

대륙 전체를 통틀어 가장 험준하다고 일컬어지는 산맥 꼭대기에 있는 《달의 사원》.

견진성사를 치를 당시 두 발로 산 정상을 향해서 걸어서 올라갔던 것과 달리, 시엔은 산 정상까지 직통으로 향하는 공중 트램을 타고 있었다.

함께 성품성사를 집전할 가주 라일라와 콘실리에리 루나와 함께.

“천칭의 평형은 이미 무너져 있다라…….”

밤하늘의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공중 트램의 흔들림을 뒤로하고 루나가 말했다.

“실로 흥미로운 지론이구나.”

평소 같은 여유나 미소는 찾아볼 수 없다. 당장 열아홉 살의 시엔이 성품성사를 치른다는 사실부터가 그녀에게 있어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일 테니까.

그러나 그 이상으로 시엔의 주장은 더더욱 그녀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밤하늘의 어둠 밑에는, 마찬가지로 밤하늘 산맥이란 이름을 가진 설산이 순백의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가문은 강해요.”

시엔이 말했다.

“어머니나 루나 님께서 생각하는 이상으로요.”

심지어 과거와 훗날의 시엔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리고 그 강함이야말로, 우리의 적들이 앞서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는 진짜 이유죠.”

그 말에 라일라와 루나가 함께 웃음을 터뜨린다.

나이트워커 가문은 강하다. 아니, 강하다는 말조차도 턱없이 부족했다.

시엔의 말마따나 그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대륙의 질서를 뒤흔들 정도의 위험성을 갖고 있다.

가령 대륙에서 가장 광활하고 비옥한 영토를 가진 샤를마뉴 왕국의 인구수는 수천만 명 남짓. 신성 제국 역시 그와 엇비슷하거나 조금 적은 정도다.

심지어 섬에 갇혀 대륙 진출을 숙원으로 삼는 칠왕국 군도조차, 섬 전체의 인구를 합쳐 천만 명은 우습게 넘을 것이다.

그에 비해 그들의 조국, 베네토 공화국의 인구수는 고작 300만 남짓. 석호 위에 쌓은 척박하고 보잘것없는 영토 크기는 말할 것도 없다.

체급도 국력도 싸움이 성립하지 않는다. 달걀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는 수준의 차이.

바로 그 나라가, 수천만 명의 인구와 비옥한 토지를 통해 끝없이 물적, 인적 자원을 수급하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당당히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고작 수십 명 남짓한 ‘밤을 걷는 자들’에 의해서.

물론 그들 외에도 이 나라는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의 피와 땀을 먹고 자랐다.

제대로 된 자원 하나 없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이 나라의 개척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장사를 시작했고, 푼돈을 밑천 삼아 은행업과 부기(簿記)를 개발하고 금융과 회계의 기초를 쌓아 올렸다.

그 과정에서 메디치 가문의 인간들은 대륙 각지에 은행을 세우고 상업과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베네토 공화국의 화폐를 대륙 기축통화의 지위로 올려놓기 위해 피를 흘렸다.

서펀트 가문의 일원들 역시 흑해와 지중해,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무역로를 독점하기 위해 바다 위에서 피를 흘렸다.

그러나 그중 무엇도 나이트워커 가문, 밤을 걷는 자들이 치른 희생의 무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황금과 바다, 그림자.

지금의 공화국을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

동시에 이 나라, 가장 고귀한 베네토 공화국을 상징하는 국가의 문장.

그러나 이 나라의 어떤 상징도 그들 가문의 무게를 대신해줄 수 없다.

끼이익.

밤하늘 산맥 꼭대기에 세워진 달의 사원. 냉기와 서릿발 속에서 얼어붙은 대리석 문 위에 조각된, 별과 단검의 문장을 제외하고.

시엔이 흘끗 고개를 돌려, 회랑처럼 사방을 감싼 대리석 기둥과 벽을 따라 부조된 가문의 역사를 살폈다.

마지막으로 견진성사를 치렀던 열다섯 살. 어느덧 그때 이후 4년이 지나 달라진 것들을 헤아렸다.

‘새로운 별’ 티아가 태어났고, 형 비고가 무사하게 견진성사를 치러 마스터로 거듭났으며, 얼마 전에 또다시 새로운 두 개의 별, 잭과 클레어 남매가 태어났다.

밤하늘이 별의 일을 기록하듯, 밤하늘 산맥에 기록된 별과 단검의 역사.

‘누구도 우리 가족의 역사를 끝내게 놔두지 않는다.’

어느덧 사원의 회랑을 가로질러 견진성사를 치렀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입회하지 않았던 루나가 시엔을 앞지르듯 실내에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그 자리에서 등을 돌리고 멈춘 채, 시엔에게 말했다.

“신중히 생각하고 발을 들이거라, 시엔.”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장 지혜로운 자, 콘실리에리(Consigliere, 최고 고문)의 이름으로.

“네 앞에 놓여 있는 한 발자국이, 장차 우리 가문의 운명을 결정 짓게 될 테니.”

“…….”

루나의 말에 시엔이 잠시 망설였다.

어쩌면,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

아직 대륙의 질서는 무너지지 않았고, 천칭의 저울은 여전히 평형을 유지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시엔이 성급하게 내린 오판이 그 전부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여기서 발을 내딛는 순간, 하이마스터가 되어 나오거나 영영 나오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다. 예외는 없다.

그리고 시엔이 하이마스터가 되어 나올 때. 그것은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숨길 수 있는 형태의 재능이 아닐 것이다.

그게 바로 하이마스터의 서품을 받는다는 진짜 의미니까.

그렇기에 각오를 다진 시엔이 대답했다.

“우리 가족의 운명을 결정 짓는 것은 제 발걸음 따위가 아니에요.”

“호오, 그럼 무엇이지?”

루나가 즐거운 듯 되물었다.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힘이죠.”

* * *

그 시각, 나이트워커 공작령 내에 있는 베르나르트 후작의 마도 공방.

“이야, 두 발 쭉 뻗고 지내시는 것 같아서 제 마음이 다 흡족하네요.”

뜻밖의 얼굴에 베르나르트 후작의 의외란 듯 모노클을 고쳐 썼다.

“자네는…….”

헝클어진 적발과 함께 밉상스러운 목소리가 들린다. 7식의 구사자를 상징하는 애장(愛備), 일명 《거미 허물》이라 불리는 흑색 정장을 차려입고.

미하일 나이트워커.

일찍이 베르나르트 후작의 망명 작전을 수행했던 가족 중 하나이자, 시엔의 형 비고의 대부.

“달리 용무나 전할 말이라도 있나?”

“뭐, 할 것도 없고 심심해서 들렀습니다.”

미하일이 여느 때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예의 부서진 ‘꼭두각시’를 여기서 보관하고 있다 들어서 말이죠.”

“……히트맨이란 이름의 자동인형 말이지.”

“《자동인형》이라. 그렇게 불리는군요.”

그 말에 미하일이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전신의 금속 뼈를 마구잡이로 사출하며 두 동강이 나버린 인형의 잔해 앞에서.

“골렘 학파를 취급하는 제국 제3마탑의 산물이지.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눈앞의 남자, 미하일을 수식하는 또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퍼펫 마스터(인형사)─.

“진흙으로 빚은 골렘이 아니군요.”

“제3마탑의 마법사들이 흙으로 골렘을 빚은 지는 벌써 십수 년도 넘었다네.”

무슨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를 하냐며 베르나르트가 웃었다. 미하일은 웃지 않았다.

“애초에 생명 물질을 토대로 하는 피조물의 창조와 병기화는, 내가 몸담았던 제1마탑의 ‘물질 조작 학파’의 영역이 된 지 오래지.”

“아, 그렇군요. 그럼 요새는 골렘은 뭐로 걸어 다닌답니까?”

“기계(Machina).”

베르나르트가 대답했다.

“생명력이 깃들어 있지 않은 물질, 생명의 원천이 깃들지 않은 무기물질을 동력으로 기동시키는 것이라네.”

이조차 보통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별나라의 말처럼 들릴 테지만, 정작 베르나르트 역시 제3마탑의 마법에 조예가 깊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골렘 학파, 요새는 기교(機巧) 학파란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제3마탑의 마법.

“쉽게 말해서, 인간이었던 적도 없는 주제에 인간의 형상을 흉내 내는 가짜라 볼 수 있지.”

“아하, 그것참 아주 이해가 쏙쏙 되네요.”

날카로운 서슬을 빛내는 금속의 골격을 내려다보며 미하일이 남의 일처럼 웃었다.

인간이었던 적도 없는 주제에 인간의 형상을 흉내 내는 가짜.

망자조차 일찍이 살아 숨 쉬는 시절이 있었다. 저것은 아니었다.

“친절한 설명 정말 감사드립니다.”

벌써 10년 가까이 지난 옛날. 미하일이 어린 시엔의 정체를 의심하던 그 시절에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왜, 자기 옛날 일이라도 떠올랐나 봐?

* * *

견진성사와 달리 성품성사는 마스터도 하이마스터도 참여하지 않고, 상대해야 할 가족도 딱 두 명뿐이다.

“준비는 되었느냐, 시엔.”

“물론이에요, 루나 님.”

시엔의 첫 상대가 그곳에 있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잿빛 피부와 뾰족한 귀.

대륙에서 가장 불길하고 꺼림칙하다고 일컬어지는 이단의 종, 다크 엘프.

그녀는 알기 쉬운 인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고, 나아가 시엔의 둘도 없는 가족이었다.

가문의 최고 원로이자 콘실리에리─ 루나 나이트워커가 입을 열었다.

“《지혜의 고리》.”

중얼거림과 동시에 딛고 있는 세계의 풍경이 뒤틀렸다.

“제1의 고리, 【추억(Memorial)】.”

“─.”

마치 마법사의 결계 속에 휘말린 것 같은 이질감.

그 말처럼 이곳은 가문의 ‘가장 지혜로운 자’가 펼친 결계 속이었다.

‘제1의 고리라.’

동시에 그 읊조림에 담겨 있는 의미를 모를 리 없다.

하물며 지금 시엔이 마침 ‘1식과 3식의 하이마스터’를 자처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는 더더욱.

여타 가문의 인간들처럼 세례를 받기는 했어도, 정작 루나의 전투력 자체는 그리 높지 않다. 아니, 높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사실상 최약체에 가깝다.

어디까지나 육체의 전투력으로는.

동시에 나이트워커 가문의 2인자, 콘실리에리의 자리는 그저 많은 것을 알고 똑똑하다 얻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몇 대의 가주들이 뒤바뀌는 와중에도 홀로 묵묵히 이 가문의 도서관을 지키며,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이 가족을 위해 기록한 가르침을 수호해온 그녀의 자리는 결코 허명이 아니니까.

풍경이 스러지고 루나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대신, 그곳에는 낯선 남자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돈 비토(Vito).”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시엔이 예를 표했다.

“참으로 대담하구나, 아이야.”

남자가 말했다.

“고작 19살 나이에 벌써 1식과 3식의 마스터를 자청하며, 하이마스터의 서품을 받으려 하다니.”

그 누구보다도 나이트워커 가문을 잘 아는 것 같은 속삭임.

“경애하는 「첫 밤의 아들」이자 가문의 2대 가주를 뵙습니다.”

최초의 밤을 걷는 자, 밤의 아버지 카산의 뒤를 이어 2대 가주에 앉은 암살자의 이명을 입에 담으며.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들 가문의 콘실리에리가 가진 능력이다.

공식적으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역사상 ‘망령의 자세’를 통달했다 불리는 4명의 그랜드마스터 중 하나.

아울러 그들 중 유일하게 지금의 시엔처럼 3식 명경지수의 자세에 통달해 있는 가문의 조상.

카산의 대자이자 2대 가주 ‘비토 나이트워커’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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