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하이마스터 서품 (3)
성품성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가문의 두 사람, 가주와 콘실리에리를 상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장 지혜로운 자’의 이명답게 그녀의 능력은 실로 기이하고 이질적이었다.
시엔의 눈앞에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다.
그것도 이미 오래전에 죽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야 할 과거의 망령.
카산의 대자이자 「첫 밤의 아들」이라 불리는 2대 가주.
비토 나이트워커.
그가 바로 하이마스터가 되기 위해 쓰러뜨려야 하는 시엔의 첫 상대였고, 콘실리에리 루나의 힘이었다.
─지혜의 고리 내지는 《지혜의 암살자(Assassin of Wisdom)》라 불리는 이능.
두말할 것 없이 눈앞의 2대 가주 비토 나이트워커는 진짜가 아니다.
그저 루나의 기억 속에서 추억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허상에 불과하니까.
지혜의 네 고리 중 하나, 제1의 고리 【추억】.
동시에 가장 지혜로운 자가 되새기는 추억의 형상은 결코 실체 없는 허깨비 따위가 아니었다.
콘실리에리의 지식과 지혜를 토대로 재구성된, 더없이 진짜에 가까운 가짜였으니까.
다시 말해 시엔이 상대하는 다크 엘프는, 가문의 2대 가주가 있던 시절부터 나이트워커 가문의 역사를 곁에서 지켜보고 목격해 왔다는 뜻이다.
‘쉽지 않겠어.’
망령과 명경지수, 끝으로 제8식 달그림자의 자세에 통달했다 일컬어지는 그랜드마스터.
보통의 경우, 성품성사에서 루나가 ‘추억의 고리’를 통해 실체화하는 상대는 시험 당사자와 똑같은 경지를 가진 하이마스터다.
예를 들어 과거 시엔이 3식과 6식의 하이마스터를 자청할 당시, 루나는 마찬가지로 ‘3식 명경지수와 6식 나락의 자세를 펼쳤던 하이마스터의 추억’을 꺼내서 재구성했다.
그러나 지금 시엔의 경우는 그럴 수가 없었다.
떠올릴 추억 자체가 없었던 까닭에.
시엔의 나이에 1식과 3식의 하이마스터를 자청하는 가족은, 가문의 역사를 두 눈으로 지켜본 루나조차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그나마 순서대로 3식과 8식, 1식을 통달하고 그랜드마스터가 된 2대 가주 비토야말로, 지금의 시엔과 가장 엇비슷하다 볼 수 있는 상대였다.
‘아니, 차라리 낫지.’
생각하고 나서 시엔이 웃었다. 여기까지 와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성품성사를 치르고, 평범하게 하이마스터가 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눈앞에 있는 강자야말로, 모든 것을 정당화할 힘을 추구하고 가문의 운명을 바꾸려는 시엔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상대였으니까.
무엇보다 지금의 루나는 알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시엔이 그녀가 기억하는 ‘비토의 추억’과 맞서 싸운 것은 처음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루나가 기억하는 그 이상으로 시엔은 훗날 비토의 추억과 지긋지긋할 정도의 싸움을 거듭했다.
목숨이 걸린 이미지 트레이닝.
설령 나이트워커 가문의 이들조차 쉽게 다시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지혜의 암살자’와 수도 없이 칼을 맞대며 쓰러뜨렸던 시엔이니까.
여기서 죽는 순간, 진짜로 죽는다. 이것은 알기 쉬운 환상 따위가 아니니까. 그리고 이것이 바로 루나의 암살법이었다.
진실처럼 붉은 피를 흘리는 거짓의 칼날.
“《영야(永夜)》.”
처음부터 적당히 봐줄 여유 따위는 없다. 그저 전력을 다해 맞부딪칠 뿐.
시엔이 영원의 밤을 입에 담는 순간, 비토 역시 입을 열었다.
“《백야(白夜)》.”
후우웅!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의 등 뒤를 경계로, 검고 어두운 영원의 밤과 눈처럼 새하얀 순백의 밤이 펼쳐졌다.
두 개의 밤, 과거 밤을 걷는 자들의 정점에 이르렀던 2대 가주이자 마찬가지로 훗날 마지막 가주의 자리에 오르게 될 시엔.
과거와 미래, 첫 밤의 아들과 암살자들의 아버지.
카앙!
흑백의 밤과 칼날이 맞부딪쳤다.
등 뒤로 저마다의 밤을 펼친 채, 시엔의 손에 들린 블랙 미스릴 소재의 ‘왕 시해자’와 대비되듯 비토의 미스릴 소재 단검 ‘백귀(White Walker)’가 순백의 서슬을 빛냈다.
쇳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았다. 아니, 아무 소리도 울려 퍼지지 않았다.
그저 호수 위로 조약돌을 던진 듯한 파문이 잔잔히 일렁일 뿐.
「명경지수의 자세」.
좁혀진 거리가 다시 벌려졌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격돌했던 영야와 백야, 흑백의 밤 역시 떨어지듯 거리를 벌린다.
양쪽 모두 극의에 이르러 각자의 오의를 펼치는 망령의 자세.
‘완벽하다.’
그렇기에 볼 때마다 경이로울 수밖에 없었다.
루나 나이트워커는 1식의 마스터가 아니다. 아니, 그녀의 육체는 정작 나이트워커 가문의 아홉 가지 검식 중 그 어느 기술도 통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세계, 그녀가 펼친 지혜의 세계 속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아홉 검식의 마스터는 물론 하이마스터, 심지어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가주까지 불러낼 수 있다.
동시에─ 가짜는 결국 가짜다.
가장 지혜로운 자의 기억과 지식, 지혜와 정보들을 바탕으로 진짜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재구성된 모조품.
그렇기에 성품성사의 첫 시험은 콘실리에리가 펼친 거짓과 맞서 ‘진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타앗!
벌려진 거리가 다시 좁혀졌다. 흑백의 칼날과 밤이 맞부딪치며 뒤섞였고, 여전히 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았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며 헤아릴 뿐이다.
자기 마음을 거울삼아 상대를 비추고 헤아리는 3식의 기술 《심경》.
그 와중에도 시엔의 왕 시해자가 끝없이 비토의 백귀와 격돌하고 맞부딪치며, 뱀처럼 미끄러져 파고들거나 물러나며 격돌을 거듭하고 있다.
망령이 된 서로를 비추며 끝없이 이어지는 거울의 대칭.
그러나 각각의 검식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 정도로는 결코 하이마스터의 이름을 자청할 수 없다.
일찍이 밴시 린 나이트워커가 보여준 것처럼, 가문의 가장 교활하고 교묘하며 속임수의 묘리가 깃든 2식과 가장 투명하고 순수하다 일컬어지는 3식을 합쳐 ‘절대로 이길 수밖에 없는 도박’을 펼쳤듯이.
그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덧없고 망령됨을 뜻하는 ‘망령의 자세’와 ‘명경지수의 자세’를 융합했을 때 무엇이 될까?
─훗날의 시엔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마음먹을 경우 당장이라도 그 답을 꺼내 증명할 수 있었다.
카앙!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부러 꺼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정답을 의도적으로 오답이라 규정하며 피하고 있었다.
기억 속의 미래에 얻게 될 정답에 의존하고 싶지 않다.
머릿속에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조금 알고 있다고 해서, 고작 그 정도로 운명이 바뀔 리 없다.
훗날의 완성된 자신에게 몇 년 더 빨리 다가갔다고 해서 장밋빛이 될 정도로, 시엔의 앞에서 기다리는 미래는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촤아악!
깨닫고 보니 어느덧 거울의 대칭이 무너져 내렸다. 시엔의 어깻죽지를 따라 핏빛의 실이 내리그어졌다.
“평정을 잃었구나.”
“…….”
“네 의중이 너무나도 알기 쉽게 드러났다.”
피가 튀었다.
“명심해라.”
흘리는 피를 보며 비토 나이트워커가 차가운 목소리로 충고했다.
“네 마음을 가족 외의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마라.”
“눈앞의 당신에게도 말입니까?”
“나는 네 가족이 아니다.”
비토가 대답했다.
“나는 그저 과거의 망령일 뿐, 네가 진정으로 지켜야 할 진짜 가족(Familia)이 아니지 않느냐.”
─그것이 바로 루나 나이트워커의 기억에 의해 재구성된 비토 나이트워커였다.
이 순간, 이 시기에 자신이 다시 존재했을 때, 루나는 비토가 이렇게 사고하고 행동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아마 시엔 역시 그럴 것이다.
담담하게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가족의 의무를 수행할 뿐.
설령 자신이 진짜 가족이 아니라 해도,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그 전부를 바칠 테니까.
“네가 나를 죽이지 않는 이상,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아울러 이것은 알기 쉬운 훈련이나 이미지 트레이닝 따위가 아니다.
“나를 죽이고 살아남을 각오로 싸워라.”
“충고 감사드립니다, 경애하는 돈 비토.”
시엔이 화염 마법으로 어깻죽지의 상처를 지지며, 다시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일부러 8식 달그림자의 자세를 쓰지 않고, 시엔의 하이마스터 시험을 위해 정정당당하게 오직 2가지 검식을 쓰고 있는 2대 가주.
시엔이 표시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와 함께 왕 시해자를 고쳐 잡았다.
잡고 나서 마스터했다 믿어 의심치 않은 가문의 3식, 명경지수의 자세를 다시금 헤아렸다.
무엇을 기준으로 우리는 검식의 경지를 ‘마스터’라고 받아들이는 걸까.
묘리도 알고 있다. 검결도 알고 있다. 오의도 펼칠 수 있다. 하물며 그것을 지금의 1식과 조화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통달했다 믿어 의심치 않는 그 경지가, 정말로 마스터가 맞기는 할까?
애초에 동요하지 않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정말 그렇게까지 가치 있는 일일까?
동방 대륙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고위 성직자, 일명 고승(高僧)이라 불리는 이들은 명상 도중 자기 몸이 불타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불린다.
그럼 그들 모두를 나이트워커 가문의 3식, 명경지수의 자세에 통달했다고 불러야 할까?
바로 그때였다.
“이제는 평정의 조각조차 찾아볼 수 없구나.”
촤악!
어느새 비토의 칼끝이 시엔의 가슴팍 위로 그어졌다.
“마음이 불타며 동요하고, 초조해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이래서야 하이마스터는커녕 명경지수의 마스터조차 자청할 자격이 없다.”
비토가 말했다. 참으로 실망스럽다는 듯이.
“고작 그 정도의 경지로 정녕 ‘하이마스터의 서품’을 얻을 수 있다 생각했느냐?”
“…….”
“아무래도 나는 너를 죽일 수밖에 없겠구나.”
비토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네 죽음이 헛되다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째서죠?”
“네 희생을 통해, 어설프기 짝이 없는 각오로는 결코 ‘하이마스터’가 될 수 없을 거란 가르침을 가족들이 기억할 테니까.”
이것이 바로 하이마스터의 무게였다.
그렇기에 그 말을 듣고 시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웃기지?”
“평생에 걸쳐서…….”
시엔이 말을 잇는다.
“흔들림 없는 마음을 지키려 노력해 왔습니다.”
그저 담담하게.
“동요하지 않고, 일희일비하지 않고, 맑고 고요하게 멈춰 있는 물과 거울로 세상을 비추며 싸워왔죠.”
망령과 명경지수, 나락의 자세를 마스터하고 가문의 ‘그랜드마스터’가 되었던 미래를 떠올리며.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고통을 앞에 두고, 제 심장이 갈가리 찢어지는 고통에도 기꺼이 평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주가 짊어져야 할 무게였으니까.
“믿고 의지하는 가족들이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쉽게 평정을 잃지 말고 무너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렇기에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마음을 닫고 눈과 귀를 닫았습니다. 여전히 제 마음은 고독하되 고요했고, 차갑되 깨끗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문의 3식 명경지수의 자세를 펼치는 이들의 특징이다.
“그러다 깨달았죠.”
“무엇을 말이냐?”
“사랑하는 가족을 눈앞에서 잃고 빼앗겨도 흔들리지 않고 동요하는 지수(止水)의 마음 따위, 필요 없다는 것을.”
동시에 명경지수의 묘리를 눈앞에서 부정하는 시엔이 있었다.
“그럼 무엇이 필요하지?”
비토가 되물었다.
“《업화(業火)》.”
시엔이 대답했다.
이 세상 전부를 집어삼킬 불꽃.
어느덧 시엔의 마음속에서 고요하고 투명하게 일렁이는 호수가 불타기 시작했다.
그저 1식과 3식의 하이마스터를 자처하며 새로 얻은 깨달음의 형태.
어느덧 거기에 맑고 잔잔하게 일렁이는 호수 따위는 없었다.
마음이 불타고 있었다.
동시에 시엔의 손에 들린 칠흑의 ‘왕 시해자’를 따라, 핏빛의 오러가 휘감기며 흑적색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
“「명경지화(明鏡止火)의 자세」.”
화르륵!
지옥의 업화처럼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마음의 불꽃.
바로 그 불꽃을 무기 삼아 자기 육체와 칼날에 덧씌운다.
동시에 자기 몸뚱이가 불꽃에 타올라도 눈동자 하나 깜빡하지 않고 평정을 지키는 동방의 고승처럼, 업화처럼 휘몰아치는 불꽃 속에서 고요하게 침묵을 지키는 망령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