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83화 (83/200)

83화. 하이마스터 서품 (4)

시엔에게 더 이상 고요하게 일렁이는 호수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세상을 집어삼킬 듯 격렬한 불꽃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마음속의 이야기나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어느덧 시엔의 육체, 손에 쥐고 있는 ‘왕 시해자’의 검고 어두운 서슬조차 불길에 휘감겨 타올랐다.

“─.”

시엔의 존재를 불사를 기세로 타오르는 불꽃, 동시에 그 불꽃 앞에서 2대 가주 비토가 나직이 숨을 삼켰다.

이글거리는 불꽃 속에서 알기 쉬운 고통 따위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나도 평온했다.

동시에 깨달았다.

시엔을 집어삼키고 있는 불꽃 역시, 아무것도 불사르지 않고 그저 타오르고 있을 뿐임을.

“진정한 명경지수…….”

비토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린다. 직전까지 시엔 앞에서 보여준 실망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깨닫고 보니 시엔이 눈앞에 있었다.

쇄도하는 시엔이 거리를 좁힐 때까지, 비토로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움직임, 움직이려는 마음, 움직임의 전조, 그 무엇도.

촤아악!

그저 칼끝이 휘둘러지고 나서 조용히 깨달을 뿐이다.

“훌륭하구나.”

첫 밤의 아들, 나이트워커 가문의 2대 가주 비토의 망령이 말했다.

“어째서 제 공격을 막지 않은 겁니까?”

“막을 수 없었을 뿐이다.”

비토가 대답했다. 물론 아무리 지금 시엔의 경지라 해도 ‘진짜’ 비토 나이트워커가 그것을 막아내지 못할 리 없다. 그러나 눈앞의 비토는 진짜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루나의 지혜를 통해 그곳에 존재하는 불완전한 그림자일 뿐이다.

심지어 루나는 전력으로 상대를 죽이기 위해 지혜의 고리를 쓰는 것조차 아니다. 그저 시엔의 경지를 시험하기 위해 이 능력을 펼치고 있을 뿐.

“그러나 이것으로 똑똑히 기억했다.”

흘리는 피를 뒤로하고 비토가 말했다.

“─다음에 다시 볼 때는, 막을 것이라 약속하마.”

다음에 다시. 눈앞의 존재는 추억의 편린에 불과하다. 비토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에 다음이 있는 것이다.

가장 지혜로운 자의 기억 속에서 비토는 과거의 망령으로 영원히 살아갈 테니까.

지혜의 네 고리 중 제1의 고리, 추억.

하물며 비토는 결코 그랜드마스터의 전력을 발휘한 게 아니었다. 아무리 불완전한 추억에 의존하고 있다 해도 콘실리에리가 기억하는 ‘가주의 힘’은 결코 이 정도가 아니었던 까닭에.

“저 역시 다시 보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경애하는 돈 비토.”

동시에 비토의 진짜 힘을 보게 될 날 역시 결코 기약 없는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혜의 네 고리 중 제2의 고리, 【재회】─.

그곳이 바로 훗날 두 사람이 마주하게 될 재회의 장소였다. 심지어 이 순간, 시엔의 깨달음을 목격하고 똑똑히 기억하는 비토는 더더욱 강해질 것이다.

시엔의 깨달음이 추억의 형상에 지나지 않는 비토에게 깨달음을 주고, 비토 역시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더욱 강해져서 시엔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줄 것이다.

물론 강해지는 주체는 비토 자신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가문의 2대 콘실리에리 루나의 지혜일 뿐.

이것이 바로 지혜의 고리가 갖는 진짜 힘이었다.

그리고 그 지혜의 순환이야말로, 사실상 나이트워커 가문을 떠받치는 기둥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쨍그랑!

일대의 세계가 유리창처럼 깨지고 무너져 내렸다.

시엔과 루나를 속박하고 이어져 있던 사슬고리의 형태가 마력의 입자로 화하며 스러졌다.

“!”

동시에 지혜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이어서 무너진 것은 시엔 쪽이 아니었다.

“루나 님.”

침묵하고 있던 암살자들의 어머니, 당대 가주 라일라가 황급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루나 님!”

세상에 대가 없는 힘은 없다. 루나의 능력, 지혜의 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어지간한 가문의 중대사가 아니고서야 콘실리에리는 쉽게 자신의 힘을 쓰지 않는다.

“걱정, 말거라…… 시엔.”

동시에 두 모자의 부축을 받으며 루나가 쓴웃음을 짓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상처도 없다. 그저 호흡이 조금 거칠어진 정도다. 그럼에도 이 능력의 후폭풍을 모를 시엔이 아니었다.

“루나 님─.”

미리 준비해둔 회복약을 복용하며 루나가 고개를 젓는다.

“보아하니 답을 얻은 것 같구나.”

지혜의 고리를 통해 벌어진 일은 당사자 루나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곳에서 시엔이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을 보여줬는지는 루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의식의 심층에 새겨지니까.

“네가 얻은 답을 우리에게 보여주렴.”

그렇기에 다시금 그녀의 눈과 의식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사원의 차가운 석벽에 몸을 기대며 루나가 조용히 미소 짓는다. 눈동자 밑에는 희미한 물기가 젖어 있다. 모처럼 떠오른 추억의 여운에 잠기듯.

─그리고 여기까지가 루나의 역할이었다.

동시에 콘실리에리의 지혜 속에 잠겨 있던 시엔이 고개를 돌렸다.

이 순간, 시엔의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 당대 가주이자 암살자들의 어머니를 향해.

* * *

사랑하는 가족을 눈앞에서 잃고 전부를 빼앗겨도 흔들리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마음 따위, 필요 없다.

그런 마음의 호수 따위는 차라리 불타는 게 낫다.

“《호수의 암살자(Assassin of the Lake)》.”

역설적으로 그것이 바로, 자기 손으로 명경지수의 마음을 불태운 시엔에게 내려진 또 하나의 이름이었다.

성품성사를 통과했다는 증거이자, 나이트워커 가문 내 최고 전력을 상징하는 암살자의 진명.

「호수의 암살자」 시엔 나이트워커.

─1식 망령의 자세와 3식 명경지수의 자세를 구사하는 새로운 하이마스터.

나이트워커 가문의 13명째 하이마스터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 * *

누군가 하늘에 오르는 순간, 누군가는 하늘 아래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어찌하다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새벽 여신의 아들 샛별아.”

칠흑의 귀공자, 체사레 보르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조소했다.

일찍이 검을 통해 하늘로 오르고자 했던 어리석은 존재를 조소하며.

칠죄종의 1죄, 오만(Superbia)의 루시퍼.

그 이름에 걸맞은 비참한 최후가 오스카를 휘감고 있었다.

눈처럼 하얗게 빛나는 열두 장의 날개는 처절하게 꺾이고 찢어져 있다. 검 역시 부러졌고, 성스러운 휘광조차 잃어버린 채─.

찬란하게 빛나는 여명의 휘광이 눈을 감았다.

《피의 추기경》 체사레의 창에 보란 듯이 꿰뚫린 채로.

끄트머리 부분의 뾰족한 창날 촉이 존재하지 않는, 기이할 정도로 뭉툭하고 불완전한 형태의 창이었다.

그 시각.

아들의 최후에, 어머니를 자처했던 《죽음의 성모》는 곁에 없었다. 심지어 그녀에게는 일말의 애정도 흥미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아무런 관심조차 없었다.

그저 무심하게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의 뒷골목을 가로지를 뿐.

운명의 창의 지분을 6할 이상 손에 넣은, 천 년의 삶과 지혜를 가진 뱀파이어가 점지해준 다음 아이를 찾아서.

새로운 운명의 아이.

“아, 여기 있었구나.”

피투성이가 된 소년이 돌길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암살자의 단검에 전신이 난자당하고 보란 듯 길거리에 내버려져서.

그리고 아이의 길었던 운명이 다하려는 찰나, 체사레는 그녀를 이곳으로 이끌게 했다.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구나.”

숨이 끊어져 가는 소년의 앞에서 빌헬미나가 속삭였다. 마치 성모처럼 자애로운 목소리로.

“너를 위해 아주 특별하고 값진 운명을 준비해 두었단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마치 어머니처럼 상냥하고 자애로운 손길이 소년의 뺨에 닿았다.

* * *

“이야, 이제는 내가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성품성사를 마친 시엔이 돌아왔을 때, 여느 때처럼 밉상스러운 목소리가 저택에서 들려왔다.

“그럴 리가요, 미하일 형님.”

시엔이 당치도 않다는 듯 쓴웃음을 짓는다.

“그래도 부르겠다는데 말리지는 않을게요.”

7식의 마스터이자 시엔의 삼촌, 동시에 퍼펫 마스터의 별명을 가진 미하일에게.

“그 꼬맹이가 벌써 이렇게 어른이 됐을 줄이야.”

“이제는 저를 의심하지 않으시나요?”

“뭐, 원래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법 아니냐.”

미하일이 어깨를 으쓱이며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여전하구나, 미하일.”

“흠, 이것 참.”

그리고 그를 향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가문 제일의 현자, 루나 님 아니신지.”

미하일이 능청스레 예를 표했고, 후드 차림의 루나가 쓴웃음을 짓는다.

“라파엘로 제독을 습격한 예의 골렘에 흥미를 보였다고 들었다.”

“…….”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집착하고 있느냐?”

“아니, 그게 뭐 대놓고 그렇게 눈치를 줄 일이라고.”

“여전히 가족들이 너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두렵더냐?”

루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마치 어리석은 아이를 나무라듯.

“그쯤 하시죠, 루나 님.”

그 말에 비로소 미하일 역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진실을 입에 담으며.

“제가 아무리 깡통이라도 뭐가 우리의 전부고 아닌지 정도는 구별할 수 있거든요.”

베르나르트의 말마따나 인간이었던 적도 없는 주제에 인간의 형상을 흉내 내는 가짜, 호문쿨루스(Homunculus)─.

그럼에도 그는 다크 엘프 루나와 마찬가지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었다.

* * *

며칠 뒤.

“서펀트 가문에서 서신이 왔더구나.”

봉랍 위에 새겨진 거대 바다뱀의 문장을 뒤로하고 라일라가 말했다.

바다 위에서 이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 서신의 내용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올해 열아홉의 시엔, 그리고 시엔과 몇 달의 차이로 동갑이 된 열아홉 살의 레이디 마린.

두 사람의 성년이 다가옴에 따라, 그날의 약속을 이행할 때였다.

“슬슬 때가 가까워졌으니까요.”

“그래.”

시엔의 말에 집무실에 앉은 라일라가 복잡한 웃음을 짓는다. 눈부시게 밝은 대낮. 그러나 달이 뜨든 해가 뜨든, 그 풍경을 역광으로 등지고 앉은 그녀는 좀처럼 쉽게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날이 비로소, 세상 사람들 앞에서 달라진 너를 드러내는 날이 될 거란다.”

그저 나이트워커 가문과 서펀트 가문 사이의 가교(架橋)로 끝날 일이 아니다.

나이트워커 가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어둠 속에 감추지 않고, 오히려 보란 듯 자신들의 위세를 모두의 앞에서 드러낼 테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 모여들 각국의 강자들이, 새롭게 하이마스터가 된 시엔의 경지를 못 알아볼 리 없다.

가장 지혜로운 자, 루나와 함께 시엔이 손에 넣은 새로운 답을.

“동시에 네 말이 맞는지 틀린지를 증명할 자리가 되기도 하겠지.”

나이트워커 가문은 이미 세계의 적이 되었고,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그저 거짓된 평화 속에서 항복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19살 나이로 전례 없는 경지를 손에 넣은 하이마스터가 모습을 드러낼 때, 세계 역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호수의 암살자, 시엔 나이트워커의 앞에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