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전쟁의 뒤편에서 (1)
어느 순간, 어느 때에도 대륙의 어디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샤를마뉴 왕국과 칠왕국 연방 사이의 최대 격전지. 칠왕국 입장에서는 대륙 진출의 숙원이 걸린 땅, 브르타뉴 공작령도 그중 하나였다.
그 땅에서 전쟁을 치르는 1,000명 중 999명은 아마도 왜 벌어졌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할 복잡하기 짝이 없는 명분과 별개로─ 마치 그것이 평생의 소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 나라의 군대와 강자들이 격돌하고 있었다.
샤를마뉴 왕국의 12기사 「창백한 백합」 테레지아 경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가 속한 기사 조직과 함께 최강자 논쟁이 끊이질 않는 또 하나의 기사 조직, 원탁의 기사단과 그 기사단을 거느리는 ‘당대 제일의 강자’ 중 하나와 맞서.
원탁왕 아서.
“왕의 앞에 서지 마라, 계집.”
동시에 왕의 손에 들린 이 세계 최강의 명검, 엑스칼리버의 칼끝이 빛났다.
쿠웅!
칼날이 맞부딪친다. 그러나 알기 쉬운 쇳소리 따위는 울려 퍼지지 않았다.
마치 바위로 나뭇가지를 내리치는 듯한, 말 그대로 터무니없을 정도의 일방적 폭력.
‘비기─.’
제비반전술.
순간, 테레지아 경이 제비반전술을 통해 흡혈귀와 인간의 힘을 끌어내며 왕의 일검을 튕겨냈다.
튕겨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샤를마뉴의 12기사 사이에서도 롤랑에 이어 손가락에 꼽히는 그녀조차도.
그리고 그것은 그녀와 검성 롤랑 사이의 격차이기도 했다.
샤를마뉴의 수장과 2위, 그 사이에는 고작 손가락 하나의 차이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것이 바로 이 세계의 정점을 다투는 강자들 사이에서 ‘손가락 하나’가 갖는 무게였다.
“……거슬린다.”
튕겨 나갔다고 생각한 엑스칼리버를 어느새 힘으로 고쳐 잡으며 아서왕이 말했다.
콰직!
또 하나의 손에 들린 물푸레나무 창 ‘롱고미아니드’를 바닥에 꽂고, 곰처럼 커다란 두 손으로 엑스칼리버의 칼자루를 고쳐 잡으며.
“「왕의 자세(King Stance)」.”
샤를마뉴 왕국의 검성 롤랑, 제국의 검마 오스왈드, 공화국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에 이어 대륙의 최강자 중 하나로 손꼽히는 남자가 읊조린다.
“!”
그저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공기가 일전하는 듯한 압박감.
그 상태에서 아서왕의 검이 휘둘러지려는 찰나였다.
“낫 엘레강트─.”
“…….”
“아무리 자세가 강하다 해도 ‘우아함’ 없이는 빛나지 않는 법.”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왕의 자세를 마주하고 있던 테레지아 경이 담담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왕의 자세 앞에 일방적으로 압도당하고 있던 의식의 평정을 되찾으며.
“늦었습니다, 아스톨포 경.”
“내 멋짐을 칭송하는 기사도 문학을 읽느라 늦었지.”
“…….”
당장 칼자루로 머리를 쥐어박아 주고 싶은 충동을 애서 억누르며 테레지아 경이 침묵했다.
대륙의 누구와도 감히 비교를 거부하는 절세 미남이자, 살아 있는 남성 중 최고로 잘생겼다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샤를마뉴 12기사의 3석─.
「꽃의 기사」 아스톨포 경.
* * *
어느 순간, 어느 때에도 대륙의 어디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설령 이 전쟁의 당사자도 아니며, 말 그대로 남의 일이어야 할 두 나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제국과 공화국.
샤를마뉴와 칠왕국의 최대 전력이 충돌하는 이곳 브르타뉴 공작령에서, 그들 역시 저마다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순교자의 자세.”
나이트워커 가문이 맞서 싸워야 할 그림자 속, 제국 국교회의 최고 전력 중 하나가 읊조렸다.
“상품의 제2품, 지천사(智天使) 가브리엘 강림.”
치천사를 비롯해 3, 2, 1품의 최고위 천사들을 일컬어 상품천사.
상품천사를 강림시킬 수 있는 것은 ‘사도’라 불리는 극소수의 이들뿐.
동시에 그들 제국이 말하는 극소수는 결코 공화국의 기준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과거에는 상대하는 것조차 꺼려졌던 강적에 맞서 《호수의 암살자》가 검을 고쳐 잡았다.
시엔을 상징하는 왕 시해자가 아니라, 평소 무기와 장비를 감춘 채 나설 수밖에 없는 흑색 임무.
침묵의 계율(오메르타)을 수행하는 얼굴 없는 암살자로서.
공화국은 샤를마뉴 왕국과 칠왕국 양쪽에 거액의 전쟁 자금을 빌려주고,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길 바란다.
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국가 모두 전쟁 자체가 끝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이 지점이 바로 서로의 이해와 디테일이 충돌하는 지점이었다.
공화국은 이 전투에서 칠왕국 연방이 패배하길 바란다.
그래야 올해 역시 대륙 진출에 실패하고, 다음 해에 똑같이 함대와 전쟁 자금을 대출받아 전쟁을 수행할 테니까.
제국은 그들의 이웃 나라, 샤를마뉴 왕국이 패배하길 바란다.
당장 덩치 커다란 이웃 나라가 영토를 빼앗겨 즉각적 타격을 입고, 마찬가지로 공화국의 ‘투자’가 실패로 돌아가 거액의 손해를 입길 바라니까.
각자의 이익을 위해 최적의 형태로 전쟁의 디테일을 설계하고 방해되는 자를 제거하는 것.
그게 이 자리에 있는 두 강자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눈앞의 사업 경쟁자를 제거해둘 필요가 있었다.
밤을 걷는 자와 제국 공안, 바로 이 자리에 마주하고 있는 서로를.
상품의 2품, 지천사 가브리엘.
예지와 계시의 천사라 일컬어지는 물병자리의 천사. 대표하는 상징은 달과 물.
거기에 알기 쉬운 금빛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달빛처럼 스산한 빛을 흩뿌리는 날개와 실루엣이 있을 뿐.
“나, 하느님의 시종 가브리엘. 슬픈 소식을 전하라는 분부를 받들고 네게 와 일러주나니.”
바로 그 달빛의 천사가, 구슬픈 목소리로 흐느끼듯 말을 잇는다.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시엔 나이트워커.”
마치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예지를 속삭이듯이.
후우웅!
직후 시엔의 품속에 숨겨둔 운명의 창이, 느닷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을…….’
흑색 임무를 통해 정체를 숨겼을 터다. 달리 정체를 드러낼 무엇을 말해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예지와 계시의 천사라 일컬어지는 눈앞의 저 존재는 정확히 시엔의 이름을 입에 담고 있었다.
놀랄 것은 없다. 그게 저들의 힘이니까.
동시에 저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알기 쉬운 형태의 성스러운 존재가 아니란 사실도.
미카엘, 라파엘, 가브리엘, 루시퍼, 바알제붑, 릴리스, 아스모데우스, 교회가 말하는 헤아릴 수 없는 온갖 신격(神格)의 존재를 두 눈으로 목격하고 무릎 꿇린 시엔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는 신도 천사도 악마도 없다.
그러나 비슷해 보이는 존재는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신앙이나 믿음과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로 광신하고 무릎을 조아리며 고개를 처박는다.
그들이 정작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위는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고.
바로 눈앞의 저 존재처럼.
헛웃음과 함께 시엔이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예지의 지천사, 가브리엘.’
과거 중품의 6품으로 강림한 천사가 찬미의 아리아를 통해 시엔의 고막을 찢고 정신 공격을 가했듯이, 각각의 천사는 자신을 상징하는 고유의 ‘목소리(아리아)’를 갖는다.
신의 뜻과 의지를 대행하는 성스럽고 강력한 힘을 품은 천사의 목소리.
“은빛으로 된 세 발의 화살이 날아와서 너를 꿰뚫을지니, 하나의 커다란 슬픔이 될 것이다.”
지천사 가브리엘을 상징하는 목소리─ 「예지의 아리아」가 울려 퍼졌다.
타앙!
마치 공성용 대형 발리스타를 사출하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시엔이 의식하지 못하는 등 뒤의 사각에서 은빛의 화살 하나가 내리꽂혔다.
제1의 화살.
타앗!
동시에 시엔의 몸이 당나귀처럼 그 자리에 고꾸라져 추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 기술을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흙바닥 위를 당나귀처럼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는 동시에 화살이 빗나갔다.
‘하나 피했다.’
자세를 마저 추스를 틈도 없이 재차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너에게 가로되, 「다음 화살을 맞을지어다.」”
타앙!
이어지는 예지의 아리아와 함께, 재차 공성용 발리스타를 쏘는 듯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마력도 오러도 심지어 마나조차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기 쉬운 물리적 공격조차 아니었다.
이 세계의 법칙을 자유자재로 뒤틀고 왜곡하며 자신의 입맛대로 덧씌우는 초월자들.
“《영야》.”
그러나 이 세상의 법칙을 뒤틀 수 있는 것은 눈앞의 존재뿐이 아니다.
사각에서 날아와 시엔을 꿰뚫어야 할 은빛 화살이, 마치 시곗바늘을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아슬아슬하게 시엔의 등을 찢고 척추를 꿰뚫기 일보 직전에.
일대에 덧씌운 영원의 밤에 삼켜져, 허공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뭐, 언젠가 맞겠지.’
정지해버린 화살을 뒤로하고 시엔이 고개를 들었다.
2발째의 화살이 예지와 함께 함께 빗나갔다.
시엔의 발밑과 등 뒤로 펼쳐진 끝없는 밤을 보며 천사가 최후의 예지를 읊조렸다.
“내가 너에게 마지막으로 가로되, 「너는 이 화살을 결코 멈추지도 피하지도 막지도 도망치지도 못할 운명이라 하였다.」”
“그거야 내가 결정할 일이지.”
섀도우 페이스로 얼굴을 감춘 시엔이 차갑게 조소했다.
‘뇌안(雷眼)─.’
시엔의 눈이 초점을 잃고 청백색의 스파크를 내뿜었다.
마력을 통해 신경계의 전기신호를 극도로 가속하고 감각을 극대화하는 강화 마법. 그와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인간찬가의 의지가 전신을 내달렸다.
‘저 화살’은 결코 이 세계의 것이 아니다. 저 화살은 마력도 오러도 아니고 하물며 전기적 작용 같은 이 세계의 법칙으로도 해독할 수 없다.
그러나 시엔이 읽으려는 것은 화살 자체가 아니다.
천사의 화살이 억지로 이 세계를 비집고 들어오며 법칙을 뒤틀 때, 뒤틀림 그 자체를 읽으려는 것이다.
보지 않아도 볼 수 있다. 동시에 저 이치마저 뛰어넘는 속도의 화살을, 마찬가지로 이치를 뛰어넘는 육체로 회피했다.
뇌안과 제비반전술을 통해 끌어낼 수 있는 시엔의 속도는 전성기의 7할.
이치를 뛰어넘기에는 그조차 지나치게 빨랐으니까.
시엔의 몸 그 자체가 뇌전(雷電)이 된 것처럼 내달렸다.
‘멈추지도 피하지도, 막지도 도망칠 수도 없는 화살.’
동시에 천사의 예지를 떠올렸다. 그 말대로 이렇게 도망쳐서 끝날 게 아니다.
무엇보다 뇌전과 제비반전술을 함께 유지하는 것은 지금조차 길어야 10초, 그 후에는 사실상 전투 불능에 가까운 탈진이 된다.
‘그래, 맞을 수밖에 없겠지.’
그 와중에도 시곗바늘의 초침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 마찬가지로 시엔 역시 내달렸다.
‘그럼 네가 대신 맞아라.’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자신을 따라오는 필중(必中)의 화살을 곡예처럼 유도하며, 자기 대신 달빛에 휩싸여 있는 천사를 향해 격추시켰다.
마지막 세 발과 최후의 예지가 빗나갔다.
“■■■■■■─!”
그와 동시에 이 세상의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절규가 울려 퍼진다.
후우웅!
터무니없을 정도의 충격파가 놈에게 일점으로 응축되었다가 사방을 향해 퍼져나가며.
“허억, 헉……!”
어느덧 그곳에 경배해야 할 천사의 형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십시오…….”
그저 신에게 기도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 있었다.
“저자는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릅니다…….”
시엔이 말없이 그곳에 있는 인간을 내려다보았다. 내려다보고 나서는, 쓰러진 그의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세상에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까닭에.
촤아악!
손에 들린 단검으로 목젖을 내리그었다. 피가 튀었다. 부르르 떨던 사도의 몸이 어느새 얼어붙을 것 같은 침묵에 휩싸였다.
“역시 이곳에 있었나, 시엔 나이트워커.”
“─.”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직후의 일이었다. 시엔이 말없이 고개를 돌린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긍지 높은 기사, 검성 롤랑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