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85화 (85/200)

85화. 전쟁의 뒤편에서 (2)

“롤랑 경께서 이곳에는 어쩐 일이신지.”

시엔이 놀라지도 않고 되물었다.

지금쯤 바로 곁에서는 칠왕국과 샤를마뉴 왕국의 최대 전력, 원탁의 기사단과 샤를마뉴의 12기사가 격돌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12기사의 수장, 롤랑이 없다는 것은 시엔에게도 썩 달가운 일이 아니다.

공화국 입장에서 샤를마뉴 왕국은 이 전투를 이겨줄 필요가 있으니까.

“올해 4월, 자식이 없는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급사하고 후계 문제가 불거졌지.”

롤랑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검성의 이름을 얻기 전, 그를 「하얀 달의 기사」라 칭송받게 해준 순백의 미스릴 검과 갑주를 빛내며.

“공작 각하의 죽음은 참으로 불행한 사고였지요.”

“그의 죽음이 정말 사고라고 생각하나?”

“달리 짚이시는 점이라도 있으신지.”

“…….”

롤랑의 되물음이 시엔이 시치미를 뗐다.

“공작이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은 틈을 타 칠왕국 측에서는 죽은 브르타뉴 공작의 이복동생을 ‘정당한 후계자’로 내세우고, 칠왕국의 지원 아래 무력으로 공작령 수도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샤를마뉴 왕국 역시 자기네 영토가 뺏기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볼 리가 없었다. 그들 역시 똑같이 공작의 조카를 ‘정당한 후계자’로 내세워 전쟁을 재개했다.

애초에 브르타뉴 공작이 죽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을 전쟁이었다. 그런데 죽어버렸다.

정말 운이 나쁘게도.

“브르타뉴 공작을 암살해 칠왕국에게는 ‘대륙 진출의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막상 그렇게 시작된 전투에서는 칠왕국이 패배하길 바라다니.”

롤랑이 시엔을 향해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참으로 비열하고 지독하기 이를 데 없는 방식이다.”

눈앞의 악(惡)을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정의로운 기사처럼, 감출 수 없는 살의를 담아.

“저는 당신의 적이 아니랍니다, 롤랑 경.”

그리고 대륙 제일의 강자가 겨눈 검 앞에서 시엔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가문은 샤를마뉴 왕국의 승리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호천사죠.”

“수호천사라.”

그 어처구니없는 농담에 롤랑이 차갑게 조소했다.

“그 증거로 저는 당신들의 패배를 위해 암약하는 ‘제국의 쥐새끼’를 쓰러뜨렸지요.”

이곳 브르타뉴 공작령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투에서, 샤를마뉴 왕국이 패배하길 바라는 또 하나의 사업 경쟁자.

“그것도 상품의 2품을 강림시키는 사도를 상대로 말입니다. 오히려 제 무공(武功)은 귀국의 훈장을 받아도 모자랄 일이 아닐지.”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그러는 ‘검의 성자’께서는 보기보다 입이 험하시네요.”

시엔의 비아냥에 롤랑 경이 침묵했다.

침묵 끝에 은빛 섬광이 쇄도했다.

카앙!

“─.”

마치 자로 잰 것처럼 일말의 오차도 없는, 머리의 위에서 아래를 향해 내리꽂히는 90도의 수직 베기.

샤를마뉴 12기사의 수장이나 대륙 최강의 강자 중 하나가 펼치는 일격.

「순수의 자세」.

샤를마뉴 왕국의 어린아이가 기사 수업을 시작할 때 처음 배우는 교육용 검식이자, 오직 베기 찌르기 막기의 3요소로 이루어진 기본 중의 기본.

기교도 무엇도 없다. 그저 철저하게 기본기를 갈고닦은 검. 일말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순수의 검이 휘둘러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90도의 수직을 내리그으며.

“……!”

일말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세로(Vertical)─.

마치 숭고하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 앞에서 경외하고 감동을 표하듯, 롤랑의 세로 베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느긋하게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 시대의 최강자 중 하나가 펼치는 검의 자세.

설령 그게 그가 펼칠 수 있는 100%의 전력이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시엔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전력을 끌어내게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족했으니까.

그 일격에 깃든 의도를 헤아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내 경지를 가늠해볼 생각이겠지.’

롤랑이 시엔을 엿볼 때, 마찬가지로 시엔이 자신을 엿볼 거란 가능성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앗!

시엔이 거리를 벌린다. 벌렸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어느덧 롤랑 경이 거리를 좁히며 검을 휘둘렀다.

가로 베기.

그저 수수하게 횡으로 휘둘러지는 베기다. 그런데 그 베기를 맞받아친 순간, 마치 태산에 짓눌리는 것 같은 압박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그 압박감은 결코 힘이나 폭력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정교함이다.

너무나도 정교해서 일말의 오차조차 없는 일격.

지금의 시엔조차 감히 ‘틈’을 노리고 비껴내거나 흐트러뜨릴 수 없는 무결검(無缺劍).

‘여기서는 명경지화를…….’

명경지수의 자세를 통해 펼칠 수 있는 시엔 고유의 오의.

역설적으로 이 불꽃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가문의 3식, 명경지수의 자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니, 아니다.’

아직 아니었다. 지금 당장 그 밑천을 눈앞의 강자 앞에서 드러낼 수는 없다. 무슨 수가 있어도 아껴야 했다. 카드 패는 많이 숨길수록 좋은 법이니까.

그리고 시엔이 가진 비장의 기술은 결코 명경지화 하나가 다가 아니었다.

“!”

검성 롤랑의 검이 멈춘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그걸로 충분하다.”

검을 거둔 롤랑 경이, 칼집에 그의 기사 검을 꽂으며 말했다.

“이미 충분히 보았으니.”

“─.”

9살 시절. 라일라가 시엔이 스틸레토를 손에 쥐자마자 거기에 숨겨진 경지를 헤아렸듯, 눈앞의 강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검을 거둔 롤랑이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린다.

“언제까지고 이 세계가, 네놈들의 손바닥 위에서 꼭두각시처럼 놀아나리라 착각하지 마라.”

등을 돌린 롤랑 경이 싸늘하게 읊조렸다.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 * *

왕의 검이 휘둘러졌다.

쿠웅!

「왕의 자세」.

아니, 그것을 자세라고 불러야 할지, 애초에 검술이라 불러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기술도 기교도 그 무엇도 없다.

그저 폭력과 파괴가 있었다.

“힘이 전부다.”

마치 왕의 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산산이 짓밟고 부숴버리겠다는 듯, 그저 나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것을 가능케 할 힘이 있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휘몰아치는 검풍(劍風)이 대지를 찢고, 가로막는 병사들을 찢고, 일대의 세계를 파쇄하며 끝없이 퍼져나가고 있다.

‘이것이 원탁왕 아서……!’

지성도 예의도 교양도 없이, 그저 막무가내로 휘둘러지는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공세.

패왕의 검.

압도적이란 말 외에 달리 형용할 수 없는 궁극의 폭력.

그 앞에서는 샤를마뉴 왕국에서 손꼽는 최강의 기사들조차 가까스로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호각조차 아니다. 눈에 띌 정도의 일방적 수세였다.

그것이 눈앞에 있는 왕의 무게이자 당대의 ‘최강자’라 일컬어지는 괴물의 무게다.

바로 그때였다.

“수고했다.”

일방적으로 휘몰아치는 폭력 속에서 은빛 섬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말의 오차도 없이 휘둘러지는 순수와 무결의 검과 함께, 휘몰아치는 폭력을 맞받아치며.

“…….”

검마 오스왈드,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눈앞의 괴물 원탁왕 아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 시대 제일의 강자 중 하나, 검성의 별호를 가진 기사가 그곳에 있었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나이트워커 공작 저택.

“샤를마뉴 왕국은 무사히 그들이 지지하는 ‘정당한 후계자’를 새로운 브르타뉴 공작으로 옹립시켰습니다.”

하나의 전쟁이 무사히 끝을 맺었고, 그 전투는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의 바람대로 칠왕국의 패배였다.

“이로써 브르타뉴 공작령은 여전히 샤를마뉴 왕국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칠왕국 역시 퇴각 과정에서 적잖은 약탈 전리품을 챙겨 나름의 이득을 얻었지요.”

“잘 해주었단다, 시엔.”

라일라의 말에 시엔이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장 비밀스럽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핵심 전력, 하이마스터의 일원이 되어서.

“듣기로 제국 국교회의 사도급 전력과 직접 충돌이 있었다지.”

“예.”

“그것과 싸운 감상이 어땠니?”

라일라가 물었다.

“글쎄요.”

시엔이 어깨를 으쓱였다.

“죽어야 할 적을 눈앞에 두고 일일이 감상에 젖지는 않아서요.”

“참으로 너답구나.”

시엔의 대답에 라일라가 조용히 미소 짓는다. 아들의 성장에 흐뭇함을 감추지 못하는 어머니처럼.

“결혼을 축하한단다, 시엔.”

동시에 훌쩍 커버린 자식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어머니처럼 씁쓸한 목소리로.

“달라질 게 있나요?”

시엔이 담담하게 되물었다.

“저에게는 가족이 전부예요.”

“그리 말해주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레이디 마린과의 혼약도 서펀트 가문도, 모두 가족을 위해 쓰고 이용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전부란 걸 잊지 말아 주렴.”

라일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평소의 그녀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도.”

동시에 섬뜩하고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를 담아서.

* * *

시엔과 마린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초청장이 대륙 각지로 퍼져나가는 사이.

“어서 오게나.”

머리카락이 발밑까지 흘러내린 흑색 장발에 모노클을 쓴 남자, 베르나르트 후작이 시엔을 맞이했다.

처음 왔을 때와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그의 영지, 이제는 하나의 작은 마탑을 자청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진보된 성채에서.

심지어 이 영지에서 마도의 탐구에 힘쓰는 것은 베르나르트 혼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베르나르트 앞에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일방적 위계도 아니다.

“경애하는 돈 시엔, 밤을 걷는 분을 뵙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후원을 받는, 일찍이 마법의 왕국에서 추방된 은자(隱者)들이 시엔의 앞에서 예를 표했다.

“베르나르트 후작 각하,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라네.”

「숨겨진 마법사들의 낙원」.

나이트워커 가문의 아낌없는 재정적 후원과 자유로운 학구적 분위기 속에서 탐구할 수 있는 그곳을, 바깥의 사람들이 부르는 이명이었다.

으레 그렇듯 나이트워커 가문에 대해 과장된 신화나 허풍이 어우러진 이야기.

“낙원이라, 아주 틀린 말도 아니겠지.”

동시에 그들 처지에서 낙원이란 것은 아주 터무니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자네들 공화국이 추구하는 평등과 자유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이곳에 오기 전에는 결코 깨닫지 못했을 거라네. 실로 내가 추구했던 이상의 배움터지.”

평등과 자유. 그 말에 시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굳이 그의 착각을 정정하지는 않는다.

“마음에 드시니 다행이네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러나 나이트워커 가문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대가는, 바르무어 가문과 에인션트 리그가 요구하는 대가 앞에서는 그야말로 공짜나 다름없었다.

“듣기로 암흑 물질 조작 학파의 새 위계 마법에 ‘진척’을 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네. 가감 없이 나를 도와주고 지적하는 동료들의 지혜가 있기에 가능했지.”

“뭐, 그게 우리 공화국의 방식이니까요.”

“그 외에도 공작 각하께서 고용해준 전투 마법사를 통해 실전 개량을 거듭하는 중이라네.”

“무척 순조로운 듯하네요.”

“결과적으로는, 말이지.”

그리고 그 결과를 내기 위해 이 골방에 틀어박혀 밤낮을 지새운 베르나르트의 광기에 가까운 학구열을 모를 시엔이 아니다.

“그럼 혹시 제가 그 마법을 좀 구경해봐도 될까요?”

동시에 그가 지평을 열게 될 새 마법을 모를 시엔이 아니었다.

훗날 이 대륙의 질서를 깨트린 것은 정작 이 시대의 최강자나 시엔도, 심지어 제국의 그림자 속에 숨어 기생하는 ‘그 남자’조차 아니다.

바로 눈앞의 흑마법사이자 그가 개발하게 될 하나의 마법이었다.

「초위계 광역섬멸형 흑마법 · 아바돈(阿鼻沌)」.

그저 성능의 뛰어남을 초월해 마법 자체로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명 결전마법의 창시자.

그것이 바로 ‘검은 달의 베르나르트’란 남자였으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