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86화 (86/200)

86화. 전쟁의 뒤편에서 (3)

이 시대의 마법사들이 마법을 탐구하는 데는 거창한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플라스크 속의 세계」.

그저 이 작은 실험용 유리병 속에 실제 환경을 축소하고, 이 작은 세계에 마찬가지로 축소된 자신의 마법을 펼칠 뿐이다.

베르나르트의 손끝에서 휘몰아치는 마력의 결정이 유리병 입구를 통해 흘러 들어갔다.

검게 빛나는 칠흑의 구체 하나.

그리고 그 구체를 향해, 플라스크 속 세계가 뒤틀리며 끌어당겨지기 시작했다.

‘…….’

세계를 집어삼키는 칠흑의 구체.

지금 당장이야 플라스크 속에서 벌어지는 시연(試演)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마법이 완성되어 진짜 세계에서 펼쳐졌을 때, 시엔은 그 풍경을 똑똑히 떠올릴 수 있었다.

쨍그랑!

바로 그때, 일대의 세계를 흡수하고 빨아들이는 것도 모자라 플라스크가 깨지며 부서진 유리 조각이 칠흑의 구체 속으로 삼켜졌다.

어느덧 모래알 하나 크기였던 ‘검은 별’이 일대를 집어삼키며 달걀 정도의 크기로 확대되고, 그것도 모자라 플라스크 밖의 세계마저 모조리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

그제야 베르나르트의 손끝에서 휘몰아치는 마력이 끝없이 팽창하는 ‘검은 별’을 제지했고, 그와 동시에 달걀 크기로 팽창하던 검은 별이 다시 일점으로 응축되며 소멸했다.

직전까지 있었던 것이 갑자기 사라진 듯한 착각.

“옷을 여미게나.”

“네?”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베르나르트가 속삭였다.

“바람이 좀 불 테니.”

“?!”

쿠웅!

폭발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두 사람이 있던 실내에 광풍(狂風)이 휘몰아친 것은 직후의 일이었다.

일점으로 응축됐다고 생각했던 ‘별’이 다시금 폭발을 일으키며 내뿜는 충격파였다. 마치 지금까지 집어삼켰던 모든 것을 충격력으로 바꿔 토해내듯이.

‘고작 플라스크 하나를 집어삼키고 이 정도 폭발력이라.’

형용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며 시엔이 침묵했다.

“이게 바로 암흑물질을 통해 생성한 ‘별’이라네.”

“별?”

“물론 흔히 아는 것처럼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은 아니지.”

“그럼 뭐죠?”

“죽음의 별.”

베르나르트가 담담히 말을 잇는다.

“엄밀히 말해서 이 상태는, 별의 붕괴와 함께 극도의 수축 상태에서 생성된 ‘별의 시체’라네. 그리고 주위의 질량을 흡수하며 계속해서 성장하지. 설령 그것이 살아 있는 별이라도 개의치 않고 잡아먹는다네.”

“꼭 언데드 같네요.”

“뭐, 틀린 말도 아니지.”

시엔의 말에 베르나르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도 동물도 아니고, 저 우주의 별을 대상으로 펼치는 사령술이라니.

“뭐, 보다시피 플라스크 속의 세계조차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지금 상황이고.”

“꼭 이 마법을 실제로 쓸 것처럼 말씀하는군요.”

시엔이 태평하게 되물었고, 일순 베르나르트의 표정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쓰는 것은 내가 아니라네.”

그림자를 뒤로하고 베르나르트가 말했다.

“설령 이 마법이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완성되었을 때, 자네들이 쓰는 것이지.”

“책임을 회피하시는 겁니까?”

“내가 무슨 책임을 회피하지?”

베르나르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될 것이다.”

창백하게 빛나는 모노클 밑으로, 일찍이 그가 보여준 죽음의 별처럼 검고 어두운 눈동자를 하고.

“내가 생각했고, 내가 개발했으며, 내 손끝에서 창조되고 완성될 마법이지. 이 진실의 어느 부분이 내가 책임을 회피하는 것처럼 느껴지나?”

시엔이 말없이 숨을 삼켰다.

“이 마법을 통해 집어삼켜질 도시와 성, 무고하게 희생될 생명, 부서지게 될 세계, 모두 내 책임이라네.”

“그걸 알고도 이 마법을 개발하는 이유가 뭡니까?”

“자네는 예술가가 작품을 창작하는 이유를 아나?”

베르나르트가 되물었다.

“거장 마젤란이 시스티나 대성당에 비통의 성모상(피에타)을 조각하고, 마찬가지로 그대들 가문에 죽음의 청기사…… 묵시록의 기마상을 조각하는 이유 말일세.”

“글쎄요, 예술가가 아니라 잘 모르겠네요.”

“그럼 나 역시 이해할 수 없을 걸세.”

베르나르트가 담담히 말을 잇는다.

“이 작품은 나의 걸작이라네.”

베르나르트가 뒤틀린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작품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광기에 찬 예술가처럼.

“그리고 완성된 걸작을 어디에 전시하고 어떻게 쓰든, 그것은 이 작품을 후원해준 자네들 가문의 몫이지.”

등줄기를 훑는 소름을 뒤로하고 시엔이 미소 짓는다.

“작품이 완성될 날이 무척 기대되네요.”

* * *

그날 밤.

“칠왕국의 원탁왕 아서와 요정왕 멀린이 초청장에 화답을 했더구나.”

“…….”

“샤를마뉴 왕국 측에서는 제1왕녀 로젤리아 샤를과 테레지아 경, 아스톨포 경, 그리고 검성 롤랑이 참여할 예정이고.”

시엔과 마린의 결혼을 두고 대륙 각지에 돌린 그들 가문의 초청장.

“끝으로 제국 측에서 검마 오스왈드,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그리고 《피의 추기경》 체사레 보르자가 화답했지.”

대륙 제일의 강자가 모이고, 그들에 버금가는 괴물과 실력자들 역시 모일 거란 뜻이다.

“설마 원탁왕이 직접 행차할 줄이야.”

나머지야 그렇다 쳐도 설마 칠왕국의 엉덩이 무거운 그 남자가, 정복 이외의 일로 공화국을 찾다니.

“……순순히 축하나 해주려고 왔을 리는 없겠죠.”

“브르타뉴 공작령의 일을 마음에 담아둔 거겠지.”

대륙 제일의 강자와 괴물들이 모이는 회합. 그것은 마냥 축하해야 할 시엔과 마린, 두 사람의 결혼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이 자리는 어디까지나 시엔과 마린의 결혼식이다.

그들 가문의 명예와 신뢰를 실추시키는 일 따위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쉽지 않은 자리가 되겠구나.”

“축제와 전쟁을 동시에 준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시엔이 말했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수도 베네토 외곽의 모래사장.

“시엔.”

귀에 익은 목소리에 시엔이 고개를 돌렸다.

잔잔하게 휘몰아치는 파도 소리를 등지고.

“마린.”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바닷가의 커다란 암초 끄트머리에 은빛의 꼬리지느러미를 걸친 채, 지상에서는 좀처럼 보여줄 수 없는 자신감을 숨기지 않고.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서 보란 듯 상체를 드러내고 있음에도 뺨 하나 붉히는 일 없이.

“가문 원로회가 나이트워커 가문 측의 제의를 수용하기로 했어.”

“다행이네.”

“뭐, 우리야 딱히 마다할 것은 없지. 그런데 굳이 그럴 이유가 있던 거야?”

“우리의 결혼식에 아서왕과 롤랑 경, 검마 오스왈드를 비롯해 대륙 제일의 강자들이 모일 거야.”

시엔이 말했다. 그 명성을 모를 리 없는 마린 역시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아무리 우리 가문이라 해도 혼자서 그들 모두를 감당할 수는 없어.”

“그래서 서펀트 가문의 힘을 빌리려는 거구나.”

레이디 마린이 담담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도 ‘우리의 영역’에서─.”

“같은 배를 탔으니까 말이지.”

시엔의 말에 마린이 웃음을 터뜨린다.

첨벙!

어느덧 바닷가의 암초 위에 걸터앉아 있던 마린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미끄러지듯 시엔이 있는 모래사장을 향해 걸어 나왔다.

희고 가느다란 인간의 두 다리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설마 우리가 결혼식을 치르게 될 줄이야, 아직도 믿어지지 않네.”

“내가 할 말이다.”

시엔의 말에 마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설령 부부가 되어도 마린이 나이트워커 가문의 영지에서 시집살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게 그들의 약속이자 거래였으니까.

“얼마 전에, 사라센 함대와의 대규모 해전에서 처음으로 지휘관 역할을 맡았어.”

“어땠어?”

“모두 말이 없게 해줬지.”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레이디 마린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시엔 역시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서 풍기는 분위기나 기운, 이 순간의 시엔이 하루가 멀다고 성장하고 강해지는 것처럼─ 그것은 훗날 바다의 여왕을 꿈꾸는 그녀 역시도 예외가 아님을.

“고마워, 시엔.”

출렁이는 밤바다의 어둠 속에서 마린이 입을 열었다. 알기 쉬운 수줍음도 무엇도 없이, 그저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고맙다니, 뭐가?”

“내게 자유를 줘서.”

마린이 말했다.

“그리고 나를 믿어줘서.”

“…….”

마린의 말에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까닭에.

“언젠가 대가를 치러야 할 날이 올 거야.”

그렇기에 차가운 목소리로 시엔이 말했다.

“알고 있어.”

마린 역시 특별히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에게는 가족이 전부고, 그 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

“분명 나 역시 그렇겠지.”

이어지는 말에 시엔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이렇게까지 헌신할 정도로, 네가 좋은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알아.”

“그런데 뭘 고마워하는 거야?”

시엔이 짐짓 차갑게 되물었다. 부서지는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아스라했다.

“우리 오빠, 라파엘로 제독은 좋은 사람이야.”

마린이 차가운 조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날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나를 생각해주지. 그런데 그 좋은 오빠는, 정작 내가 왕가의 여자가 되어 호의호식하며 사는 게 ‘날 위한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어.”

바라지 않는 상냥함처럼 끔찍한 것도 없는 법이다.

“너는 아니지. 철저하게 자기 이득을 위해서, 내가 아니라 자신과 가문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렸어. 나도 그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그런데─.”

말하고 나서 마린이 물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인간의 두 다리가, 어느새 달빛처럼 빛나는 은색의 꼬리지느러미가 되어 물속으로 미끄러진다.

“봐, 나는 이렇게 자유롭고 행복해.”

“라파엘로 제독이 많이 섭섭해하겠네.”

시엔의 말에 마린이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때였다.

저 너머의 밤바다 속에서, 마치 용오름이 일어나는 것처럼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저 아이도 그렇고 말이야.”

저것은 용오름 같은 게 아니었다. 용 그 자체였다.

오로지 서펀트 가문의 인간들밖에 사역할 수 없는 고대 수룡종(水龍種)이자, 세계 뱀의 별명을 가진 초대형 바다뱀.

“……못 본 사이에 쑥쑥 자랐네.”

“한창 많이 먹고 자랄 나이니까 말이지.”

마린의 말에 시엔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저것이 뭘 먹는지 차마 물어볼 용기는 내지 못하고.

* * *

그로부터 얼마 후, 결혼식이란 명분 아래 저마다의 목적과 속셈을 갖고 대륙 각지의 이들이 공화국을 향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알기 쉬운 공화국 수도 베네토의 풍경이 아니었다.

바다 위였다.

물의 궁전.

그저 물 가까이 지어진 궁전이란 의미나 비유 같은 게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바다 위에 ‘물과 얼음으로’ 쌓아 올린 호화로운 궁전이었다.

에인션트 리그의 제2마탑, 원소 학파의 최고 위계 마법사들이 모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바다 위의 기적.

그리고 물과 얼음으로 쌓아 올린 궁전 위에, 공화국의 사치를 증명하는 황금과 보석, 값비싼 예술품, 카펫 등 온갖 사치스러운 장식들이 깔리며 최후의 방점을 찍는다.

《수정성 나디아(Nadia)》.

바로 그 성에서 세상에서 가장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예식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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