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결혼식 (1)
이 세계의 귀족들에게 있어 결혼은 동화에서 말하는 알기 쉬운 사랑의 결실 따위가 아니다.
사랑이니 마음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가문의 이익이 전부다. 가문에 이익이 되고 국가에 이익이 되고, 내지는 다툼을 중재하고 평화와 협상의 카드로 쓰이는 것이 바로 ‘결혼’이란 행위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 삶의 평생을 함께할 반려(伴侶)조차 자기 의지로 고를 수 없다.
“어머나, 이 보석들 좀 봐요!”
평소 마린을 절친하게 따르는 가문의 시녀가 대기실에 가득 들어찬 예물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나이트워커 가문 측에서 결혼에 앞서 미리 신부에게 보내준 한 쌍의 귀걸이였다.
대륙 제일의 귀금속 공예 명장이 프린세스 커팅으로 세공한 사파이어 귀걸이. 보석 표면에는, 결혼의 당사자가 되는 두 가문의 상징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심지어 그냥 사파이어조차 아니다. 사파이어 중에서 가장 다루기 어렵고 희귀하다고 불리는 ‘푸른 수레국화 사파이어(Cornflower Blue Sapphire)’다.
“응, 나쁘지 않네.”
그녀가 입고 있는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보며 마린이 쓴웃음 지었다.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으세요.”
시녀가 걱정스러운 듯 말을 잇는다.
“역시 상대가 그 ‘나이트워커 가문’이니까…….”
“그런 거 아니야, 마르실.”
걱정스러운 듯한 시녀의 말에 마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옛날에는 이런 하늘하늘한 옷을 입는 게 죽는 것보다 싫었거든.”
“…….”
“그런데 막상 입어보니 의외로 나쁘지 않아서 말이야.”
마린이 수줍은 듯이 물었다.
“어때,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아주 잘 어울려요, 아가씨.”
시녀가 마지막으로 신부의 화장과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미소 지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아가씨.”
* * *
그 시각.
시엔은 여차할 때를 위해 거미 허물로 짠 흑색 정장을 신랑 예복으로 입고, 하객들을 맞을 준비에 앞서 초로의 노신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돈 루치아노께서도 결혼을 하셨지요.”
“아내가 죽은 것은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입니다.”
「늙은 암살자」 루치아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는 이제 기억조차 희미하군요.”
말끔하게 차려입은 정장 차림, 희끗희끗한 올백머리의 기품 있는 노신사. 콘실리에리 루나를 제외한 가문 내 최고 연장자.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 역시 필요에 따라 결혼을 하고 가문 사이를 잇는다. 어디까지나 자식을 낳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아내분께서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
짧은 침묵 끝에 루치아노가 대답했다. 감정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돈 시엔.”
그게 나이트워커 가문의 방식이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전부니까요.”
“그렇겠죠.”
시엔 역시 달리 부정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루치아노의 목에 걸린 펜던트 속에, 죽은 아내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굳이 입에 담지 않고.
“그럼 갈까요.”
알기 쉬운 감상에 젖어 드는 것은 잠시였다. 어느덧 준비를 마친 시엔이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느긋하게 결혼을 축하하고 덕담이나 주고받는 자리가 아니니까.
모두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전쟁을 준비할 때였다.
* * *
그 시각, 수도 베네토의 총독궁에 있는 어느 일실.
대다수 하객이 시엔과 마린의 결혼을 위해 세워진 ‘수정성 나디아’의 경이에 넋을 잃고 있는 사이, 그곳에서는 하나의 비밀스러운 회동이 이뤄지고 있었다.
베네토 공화국의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
칠왕국 연방의 ‘원탁왕’ 아서 펜드래곤.
샤를마뉴 왕국의 ‘검성’ 롤랑 드 뒤랑달.
신성 로마누스 제국의 ‘검마’ 오스왈드 그란델.
공식적으로 각 나라와 대륙의 최강자라 일컬어지는 네 명.
“바쁘신 와중,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해주셔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들 앞에서 라일라가 나지막이 미소 짓는다. 곁을 보좌하는 그녀의 오라버니─ 《웃는 남자》와 함께.
“설마 이런 조촐한 결혼식에, 이렇게나 많은 분께서 화답해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답니다.”
그 말에 침묵을 깨트린 것은 칠왕국의 맹주, 원탁왕 아서였다.
“브르타뉴 공작령에서 네놈들이 저지른 짓을 모를 것 같나?”
“글쎄요, 무슨 말씀을 하는지.”
라일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우리는 그저 거래를 이행했을 뿐이랍니다.”
“네놈들 가문의 박쥐 같은 짓이 언제까지고 용납받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라.”
“애초에 용납해줄 생각이 있기는 하셨나요?”
라일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곳에 있는 이들, 하나하나가 세계의 저울을 유지하고 있는 강자들 사이에서.
시엔의 말이 옳다. 나이트워커 가문이 전쟁을 치르는 양쪽 모두에게 돈을 빌려주고 전쟁을 부채질하는 것을 모를 정도로 이곳에 있는 이들은 바보가 아니다.
동시에 그걸 알고 있음에도 나이트워커 가문에 손을 빌리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니까.
“우리 가문은 어디까지나 이 세계의 필요악(必要惡)일 뿐이랍니다.”
라일라가 말했다. 그 말에 검성 롤랑 경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악은 악이다.”
웃고 나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커다란 악, 작은 악, 어쩔 수 없는 악, 모두 똑같지. 세상에 정당화될 수 있는 악 따위는 없다.”
“그런 것치고는 샤를마뉴 왕국 역시, 우리의 ‘악’에 제법 많은 빚을 지고 계시지 않나요?”
라일라가 되물었다.
“흠, 이것 참.”
그 말에 침묵하고 있던 제국의 칼날, 검마 오스왈드 그란델 대공이 조소하듯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공화국의 ‘암살자들의 어머니’께서는, 이곳에 있는 우리 모두를 적으로 돌리려는 모양이군.”
“어머나, 아니었던가요?”
라일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우리 가문이 나약함을 드러내는 그 순간, 이곳에 있는 공들께서는 필시 게걸스러운 하이에나 떼처럼 몰려들어 이 나라와 우리 가문을 물어뜯겠죠.”
“그걸 알고도 이깟 유치한 도발을 하는 이유가 뭐지?”
“저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고 있답니다.”
라일라가 말했다.
“이곳에 있는 우리는 모두 서로의 적이며, 우리가 손을 잡을 때는 오직 ‘적의 적’을 쓰러뜨리기 위함이란 사실을 말이죠.”
“그럼 눈앞에 있는 적의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우리 세 나라가 힘을 합치는 것은 어떻겠소?”
검마 그란델 대공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우리가 당장 힘을 합쳐 ‘암살자들의 어머니’를 제거하고,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그들에게 진 거액의 채무 각서를 불태우는 것. 필시 귀공들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의가 아닐지.”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칼자루 위에 손을 얹으며.
그리고 검마의 갑작스러운 제의 앞에, 원탁왕 아서가 헛웃음을 흘렸다.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이 없어지는 것은 네놈들 신성 제국이 바란 평생의 숙원이 아니었나?”
“그것도 때마침 우리나라와 칠왕국이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말이오.”
그것은 침묵하고 있던 롤랑 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기사는 약속을 깨트리지 않는다. 우리는 나이트워커 가문에게 빚을 졌고, 채무를 갚을 의무가 있지.”
“여전하군, 롤랑.”
검마 오스왈드가 차갑게 조소했다.
나이트워커 가문은 세계의 적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달리 거창한 까닭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그들 모두가 서로의 적이었으니까.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적의 적’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다. 설령 그것이 세계의 적이라도.
이 세계는 애초에 ‘원 팀’이 아니니까.
라일라 역시 깨달을 수 있었다.
시엔이 틀렸다.
이 대륙의 질서, 천칭의 평형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동시에 시엔이 옳았다.
성년이 된 시엔이 규격 외의 재능을 드러낸다고 해서 그들 가문의 존재가 위협받을 정도로, 나이트워커 가문과 공화국이 쌓아 올린 힘은 약하지 않다.
그렇기에 세계의 눈치를 보며 시엔의 성장세를 숨기고 늦추려던 것이야말로, 정작 라일라가 저지를 수 있었던 최악의 오판이다.
시엔이 성장하든 말든, 천칭의 평형은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까.
* * *
그 시각, 수정성 나디아.
그곳은 시엔조차 놀라움을 감출 수 없는 경이였다.
서펀트 가문 최고 원로회, 아홉 머리 히드라의 모두가 모여 펼치는 대규모 수계 영창. 그것도 바다 위에서 물로 하나의 궁전을 쌓아 올리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란 말 외에 부를 도리가 없었다.
차박.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로 이루어진 복도가 가볍게 일렁였다. 딱히 망령의 자세, 수상비의 초식을 쓰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얼음도 아니고, 그저 물이 딱딱하게 굳은 벽돌처럼 시엔의 무게를 지탱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주위의 풍경 역시 마찬가지다.
물로 쌓아 올린 벽과 계단. 거기에 카펫과 황금 장식, 샹들리에나 조각상 같은 예술 작품들이 화룡점정으로 장식된 경이로운 풍경.
어지간한 호사에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귀족들조차 넋을 놓고 압도될 수밖에 없는 정경이다.
“앗, 시엔! 시엔이다!”
바로 그때, 방정맞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텔 누님, 헨젤 형님.”
“시엔! 진짜 몰라볼 정도로 다 컸구나! 완전 진짜로 대단해!”
어린 소녀가 흡족해서 참을 수 없다는 듯 까치발을 들며 시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시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신랑을 향해 예를 표하고 있던 하객들과 좌중 사이에서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하이마스터 남매, 마녀 사냥꾼 헨젤과 그레텔.
심지어 그들이 전부가 아니다.
“시엔.”
“린 누님.”
“어엿한 가문의 ‘진짜 어른’이 되었구나.”
칠흑의 붕대로 눈동자를 가린 「밴시」 린.
그리고─
“겨, 결혼 축하해…….”
“고마워요, 앨리스 누님.”
“그래도…… 잊어버리면 아, 안 돼…….”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말을 잇는 또 하나의 가족.
“뭘요?”
“우, 우리에게는…….”
“가족이 전부지요.”
“으, 응. 그, 그리고 또…….”
“그것도 명심하고 있어요.”
가족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란 것.
그 대답에 말을 더듬거리던 「대량학살장치」 앨리스가 활짝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구나, 시엔.”
“이자벨 누님.”
하나둘씩 모이는 마스터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비고 형.”
“임무로 늦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딱 맞춰 온 모양이네.”
“너무 일찍 와서 지루할걸.”
시엔의 말에 비고가 조용히 웃는다.
“티아도 함께 왔어.”
“항상 챙겨줘서 고마워, 비고 형.”
“딱히 챙겨준 적 없어.”
시엔의 말에 형 비고가 고개를 젓는다.
“같은 가족끼리 함께 임무를 수행한 거지.”
“시엔 대부님.”
어느덧 비고와 함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티아가 미소 짓는다. 시엔의 대녀이자 두 살 어린 여동생, 그리고 어엿한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로서.
“앗! 티아, 티아다!”
“야, 이 멍청이 그레텔! 귀청 떨어지겠으니까 호들갑 좀 작작 떨어!”
그리고 티아를 보자마자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그레텔이 뛰어가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이렇게 가족들이 모이게 돼서 기뻐요.”
“어머나, 어쩜 이리 의젓할 수가!”
“역시 우리 티아구나.”
티아의 말에 손에 들린 포도주를 홀짝이며 이자벨이 웃었다.
어디에나 볼 수 있는, 결혼을 앞둔 신랑과 화목한 형제자매들의 모습. 그리고 그들의 존재에 지금껏 떠들었던 축제의 소란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소름 끼치는 정적이 내려앉는다.
이 자리에서 웃고 떠들며 담소를 나누는 것은 그들밖에 없다.
그게 시엔의 가족이자 전부,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