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결혼식 (2)
그 시각, 수정궁 나디아의 일실.
시엔 나이트워커와 마린 서펀트, 두 대가문의 주례를 맡기로 된 베네토 대주교의 대기실.
똑똑.
그 방에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실례합니다, 형제자매님. 곧 주례가 시작되는지라…….”
허락조차 구하지 않고 멋대로 방에 들어오는 실루엣을 향해, 베네토 대주교가 말을 이으려는 찰나.
“아, 아, 아아…….”
대주교의 얼굴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 * *
수정궁 나디아, 거울의 방.
터무니없을 정도로 널따란 그곳은 마치 바다 위를 두 발로 걷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결혼식의 시작을 알리며 주례 단상 위의 촛불에 불이 타올랐고, 동시에 수정궁의 외벽이 무너져 내렸다.
“!”
갑작스러운 붕괴에 몇몇 귀족들이 당황해서 호들갑을 떨었으나 무너진 것은 어디까지나 외벽이 다였다.
그리고 무너진 외벽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태양이 그들을 맞아주었다.
동시에 일대의 바다 곳곳이 소용돌이치며 용오름을 일으켰다.
아홉 마리의 바다뱀이 펼치는 용오름.
서펀트 가문 최고 원로회, 히드라의 아홉 장로들이 사역하는 세계 뱀─.
터무니없을 정도의 규모로 기획된 쇼 앞에서, 결혼식에 초대된 이들 모두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화촉점화(樺燭點火)와 함께 어느덧 신랑 시엔 나이트워커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을 벽돌처럼 쌓아 올린 실내에, 오직 시엔의 앞길을 위해 특별히 결정화된 얼음의 복도를 따라.
갈라지는 좌중의 무리 속에서 시엔이 담담히 걸음을 옮겼고, 뒤이어 신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백의 드레스에 사파이어 귀걸이, 진주 목걸이로 치장한 레이디 마린.
마찬가지로 새하얀 정장을 입고 그녀의 손을 이끄는 라파엘로 제독이 있었다.
어느덧 마린을 이끌며 주례 단상 가까이 다가서는 라파엘로 제독이, 시엔을 향해 마린의 손을 넘겨준다.
“돈 라파엘로.”
“돈 시엔.”
어느덧 라파엘로의 손을 떠나 마린이 시엔과 손을 맞잡았고, 가볍게 예를 표하며 라파엘로가 걸음을 물렸다.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뒤로하고.
알기 쉬운 악단의 노래는 없다.
그저 휘몰아치고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그들의 결혼을 위해 울려 퍼지는 노래와 다름없으니까.
그리고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이, 주례를 맡기로 약속된 베네토 대주교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
마린의 손을 쥐고 있는 시엔의 손에, 무심코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었다.
“시, 시엔?”
당황하며 마린이 속삭였다. 시엔이 이내 힘을 풀며 고개를 젓는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평정을 가장하며.
“조금 떨려서 그래.”
“너답지 않네.”
시엔은 달리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앞의 주례를 담당하는 성직자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돌렸다.
당초 주례를 맡아야 할 베네토 대주교가 아니다.
칠흑의 베일을 쓴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정체를 모를 시엔이 아니었다.
“아, 참으로 멋진 신랑과 아름다운 신부네요.”
베일을 쓴 여성이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설마 그 나이에 벌써 가문의 하이마스터가 될 줄이야.”
“……부디 앞으로는 신중히 말을 골라야 할 겁니다.”
그렇기에 시엔 역시 감정 없는 목소리로 싸늘하게 내뱉었다.
“여기가 누구의 땅이자 ‘영역’인지, 설마 그 의미를 모를 리는 없을 테니.”
“이 세계의 어디에 있든, 우리는 모두 주님의 앞에서 발가벗은 어린 양이랍니다.”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예정된 주례사가 아니었다. 그 의미를 헤아린 마린이 차갑게 숨을 삼켰다.
“자, 모두 신랑과 신부를 위해 하느님의 앞에 기도하죠.”
칠흑의 베일을 쓴 여성이 모두의 앞에서 소리 높여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베네토 대주교님께서는 아주 ‘부득이한 사정’으로 주례를 맡지 못하게 되었고, 저는 그분의 부탁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답니다.”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아퀴나스.
제국 국교회의 가장 커다란 흑막이자, 대륙 제일의 최강자들과 비공식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괴물.
“그리고 저는 이 자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신랑과 신부를 축복하고, 두 사람이 ‘새로운 가족’으로 맺어지는 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찬미하고자 이곳에 섰답니다.”
빌헬미나가 즐거운 듯 말을 잇는다.
“자, 그럼 예식을 시작할까요?”
대체 무슨 수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이렇게 득실거리는 곳에서 들키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았나.
놀랄 것은 없었다. 그게 바로 신앙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들 교회의 방식이니까.
나이트워커 가문의 눈과 귀를 피해 암약할 수 있는 그림자 속의 적들.
“우리 마음속의 비밀을 모두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서, 신랑 신부 두 사람께서는 ‘진실한 대답’으로 혼인 서약에 답해주시길 바랍니다.”
헤아릴 수 없는 눈이 이곳을 지켜보고 있다. 아무리 이곳이 그들 서펀트 가문의 영역이자 나이트워커 가문의 땅이라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신랑 시엔 나이트워커.”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가 말을 잇는다.
“별과 단검의 이름 아래 신부 ‘마린 서펀트’ 양을 진심으로 사랑할 거라 맹세하시나요?”
“─.”
일대에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더 이상 예정에 없는 주례니 뭐니 하는 문제조차 아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제국 국교회의 도발이었다.
“신부 마린 서펀트.”
그러나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 중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이 다가 아니었으니까.
“위대하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싸늘한 정적 속에서 빌헬미나가 말을 잇는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여자들이 말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율법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
“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이는 아담이 창조되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차가운 표정으로 침묵하는 마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빌헬미나가 말을 잇는다.
“신부 마린 서펀트는 여자의 몸이 갖는 죄와 어리석음을 알고, 주님께 순종하듯 신랑에게 순종하고 복종하겠다 맹세하시나요?”
“…….”
마린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긍정도 부정도 불가능하다. 부정하는 순간 그녀의 행위는 ‘신의 말씀’을 부정하는 행위가 될 테고, 긍정하는 순간 자신이 바다 위에서 싸우는 해군이 아니라, 그저 남편의 뜻에 충성하고 살림살이에 전념하는 ‘여자’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셈이니까.
그래야 할 그녀가 시엔과 떨어져 바다 위의 전장에서 활약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행위가 되어 꼬투리를 잡힐 것이다.
수를 쓸 거라 예상은 했다. 그러나 설마 이런 식일 줄은 시엔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여기서는 내가…….’
그렇기에 시엔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려는 찰나.
“저 역시 신의 말씀을 깊이 새겨듣고 있답니다.”
침묵하고 있던 마린이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빌헬미나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니,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어쩌죠? 저는 하느님이 말하는 인간 여자가 아니라서요.”
“─.”
그녀는 신의 모습을 본뜬 인간이 아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이 인간 여자에게 일러준 말도 규칙도 그녀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첨벙!
레이디 마린이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모두가 벽돌처럼 두 발을 딛고 있는 수정성의 물속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순백의 웨딩드레스 밑으로, 은빛처럼 빛나는 꼬리지느러미를 드러내며.
인간의 상체에 물고기의 하체를 가진 이형의 종족, 머메이드.
“그리고 저는 자애로운 신이, 설령 그분의 형상을 본뜨지 않은 이들조차 기꺼이 굽어살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답니다.”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괴물.
“자애로운 하느님께서 기꺼이 그의 형상을 본뜨지 않은 ‘피의 괴물’을 교회의 추기경으로 임명하셨듯 말이지요.”
《피의 추기경》 체사레 보르자.
그들에게 신이 인간에게 일러준 ‘율법’은 통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서약하겠답니다.”
홀로 수정성의 물로 된 바닥 아래 잠겨, 상체를 드러내고 있는 마린이 말했다. 신랑 시엔에게 손을 내밀며.
“나 서펀트 마린은 신랑 ‘시엔 나이트워커’를 남편으로 맞이하며─.”
“나 시엔 나이트워커는 신부 ‘서펀트 마린’을 아내로 맞이하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아프거나 병들거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고 아낄 것을 서약합니다.””
그녀는 알기 쉬운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시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시엔이 정중하게 무릎을 꿇는다. 물속에 잠겨 있는 마린에게 얼굴을 가까이하며.
서로의 입술이 포개졌다.
“…….”
주례를 집전하는 빌헬미나의 베일 밑에, 비로소 소름 끼칠 것처럼 시린 냉기가 깃든다.
“참으로 총명하기도 하시지.”
물론 그것은 아주 잠시였다. 고작 이 정도 일에 평정을 깨트릴 정도로 《죽음의 성모》는 어수룩하지 않으니까. 그저 여느 때처럼 미소 지으며 평정을 지킬 따름이다.
“부디 두 부부의 앞길에, 부디 하느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어느덧 울려 퍼지는 악단의 노랫소리와 함께 그들의 머리 위로 순백의 꽃잎이 눈처럼 내려앉는다.
나란히 걸어 나가야 할 버진로드 위, 어느새 인간의 새하얀 두 다리를 가진 마린이 시엔과 함께 그곳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하는 하객들의 환호 속에서, 동시에 그들을 지켜보는 헤아릴 수 없는 가족과 적들의 눈빛을 뒤로하고.
* * *
“후, 각오하기는 했는데 막상 보니 눈에 자꾸 습기가 차네.”
그 시각, 남겨진 라파엘로 제독이 라일라의 곁에서 눈물을 훌쩍이며 말했다.
“사업 말아먹고 금 10톤을 날려 먹을 때도 이거보다는 덜 슬펐던 것 같은데.”
“호들갑도 심하시네요.”
그 모습을 보며 라일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린 양은 여전히 제독 곁에서 이 나라를 위해 싸울 것이고, 시엔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뭐, 달라질 거야 없겠죠. 그나저나…….”
라파엘로 제독이 담담히 말을 잇는다.
“조금 이상하네요.”
“뭐가 말이죠?”
“이곳 수정성에서, 그것도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저 여자는 도대체 무슨 수로 대주교의 모가지를 따고 주례사 자리에 당당히 나타났을까요?”
“그게 교회의 방식이니까요.”
“흠, 제 생각은 조금 달라서 말이죠.”
“무슨 생각이죠?”
“제국이 두 사람의 결혼에 어떤 식으로든 ‘훼방’을 놓을 거란 사실은 아마 지나가는 금붕어도 알 겁니다. 경애하는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 역시 예외가 아닐 테죠.”
라파엘로 제독이 말했다.
“그리고 때마침 ‘누군가’도 이 결혼을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는 까닭에─ 교회의 암약을 알고도 일부러 눈을 감았다……. 제 추리가 좀 그럴싸해 보이나요?”
“비약이 심하시네요, 라파엘로 제독.”
라일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또 뭐라고, 아들 사랑이 과하신 어머니께서 이때다 싶어 슬쩍 눈이라도 감아준 줄 알았죠.”
“부디 어리석은 농담은 때와 장소를 가려 주시길.”
“아, 물론 가리고 있답니다.”
라파엘로 제독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니 할 수 있을 때 실컷 해둬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수정성 일대에서 좌중을 압도하는 아홉 마리의 거대 바다뱀이자 고대 수룡종.
그중에서도 독보적일 정도의 두각을 드러내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커다란 바다뱀과 용오름을 등진 채.
서펀트 가문의 야망 넘치는 가주이자 히드라의 수괴, 《세계 뱀 요르문간드(Jǫrmungandr)》를 사역하는 대양의 지배자가 말했다.
“저는 물 위에서 유능하니까요.”